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202화 (202/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202화>

202. 귀향길 (1)

이르민술의 사건이 일단락된 이후.

세계수를 포함해 모든 초월자의 힘은 나에게 귀속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잡음은 있었다. 뒤늦게 어린 엘프들이 반발하며 들고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혼란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모두 진정하고 원로원의 말에 따라 주세요. 루카라는 분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엘프들의 분노를 잠재운 건 다름 아닌 타리엘이었다.

그녀를 필두로 카리엘과 여러 원로가 일반 엘프에게도 자세한 내막을 설명해 주었다.

세계수는 엘프를 도구처럼 여기며 목숨마저 가볍게 여겼다는 불편한 진실.

처음에는 아무도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들끓던 감정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대략 2주가 지난 현재.

나는 판게아에서 돌아와 마계의 한복판에 있었다.

인페르노 영지를 꿰뚫는 산맥, 그중에서도 마계에서 가장 높은 ‘마라주 봉우리’라는 곳이었다.

왜 갑자기 여기에 왔느냐면, 아직 매듭지어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한다?”

나는 봉우리 정상에 서서 오른팔을 위로 뻗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적발의 여인이 두 팔을 휘두르며 압축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잠시만! 아직 기다려 봐. 이번에는 저번처럼 놓칠 수 없지!”

마공학 카메라.

스칼렛이 꺼낸 물건은 이 장면을 기록하기 위한 물건이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겠지만, 판게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스칼렛은 매우 진지한 상태였다.

“좋아, 준비됐어.”

“흠흠, 알겠어. 이번에는 잘 찍어 봐.”

슈우우,

셔터 위에 손가락을 올린 스칼렛을 의식하며, 나는 남아 있는 대부분의 근원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구슬들은 손바닥 위에서 맴돌며 밝게 빛났다.

‘조금 아깝기는 해도 이것들은 쥐약이랑 다를 게 없으니.’

아쉬운 마음보다는 후련함이 더욱 컸다.

근원이 내가 원하는 바를 이뤄 주지는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며칠 전에 판게아에서 근원을 해방했을 때, 이 선택이 옳다는 확신을 얻었다.

“와아. 언제봐도 예쁘다.”

스칼렛은 생성된 구체를 보며 순수히 감탄을 내뱉었다.

확실히 예쁘기는 하지. 이것들 때문에 그 사달이 났다는 게 문제지만.

나는 미련을 털어내며 모든 재앙의 원흉이 되는 힘들을 쏘아 올렸다.

관리자들의 목표는 두 차원의 정상화. 그걸 위해서는 많은 수의 근원을 차원에 귀속시켜 손상된 균형을 회복하는 게 먼저였으니.

피유우우우.

근원들은 폭죽처럼 높이 솟아오르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노을빛 하늘 속에서 새하얀 구체들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니, 마치 유성우가 퍼져 나가는 것처럼 멋진 풍경을 만들어 냈다.

찰칵, 찰칵.

근원들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몇 초가 흐른 이후, 스칼렛은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진짜 잘 찍혔을 거야.”

“너무 기대하지는 않는 게 좋을 텐데? 원래 희망과 기대는 배신당하는 법이라고.”

“치이. 실패해도 상관없어. 루카랑 같이 있는 게 중요한 거니까.”

스칼렛은 마공학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고 뒤에서 양팔로 내 허리를 감쌌다.

높은 봉우리 위에 있는 한 쌍의 남녀.

주변에는 커다란 고급 텐트가 펼쳐져 있고, 아늑한 모닥불과 각종 캠핑 도구들이 즐비했다.

분위기만 보면 오지로 단둘이 여행 온 커플의 모습이었다.

“이 자세 뭔가 좋다.”

내 등에 매달려 콧노래를 부르는 스칼렛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귓가를 살살 건드렸고, 따스한 기운이 몸을 감싸며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전부터 꿈꾸었던 휴식의 조건이 이 자리에 모두 모인 셈이었다.

‘세상이 멈추면 좋겠다는 말. 무슨 뜻인지 새삼 공감이 가네.’

이 안정감을 찾기까지 얼마나 고된 길을 걸어왔던가.

평상시라면 이럴 시간에 칼자루를 쥐었을 것이다. 그만큼 농땡이를 피며 논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느긋하게 스칼렛의 체온을 느끼고 있을 무렵.

“루카, 나 준비됐어.”

“응?”

“하자, 그거.”

적발의 여인은 야릇한 목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요구했다.

더군다나 양손으로 복부를 살살 문지르며 말하니, 분위기는 따스함에서 순식간에 뜨거움으로 변모해 갔다.

‘또 해?’

나는 고개를 앞으로 고정한 채 대답을 미뤘다.

세계수를 처단한 뒤부터 우리의 관계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크게 발전했다.

게다가 둘이서 마계와 판게아를 여행하며, 안 그래도 빠른 속도에 가속도까지 붙어 버렸다.

“저, 스칼렛. 조금 전에도 했잖아.”

애당초 이런 험지에서 단둘이 무엇을 하겠나.

우리는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자연 속에 파묻혀 많은 사랑을 나눴다.

텐트 안에 있는 침구류에 격렬했던 흔적과 온기가 아직 남아 있을 정도로.

“우웅, 그래서 싫어? 루카가 먼저 알려 준 거잖아.”

“아니, 그게…….”

그래, 인정한다.

처음 스칼렛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했던 사람은 내가 맞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건 뭐랄까. 평온한 휴식 사이에서 가끔 벌어지는 격렬한 사랑이었다.

근데 지금은 주객이 전도된 느낌에 가까웠다.

‘스칼렛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스칼렛은 줄곧 나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으나 나는 일부러 거리를 뒀다.

목숨이 걸린 사안들을 먼저 해결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그 탓에 혼자서 끙끙 앓으며 쌓여 온 감정이 보통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도 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그만. 이르민술에서 고생하고 있을 클리프도 생각해야지.”

“나는 그게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엘프들과 관계 개선을 해 주고 있는 거잖아. 우리도 적당히 금욕적으로 살아야지.”

“흐음. 그런가?”

변명처럼 써먹긴 했지만.

클리프는 우리를 대표해서 실제로 엘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초월자의 죽음, 그 공백을 최대한 채워 주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들었다.

‘실제로는 시리엘이 가장 큰 이유겠지.’

어쨌든 그 덕분에 문제가 더 커지지는 않았으니까.

클리프가 본인이 원하는 자리에 남았듯이 펠리스도 결사단으로 되돌아갔다.

이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듯이 모든 사람이 각자의 일상으로 귀환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고민이 남는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당연히 지구로 복귀하긴 할 거다.

다만 판게아에서 있었던 일들을 뒤로하고 이대로 가는 게 맞을지.

권력이나 힘에 대한 미련이 남지는 않았으나 사람들과의 인연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허리를 감싼 스칼렛의 양팔을 손으로 꼭 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칼렛, 네가 저번에 줬던 목걸이 말이야.”

“응.”

“그거…….”

슈우우.

내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 차원의 벽을 허물고 누군가가 이쪽으로 넘어왔다.

훼방꾼의 정체는 너구리와 두 관리자.

얘네는 가장 중요할 때 방해하는 텔런트라도 있는 건가.

짜증이 확 올라왔지만, 원래 약속돼 있던 일이니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말은 조금 미뤄 둬야겠네.’

* * *

“근원들은 잘 이동되었습니다. 잘 마무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관리자들이 공간을 넘어온 직후.

너구리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어서 토끼녀와 강아지남도 상관과 함께 예를 갖췄다.

물어볼 말은 많았지만, 나는 가장 의외인 부분을 먼저 물어보았다.

“잘 끝나서 다행이긴 하지. 근데 정말로 나한테 근원을 남겨 둬도 괜찮겠어?”

그동안 나는 대부분의 근원을 차원에 귀속시켰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는 남겨 두었다. 상태창에도 근원의 능력치는 1점이라고 나와 있었다.

이건 내가 말하기도 전에 너구리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대종족 의회에서 얻은 신앙심은 김만득 씨의 소유니까요. 저희는 그것까지 건들 생각은 없습니다.”

“양심은 있네. 나는 당연히 전부 토해 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앞으로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너구리는 재차 허리를 숙였다.

일이 전부 끝난 마당에, 어째서 저런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는지 의문이 들 수는 있다.

그건 다 저놈들이 원하는 바가 있어서였다.

‘관리자가 되는 건 생각도 못 해 봤는데.’

관리자들은 정식으로 나를 영입하고자 했다.

주 업무는 너구리처럼 조사관이 되어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쪽이라고 들었다.

물론, 내가 일을 시작하는 건 김만득의 삶이 모두 끝난 시점.

그밖에도 조건을 최대한 맞춰 주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직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보다, 두 사람의 처분은 어떻게 됐어?”

“예, 김만득 씨께서 부탁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네.”

“사실, 상부를 설득하느라 조금 진을 빼기는 했습니다. 그러니 모쪼록…….”

“당연하지. 우호 점수에 5점 추가해 줄게.”

“네, 감사합니다.”

억지로 나를 납치한 주제에.

겨우 몇 가지 요청을 들어줬다고 생색을 내면 곤란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잡혀 온 두 관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과거에는 토끼녀에게만 목줄이 있었지만, 이제는 강아지도 똑같은 목줄을 차고 있었다.

“자, 말은 다 들었지? 이제 너희는 내 노예……. 아니, 수행원이야.”

“네!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해 주인님을 따르겠습니다!”

내 말에 토끼녀는 간이고 쓸개고 전부 빼 줄 듯한 충성심을 보였다.

반대로 강아지남은 굉장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어째서 저에게 이런 짓을!”

“뭐래, 태도가 많이 불손하다?”

“그게 아니라. 저는 김만득 씨를 도우며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강아지남은 서운함을 토로하며 본인의 공로를 강조했다.

확실히 토끼녀보다 더 성실하게 나에게 도움을 주기는 했지.

“성실함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강아지남은 토끼녀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를 납치했다고 말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눈물겨운 개고생의 역사는 바뀌지 않을 터.

더욱이 나와 상의도 없이 멋대로 토끼녀를 상부에 찔러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일이 잘 풀려서 망정이지, 잘못되었다면 그 책임은 누가 졌겠는가?

‘역시 복수는 완벽하게 끝내야지.’

두 납치범은 공식적으로 내 수행원이 되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건 토끼녀의 증언을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줬기 때문이다.

그녀로서는 혼자서 책임을 뒤집어쓰는 게 엄청 억울했을 테니까.

“혹시 불만이 있다면 털어놔도 좋아. 듣고서 적절히 판단해 줄 테니까. 물론, 내 맘대로.”

“……아닙니다. 저는 이 상황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캬캬캬. 혼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설렜니? 절대 안 되지.”

결국, 강아지남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고개를 숙였다.

토끼녀는 그 모습이 꽤 즐거웠는지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낄낄거렸다.

얘는 머리가 돌아버린 건가, 갑자기 저러니까 좀 무섭네.

‘뭐, 관리자한테는 그리 긴 시간도 아닐 테니, 둘 다 더러워도 버티겠다는 뜻이겠지.’

두 관리자는 판게아에 남아 있는 동안만 내 수행원으로 쓸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내 의견을 보충해서 죄를 정식으로 심판할 예정이었다.

즉, 나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이리라.

너구리는 우리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슬쩍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럼, 이제 지구로 귀환하실 계획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귀환 계획이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데.”

“크게 보면 선택지는 두 가지가 되겠지요.”

너구리가 말하길.

지구에는 원하는 때에 돌아가도 된다고 했다.

지금 당장 가도 되고, 차원이 안정화되는 걸 모두 지켜본 다음에 귀환해도 되고.

이곳과 지구는 시간의 축이 완전히 다르기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건.”

스칼렛의 눈동자를 바라본 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쳐 조금 전에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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