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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악마 사냥꾼이 되었다-3화 (3/202)

#3

켈피

찰팍, 찰팍.

고여있던 빗물이 말발굽에 튀었다. 가죽 코트 위로 걸친 여행용 망토에 달린 후드 위로도 빗물이 떨어져 튀었다. 여행용이라서 기름을 먹인 망토지만, 이렇게 쏟아지는 빗물은 버틸 수 없다.

“아주 죽어라, 죽어라 하지.”

이 빌어먹을 세계는 배경이 영국이라도 되는 건가? 심심하면 비가 온다. 어찌나 비가 많이 오는지 옷이 마를 일이 없다.

에드는 후드를 들어서 저 멀리 앞을 보았다. 길가에 마침 비를 피할 곳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 몇 개가 모여서 고인돌처럼 뭉쳐있는 곳.

그리 크지는 않아도 오늘 밤은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을 몰아 바위 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한 에드는 근처에 말의 고삐를 묶어서 함께 비를 피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이라도 피우면 좋겠지만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는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입고 있던 여행용 망토를 벗어서 힘껏 털어 빗물을 날려버리고는 옆의 바위에 넓게 펼쳐 놓았다. 그리고 바위에 등을 기댄 채 비가 쏟아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대기 오염을 탓하며 사람들이 더는 산성비를 맞지 않으면서부터였을 거다. 이렇게 쏟아지는 비를 맞지도 않고, 잘 보지도 않게 된 것이.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곳은 아직 오염되지 않아서 그런지 비를 보면서 산성비라는 걱정보다는 감성을 채울 수 있으니까.

가방을 뒤져서 육포를 꺼내 입에 물고 질겅이면서 비가 쏟아지는 것을 바라보던 에드의 눈에 어둠속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비가 오는 데도 꺼지지 않는 것을 보니 램프 안에 들어있는 불빛이었고, 불빛의 거리를 보니 마차의 좌우에 매달린 불빛으로 보였다.

이렇게 비가 와 진창이 된 곳을 마차를 타고 여행하는 중인가 보다. 그런데 불빛이 기울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얼씨구.”

고생 좀 하겠다 싶었다. 빗줄기 때문에 목소리가 먹혀서 잘 들리지 않지만 고함이 들리고 어쩌고 하는 것을 보니 마차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진창에서 마차 바퀴가 그리 쉽게 나올 리가 있겠는가?

내 마차가 빠졌다면 빡치고 짜증났겠지만, 남의 일이니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육포를 뜯으며 불빛을 바라보는데 불빛이 흔들리더니 점점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빗물을 뚫고 다가오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이 근처에서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이 고인돌 밑밖에 없었으니 피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와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 그리고 우산을 들고 있는 시녀와 대머리 마부까지 있었다. 대머리 마부의 손에는 말 두 마리의 고삐가 쥐어져 있었다.

쌍두마차를 타고 다니는 이들. 적어도 귀족이라는 말이다.

기사를 호위로 둘 정도라면 이름 있는 가문의 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들은 다가오다가 고인돌 밑에 에드가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대뜸 자리를 바꿨다.

기사가 소녀의 앞을 막았다.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그들이 들고 있는 램프에서 비치는 불빛에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대머리 마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마차 바퀴가 빠져서 그러는데 같이 비를 피해도 되겠습니까?”

에드는 오히려 놀랐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귀족의 일행이 여행자에게 양해를 구하는 꼴을 못 보았으니까.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의 눈치를 보면서 대머리 마부가 고인돌 아래로 들어왔다. 에드가 말까지 비를 피하게 하던 중이라 여유 공간이 그리 넓지는 않았다.

마부는 말들을 근처 나무로 데려가 묶어서 조금이라도 비를 피하게 하는 동안 시녀가 가지고 온 담요를 바위에 깔고 소녀를 앉혔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담요로 소녀의 어깨를 덮어줬다. 그러는 동안 기사는 에드를 견제하고 있었다.

에드는 기사와의 간격을 읽어 보았다. 고인돌 안에 들어와서 거리는 검을 휘두르면 닿을 정도의 거리. 하지만 이 정도 간격이라면 상대가 검을 뽑는 동안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육포를 씹었다.

마부는 말을 묶고는 돌아와서는 머리를 슥슥 문질러서 빗물을 털어냈다.

“불을 피워야 할 것 같군. 비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으니.”

기사의 물음에 마부의 안색이 썩어들어 갔다.

“나무들이 다 젖어서 불을 피우기 어렵습니다.”

기사는 부연 설명을 하지 않고 가만히 마부를 바라보았다. 그 무언의 눈빛에 마부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빗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마부가 장작으로 쓰일 나무를 구해오는 사이에 에드는 씹던 육포를 삼키고는 손가락을 쪽 빨았다. 더는 할 일이 없는 상황.

바위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낯선 일행과 함께 있으면서 잠을 청할 수는 없으니 눈을 감고 피로만 풀 생각이었다.

아칼란과 다음 약속을 잡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다시 자신의 앞에 나타날 터였다.

지금까지는 소문에만 의지해서 악마들을 쫓았다. 하지만 아칼란과 엮이게 된다면 훨씬 양질의 악마들을 잡을 수 있으리라.

그 전에 자신이 놈들을 사냥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는 것이 먼저이기는 했지만.

눈을 감고 앉아있는데 마부가 돌아와 불을 피우려고 하는 소란 때문에 살짝 눈을 떴다. 푹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비술사라도 있다면 모를까 일반인이 붙이기에는 어려운 일.

그래도 마부는 어떻게든 불을 붙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눈을 감는데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소리가 난 곳을 보니 소녀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기사가 소녀의 눈치를 보더니 에드를 돌아보았다.

“여행자인가?”

에드는 눈을 떠 기사를 바라보았다. 왜 묻는 거냐는 듯 바라보자 기사가 짧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혹시 요기 거리가 있는가? 사례하겠네.”

에드는 그 물음에 잠깐 고민하다가 소녀를 바라보았다. 고작 10살 정도의 아이. 귀족이라면 더더욱 배를 곯아 본 일이 없을 터였다.

에드는 픽 웃음을 흘렸다.

귀족이라고 해도 애는 애다. 대화를 나눠보면 애새끼로 보이겠지만, 아직 대화를 안 나눴으니까.

에드가 가방에서 육포와 마른 빵을 꺼내며 말했다.

“은화 두 닢.”

기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긴 이 정도는 마을에서 사면 동전 열 닢이면 살 수 있었으니까.

“이보게.”

“돈 없으면 말고.”

에드가 다시 가방에 육포와 마른 빵을 집어넣는 모습을 보고 소녀가 입을 열었다.

“누가 돈이 없다고 했지?”

소녀가 시녀에게 눈짓하자 시녀가 다가왔다. 에드는 시녀가 건네는 은화 두 닢을 받고 육포와 마른 빵을 건넸다. 시녀가 육포와 마른 빵을 가지고 돌아간 사이에 마부는 용케 불을 붙였다.

연기가 가득했지만, 그래도 불을 붙인 것이 어딘가?

마부는 후후 불어서 불씨를 살려냈다. 그때 시녀가 건넨 육포를 씹다가 인상을 찌푸린 소녀가 시녀에게 다시 건네주며 말했다.

“구워줘.”

시녀가 이제 막 붙은 불에 가서 육포를 굽는 모습을 보고 에드는 옆에 내려놓았던 활을 무릎 위에 올려놨다. 전통의 화살까지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 행동에 기사가 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경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드는 말없이 활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비가 쏟아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비 오는 날에 나타나는 악마가 있다. 악마 켈피.

비 오는 날이라고 모두 켈피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확률이 올라갈 뿐이지.

그런데 육포를 불에 굽는다?

나타날 확률이 많이 오른다. 그래서 준비한 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냥 이렇게 휴식을 취하다가 비가 그치면 헤어지면 될 일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켈피와 싸워야만 한다.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빗소리 속에서 말의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뼈를 씹어먹는 험악한 소리가 들려왔다.

차앙!

단숨에 검을 뽑아 든 기사가 소녀의 앞을 막는 사이에 에드는 말없이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기사는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마도 미리 활을 준비한 것 때문에 묻는 것 같아 에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비가 오는 날은 켈피가 날뛴다고 하지.”

“켈피?”

켈피의 이름은 꽤 유명하다. 비 오는 날 우는 아이들에게 켈피가 잡아간다는 말을 할 정도로.

기사가 긴장한 채 검을 쥐고는 소녀의 앞을 막은 채 말했다.

“아가씨. 눈을 감으십시오.”

에드는 기사의 말에 그의 뒤에서 바짝 얼어있는 소녀를 보았다. 겁에 질린 소녀와 그녀를 안고 있는 시녀. 마부도 채찍을 든 채 기사의 뒤편에 서 있었다.

에드는 저들이 도움 되기를 바라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언제든 활을 쏠 수 있게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으려니 우적우적 씹는 소리가 사라졌다.

두 마리의 말을 먹어치우는 속도를 보니 제법 덩치가 큰 놈인가 보다.

철퍽!

힘겹게 피운 모닥불의 불빛에 빗줄기가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악마를 볼 수 있었다. 네 발로 선 말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벌어진 입에 달린 날카로운 이빨을 본다면 말이라고 부르는 이는 없으리라.

게다가 네 발로 서 있지만, 체고가 3미터는 되니 어지간한 말의 두 배가 넘는 크기다.

그런 켈피의 검은 두 눈이 좌중을 훑었다. 그 눈은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에드는 문득 든 생각에 고인돌을 돌아보았다. 하긴 숲속에 이렇게 비를 피하기 좋은 곳이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귀족이 숲 한 가운데 이만한 바위를 쌓아 만들 일도 없을 터.

어쩌면 저 녀석의 함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육포를 굽지 않았어도 나타났을 터.

켈피가 입을 벌린 순간 긴 혓바닥이 기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래도 기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검을 휘둘러 혓바닥을 베어냈다.

그러나 혓바닥은 검을 피하며 기사의 손목을 휘어 감았다. 기사가 반사적으로 팔을 잡아당기려는 순간 켈피가 돌진해 왔다. 혓바닥을 당기면서 돌진해오는 터라 기사가 반응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콰앙!

기사의 흉갑이 우그러지면서 뒤로 튕겨 날아갔다. 기사는 충격에 기절했는지 고개를 떨군 채 일어나지 못했다. 기세 좋게 나서기에 뭔가 보여주려나 싶었지만, 이런 시골에 사는 기사에게 너무 큰 기대를 했나 보다.

“바델 경!”

소녀가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낮은 숨소리를 들어보니 죽지는 않았다.

그때 대머리 마부가 용기 있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럴 거면 눈을 뜨고 휘두르던가?

켈피의 혀가 대머리 마부의 채찍을 피해 그대로 그 머리를 후려쳤다.

우드득.

대머리 마부의 머리가 등 쪽으로 돌아갔고, 그는 모닥불 위로 쓰러졌다. 불티가 사방으로 날렸다.

기사는 생사를 알 수 없고, 대머리 마부는 확실히 죽었다. 소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날 구해다오!”

에드는 어차피 상대가 악마라면 살려둘 마음이 없었다. 이 세계의 끝을 보자면 악마들은 잡고 또 잡아야 했으니까. 백해무익한 녀석들이기도 했고.

그러나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마음도 없었다.

“얼마?”

“돈은 달라는 대로 주겠다!”

켈피가 다음으로 누굴 노릴까 고민하는 사이에 에드는 간단히 답했다.

“그 약속 지키시오.”

괜히 소녀를 구해주고 보상을 받겠다고 그의 부모를 만나러 가면 귀찮은 일만 생긴다. 이 세계의 귀족들은 현대판 재벌은 비교도 안 되는 선민의식을 가진 자들이니까.

일이 끝나면 지금 가지고 있는 돈만 받아갈 생각이었다. 일단 그 전에 이놈부터 죽이고.

에드가 앞으로 나서서 소녀의 앞을 가리자 켈피가 눈을 뒤룩 굴리더니 혓바닥을 날렸다. 마치 창날처럼 찔러오는 혓바닥을 에드는 간단히 고개를 기울이는 것으로 피하고는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켈피의 혓바닥을 뚫었다.

끼에에엑!

에드는 새로운 화살을 시위에 걸며 중얼거렸다.

“뭔 놈의 혓바닥이 그리 기냐?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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