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201화 (201/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201화>

201. 심판의 날 (5)

근원은 모든 걸 포용하는 힘.

혈마력과 함께 운용하면, 나는 불사나 다름없는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다.

세계수는 그 사실을 간과했고 지금 그 대가를 치렀다.

스으으.

바닥에 쓰러진 여인의 몸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세계수의 본체는 나무, 주인의 영향력에서 멀어진 가짜 육체가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저 가짜 몸은 단순한 분신 따위가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서로 별다른 피해가 없어 보였지만, 실상은 세계수가 꽤 뼈 아픈 상처를 입었다.

‘오류로 정신을 긁었으니까.’

가짜 몸에는 세계수의 정신이 연결되어 있었다.

한데 내가 그걸 베어 버렸으니 무언가 타격이 있었을 터.

나는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세계수의 반응을 살폈다.

이 환경은 상대의 근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에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많이 아파?”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허공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던졌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근원의 기류가 갑자기 눈에 띄게 단순해졌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상황을 수습하다가 생긴 실수임이 분명했다.

덕분에 어디로 가야 할지는 잘 알겠네.

‘세계수의 핵이 어디 있는지 몰랐는데, 거목의 상층부였어.’

후웅.

하체에 힘을 최대한 주고 튀어 오르자 거친 바람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동시에 무명의 칼날이 사라졌다. 앞길을 막는 나뭇가지들은 내가 휘두른 무형의 기운에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핵이 움직이고 있어.’

세계수가 정신을 차린 뒤.

그녀는 나를 방해하면서 본인의 핵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다.

순순히 거리를 줄 수는 없는 법.

파직, 검붉은 전류가 온몸을 감싸더니 내 신형이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 검술 5번, [암적뢰]

허공에 곧게 뻗은 암적색 선이 그어졌다.

촘촘하게 구축된 가시 방벽이 온몸을 두들겼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부 견뎌내며 나아갔다.

그렇게 몇 번이고 [암적뢰]를 펼치자.

샤아아아.

밝은 빛을 내는 둥그런 구체가 눈에 맺혔다.

내가 다루는 초월자의 힘과 비슷한 형태, 나는 감각적으로 저게 상대의 목숨줄임을 확신했다.

무명을 앞세워서 다시 돌격하려던 순간. 나무 넝쿨이 재빠르게 자라나며 나와 핵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 이제 살아나갈 생각은 하지 마시길.

뒤이어 좀 전에 쓰러트렸던 녹발의 여인이 죽순처럼 바닥에서 솟아났다.

“막아선다고 뭐가 달라지나.”

세계수가 만들어 낸 가짜 육신은 엘프와 흡사했다.

이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으며, 정령술을 비롯해 엘프의 여러 기술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다만 밖에서는 외형조차 유지할 수 없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제사장의 육신도 이런 식으로 만든 거군.’

아마 유리엘의 경우에는 본인의 입맛에 맞게 몸을 개조한 거겠지만.

나는 정보를 종합하며 그림자 검술의 묘리를 담아 몸을 흔들었다.

주위로 비산하는 환영, 세계수는 내 움직임을 쫓으며 새로운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우우웅.

근처에 생성된 소환진이 빛을 뿜어냈다.

보통 엘프들이 다룰 수 있는 정령은 많아 봐야 서넛이 전부지만, 세계수는 20마리가 넘는 상급 정령을 소환해 냈다.

게다가 밖에서 보았던 최상급 정령들도 속성별로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가라.”

소환자의 명령에 정령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각종 속성의 공격들이 내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쏟아졌고, 나는 유유히 그것들을 회피하며 가짜 육신에 다가갔다.

쉬익, 그러자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황급히 목을 꺾어 피해냈으나 볼을 스치는 감각과 함께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주술 화살.

그중에서도 은신 능력이 깃들어 있는 화살이었다.

실력 좋은 엘프들은 무기에 주술을 걸어 쓰기도 하는데, 세계수는 근원의 힘을 더해서 훨씬 위력적인 형태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연이어 쏟아지는 화살들을 피해 방향을 마구잡이로 꺾으며 상대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이건 좀 위력적이네.’

근원이 가미된 탓에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만약 눈이나 뇌처럼 치명적인 곳에 적중한다면 적에게 시간을 줄 터.

찰나의 실수에서도 승부가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니, 이 부분은 확실히 조심하는 편이 좋으리라.

볼에서 흘러내리는 끈적한 피를 소매로 훔치며 오러와 마기를 끌어 올렸다.

그림자 검술 4번, [그림자 난무]

촤촤촥!

적의 공격이 성가시다면 기회를 주지 않으면 된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검강에 세계수는 급하게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물러서다니.

‘푸르카스보다 한 수 아래잖아?’

이전에 싸웠던 초월자 후보보다도 전투 감각이 떨어진다.

만약 내가 세계수였다면 쉽게 공격의 주도권을 내주지 않았을 테니까.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버티며 상대의 약점을 찾기 위해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저 녹발의 여인은 적에게 등을 보이며 내뺐다.

‘절대로 안 놓치지.’

파직.

검붉은 전류가 튀며 내 몸이 세계수의 근처로 이동되었다.

이미 정령들의 공격은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하는 상태.

여기에서 세계수는 나와 일대일로 맞붙는다는 최악의 수를 두고 말았다.

“크윽, 순순히 당하고만 있을 것 같나요?”

세계수가 팔을 뻗고 손바닥을 펼치자.

나무 넝쿨이 튀어나와 꿈틀거리며 크기를 키우더니 뾰족한 창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과연 근접전은 얼마나 조예가 깊으실지. 나는 정면으로 달려들며 무명을 힘차게 휘둘렀다.

챙, 채채챙!

과연 초월자는 아무나 될 수 없는 걸까.

세계수가 다루는 넝쿨 창은 빠르고 묵직했다. 하물며 나와 견주어도 속도가 크게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게 전부 근원의 지원 덕분이라는 것.

창을 뻗을 때 발의 위치나 몸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더욱이 공격의 방향은 너무나 정직했다.

스르르.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실력.

나는 보법을 밟아 창을 흘려보내며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

빠르게 세계수의 등 뒤로 돌아가자, 자연스럽게 나와 정령들 사이에 세계수가 놓였다.

이로써 방해꾼은 완전히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

[잔상 꿰뚫기], [환영 활보], [달빛 베기]

그림자 검술의 기술들이 폭발하듯 튀어 나왔다.

세계수는 간신히 칼날을 쳐 내며 뒷걸음질 쳤다.

창의 사정거리 안쪽으로 파고든 나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그 뻔한 노림수에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제아무리 초월자라지만 속도로는 나를 못 이기지.’

그림자 검술은 속도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어떤 상대라도 나보다 빠를 순 없으며, 만약 이 진리가 깨지는 날에는 내 목숨이 끝난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 아니었다.

촤악!

무명의 칼날이 도망치던 세계수의 왼팔을 날렸다.

곧바로 오른쪽 팔과 다리도 한꺼번에 허공을 날았다.

세계수는 근원을 이용해서 서둘러 공백을 메우려 했지만, 그보다 내 오류가 한발 앞서서 모든 기류를 차단했다.

“애당초 창을 들고 설치질 말았어야지.”

세계수는 이미 정신에 타격을 받았다.

그런데 새롭게 만들어 낸 가짜 육신을 또 잃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미 사지가 대부분 잘려 나간 녹발의 여인은 굳은 얼굴로 말을 씹어 뱉었다.

“그럼, 다 같이 죽는 수밖에요.”

서걱.

미래를 엿보고 분노를 표출하던 세계수의 머리가 잘 려나갔다.

뭐, 여기서 대화와 화합의 장을 만들 것도 아니니.

어차피 상대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별로 없다. 역시나 세계수는 곧바로 자신의 대답을 내놓았다.

드드드드!

공간이 뿌리 째 진동하며 하늘 높이 뻗은 거목이 마구 흔들렸다.

희생 강화, 그리 이름 붙였던 세계수의 비장의 카드가 사용되는 참이었다.

이쯤 되면 서둘러 움직이는 자가 승리할 터.

나는 재빨리 감각을 넓혀 세계수의 핵을 찾아냈다.

‘엘프의 신임을 더 잃더라도 일단 살아남아 보겠다는 건가.’

핵으로 향하는 길은 더욱 험난해 보였다.

제아무리 혈마력과 근원을 사용한다고 해도, 강화된 세계수의 근원은 회복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내 몸을 찢어발길 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파앙!

공기를 걷어차자 파공성이 크게 울렸다.

이어서 [암적뢰]를 연달아 펼치며 오로지 돌파에만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다.

목숨을 내놓은 질주, 재정비를 마친 세계수는 본격적으로 강화된 근원을 불러일으켰다.

곧이어 강화에 강화를 거듭한 각종 위협이 육신을 마구 두들겼다.

촤악, 촤아악.

신체가 부러지고 찢어지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세계수가 시공간을 마음대로 조작해서 혼란을 주는 한편, 온갖 방향에서 공격을 쏟아 냈기에 몸이 버텨 내질 못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이까짓 고통은 충분히 인내할 수 있었다.

‘점점 거리가 줄어들고 있어.’

세계수의 핵은 계속 도망갔지만.

그때마다 나는 오류를 휘둘러 경로를 만들면서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사지가 잘려나가고 창자가 짓이겨져도 나의 시선은 변함없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쫓고 쫓겼을까.

샤아아아.

나무 넝쿨에 감겨서 보호되던 새하얀 구체.

그것이 뿜어내는 광명은 엉망이 된 내 눈동자를 휘감았다.

나는 사력을 다해서 태양처럼 밝게 타오르는 물체를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 아, 안 돼! 안 돼!

“안 되긴? 졌으면 순순히 뒤지기나 해!”

- 아아아악!

비명과 환희.

세상이 멸망한 듯한 어지러운 공간 안에서 나와 세계수의 목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 * *

황량하게 변해버린 이르민술의 중심.

조금 전까지 격렬한 전투가 펼쳐졌던 공간에는 두 인물만이 남았다.

하나는 만신창이가 된 나였고, 다른 하나는 싸움에 휘말려 수백 번의 죽음을 경험한 토끼녀였다.

“와!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아니, 많이 죽은 건가? 아무튼. 진짜 살면서 이렇게 떨렸던 건 처음이에요.”

토끼녀는 말을 토해 내듯 입을 나불거렸다.

그에 반해서 나는 시체처럼 바닥에 누워서 푸른 하늘을 눈에 담았다.

감각을 넓혀서 살펴보니, 스칼렛 쪽의 전투도 끝났기에 이제는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좀 조용히 해 봐. 하늘 구경 좀 하게.”

“예?”

“일도 다 끝났으니까. 조금만 쉬자고.”

“아, 넵. 저도 좀 쉬어야겠어요. 아고고.”

토끼녀는 조용히 내 옆에 누웠다.

굳이 같이 누울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나는 뭐라고 하려다가 포기하고 토끼녀와 한동안 가만히 하늘을 응시했다.

그렇게 편안히 몸을 눕히고 있으니 순간 궁금증이 일어났다.

“참! 너는 혼자서 억울하지도 않냐?”

“예?”

“강아지남만 혼자 쏙 빠져나간 게 안 억울하냐고. 들어보니까, 너를 세계수랑 협력한 혐의로 찔렀다며.”

“그게 제가 유죄가 된 가장 큰 이유긴 했죠. 음, 그런데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그거야 그렇겠지.

토끼녀는 내 말 속에서 무언가를 눈치채더니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주제는 어떻게 하면 물귀신 작전으로 강아지남을 끌고 내려갈 수 있을까였다.

아무튼, 우리의 이야기가 끝나가던 무렵. 이르민술의 중심부로 다가오는 일련의 무리가 느껴졌다.

스칼렛과 클리프, 그리고 펠리스.

그 3명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거기에 엘프들의 기운도 함께 감지되었다.

나란히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이미 저들도 싸움의 승리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된 모양이었다.

“루카!”

“그래. 여기 있어.”

“루카, 루카! 루우카!”

“스칼렛, 목 놓아서 외치지 말아 줄래? 내가 죽어 가고 있는 것 같잖아.”

실제로 몇 차례 죽은 것과 다르지 않지만 말이다.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달려온 스칼렛, 그 뒤로 클리프와 펠리스가 속속 도착했다.

“정말로 해냈구나. 장하다.”

“그 커다란 나무가 자취도 없이 사라졌네. 근데 초월자의 힘은 전부 흡수했어?”

나는 두 사람을 향해 웃어 주며 상태창을 살폈다.

근원의 점수는 이제 17점, 세계수가 가진 모든 초월자의 힘을 흡수한 결과였다.

“당연하지. 그보다 뒤에 따라온 엘프들은…….”

지위고하를 따질 것도 없이.

중심부에 도착한 엘프들은 모두 망연자실한 얼굴로 황폐해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놈들과도 끝을 맺어야겠지. 나는 세 사람과 잠시 떨어져서 타리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경계의 날을 살짝 세우며 말했다.

“……저희를 조롱하시려고 오신 겁니까?”

“아니, 이 말을 명심해 두라고. 과거에 세계수가 벌인 일 때문에 모든 초월자가 죽었다는 걸 잊지 마.”

“무슨 말을 하시고 싶은 건가요.”

“잘못하면 너희까지 책임을 질 수도 있었어. 이렇게 조용히 해결된 게 너희에게 좋은 일이라는 뜻이야.”

세계수는 판게아의 질서를 흔들었다.

만약 이 사실이 널리 퍼져 다른 세력의 구성원들이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겠는가?

내 말을 이해한 타리엘과 원로 엘프들은 여러 논의를 거치고서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혹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저희에게도 초월자가 나타날까요?”

“물론이지. 이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야.”

나의 말에 엘프들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결론적으로, 정예 엘프들 사이에서는 더 싸우겠다는 의견이 나오지 않았다.

목숨을 걸 이유와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이제 내게 남겨진 일도 거의 마무리 되었나.’

손에 쥔 근원.

다른 초월자들의 힘을 털어 내면 판게아에서의 내 역할은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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