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200화>
200. 심판의 날 (4)
“루카, 이대로는 끝도 없겠어!”
스칼렛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불덩이를 분해하며 외쳤다.
맞는 말이다. 내가 느끼기에도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답이 없음이 느껴졌으니까.
최상위 정령들의 움직임은 하나하나가 재앙이었다.
자연에 녹아들어 환경 자체를 뒤바꿔 버리는 탓에 자연재해에 당하는 것 같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서둘러 결단을 내려야겠지.
‘돌파가 답이기는 한데, 4명 전부는 힘들어 보인단 말야.’
세계수는 꽤 정교하게 함정을 파 놓았다.
우선 내 근원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를 정확히 산출한 다음.
대응할 수 없는 먼 곳에서부터 차츰 포위망을 조직한 것이다.
“안 되겠어. 루카, 여기는 우리에게 맡겨.”
고민이 길게 이어지던 무렵.
등 뒤에서 스칼렛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무명을 휘두르며 슬쩍 고개를 돌리자, 클리프와 펠리스도 결의를 다진 모습이었다.
확실히 혼자라면 이 포위망을 뚫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괜찮겠어?”
내 물음에 스칼렛은 옅은 미소를 짓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엉겁결에 물건을 낚아채고 확인하니, 아주 낯이 익은 백색의 물체가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록펠스의 가보. 그녀가 목숨처럼 지니고 다니던 소중한 목걸이를 던진 것이었다.
“그걸 루카가 가지고 있으면 왠지 괜찮을 것 같아.”
갑자기 이러면 곤란한데.
뭐가 어쨌든 책임감이 샘솟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나보고는 엄청 뭐라고 하더니만!”
분노에 찬 클리프의 목소리를 추진체 삼고.
나는 마지막으로 묵묵히 사복검을 휘두르는 펠리스를 확인하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빨리 세계수를 처단할수록 이들이 생존율도 높아지겠지.
그림자 검술 2번, [환영 활보]
환영이 공간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분신들은 강화된 엘프들의 감각을 성공리에 차단해 버렸다.
세계수와 근원을 가지고 대결하면 당연히 내가 불리할 터.
이런 식으로 다른 기술과 융합하여 쓰는 편이 지금 상황에서는 훨씬 유리했다.
상대가 대응법을 찾기 전에 나는 연달아 다음 기술을 펼쳤다.
그림자 검술 5번, [암적뢰]
파지직.
검붉은 전류가 튀며 내 신형이 일순간 사라졌다.
거의 순간 이동에 맞먹는 속도. 단숨에 몇 겹의 포위망을 지나치니 경악으로 물든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저게 사람이라고?”
“어떻게 저렇게 간단히…….”
“당장 요격하라! 저자를 주신께 보내면 안 된다!”
아래에서는 수많은 극찬의 말이 튀어나왔다.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구성한 것들이 단번에 무효로 되돌아갔으니 어련할까.
그와 동시에 후방에서 대기하던 무녀들은 거대한 벽을 만들어 엘프들과 나를 가뒀다.
‘저것들이 여러모로 귀찮게 군단 말이야.’
넓은 지역을 가둬 버린 투명한 보호벽.
겉보기에는 상당히 얇아 보였지만, 실상은 어떠한 공격도 막아 낼 만큼 견고했다.
심지어 마계에서 보았던 푸르카스의 성벽처럼 엄청난 재생력까지 갖췄다.
오류로 베어 버리더라도 금세 복구해 버리리라.
‘술사들도 전부 외부에 있고.’
세계수가 은근히 머리를 썼네.
나는 밖에서 보호벽을 유지하는 무녀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류는 무엇이든 없애 버리지만, 그 자리를 빠르게 메워 버린다면 답이 없다.
더욱이 직접 근원지를 타격할 수 없으니 구조적으로 오류를 봉인해 버린 것과 같았다.
“그럼, 다른 방식을 써야지.”
후우웅.
무명을 중심으로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세상을 모조리 빨아들이려는 듯, 흑색의 칼날은 무서운 기세의 와류를 만들어 냈다.
그림자 검술 7번, [개기일식]
무명을 감싼 밝은 빛무리.
거기에 근원의 지원이 들어가자 칼날이 연장되며 거대한 검처럼 변했다.
원래 이 기술은 방어용이다. 하지만 방패로 맞아도 아픈 건 똑같지 않은가.
엄청난 재생력을 가진 보호벽과 무한으로 빨아들이는 칼날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 무식하군요.
세계수는 길게 연장된 칼날을 보고서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원래 사람은 겁먹었을 때 말이 많아지는 법.
그런 의미에서 상대의 언행은 격려의 메시지와 다르지 않았다.
- 잠만 말고 지켜보기나 해.
보호벽에 다가가는 건 쉬웠다.
그림자 검술의 묘리를 담아 걸음을 내디디니, 어떠한 공격도 내 움직임을 방해하지 못했다.
이어서 붉은 칼자루를 휘둘러 칼날을 보호벽의 한 면과 격돌시켰다.
드드드드.
드라이아이스를 뜨거운 판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극상성의 특성을 가진 두 물체가 맞닿자 격렬한 진동이 일어났다.
한쪽은 재생을 반복했으며, 다른 하나는 맞닿은 모든 기운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찢어진다.’
머지않아 승리자는 정해졌다.
제아무리 수많은 무녀의 힘이 응집되었다고 한들.
절대자를 넘어서 초월자의 경지를 바라보는 내 기술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니까.
그건 세계수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쩌저적!
결국.
거대한 균열이 생긴 보호벽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부서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세계수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왔다.
* * *
이르민술의 중심.
세계수의 뿌리가 내린 곳까지는 어떠한 방해도 없었다.
많은 엘프가 변절자와 대치하는 중이었고, 나머지는 스칼렛과 클리프, 그리고 펠리스를 상대하고 있었으니.
나는 여유롭게 세계수 본체를 앞에 두고 지면에 착지했다.
“와,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등에 매달린 토끼녀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거의 탈진한 상태로 간신히 등에 붙어 있었다.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격렬하게 뛰어다녔으니, 아마도 안전바 없이 일어서서 바이킹을 탄 느낌이리라.
“진짜로 죽으러 가는데. 이건 안 떨려?”
“그런 무서운 이야기는 안 하셔도 돼요. 무엇보다 세계수에게 잡힐 바에야 그냥 죽는 게 낫다고요.”
“하긴 너희 사이만 보면 뒷일이 좀 무섭긴 하네.”
몇 분을 더 움직인 뒤.
우리는 나무 넝쿨로 이루어진 어느 장벽에 도달했다.
세계수의 본체를 보호하는 마지막 수단.
근원으로 강화되어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절대 부술 수 없고, 오류를 이용해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게 분명했다.
이런 경우에는 스스로 문을 열게 만들어야지.
“문 열어. 싸움보다는 대화로 해결하는 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길이잖아?”
“에이, 세계수가 설마 스스로 나오겠어요? 원래 식물은 겁이 많아서 무조건 숨는 다고요.”
어떻게 내 마음을 잘 파악했는지.
토끼녀도 비열한 미소를 만개하며 세계수를 몰아붙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나무 넝쿨이 길을 터주며 중심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 안으로 들어오셔서 느긋하게 이야기라도 나누시죠.
그냥 찔러본 건데, 얘도 정신머리가 가출해 버린 건가.
나는 태연한 척 발을 들이밀면서 감각을 넓혀 상대의 행동을 주시했다.
뭐, 당연히 무슨 수가 있으니 나를 끌어들이려는 거겠지.
하늘 높이 뻗은 거목.
그 앞에는 녹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여인이 서 있었다.
중성적인 외형을 지닌 여인은 우리가 지나왔던 길을 다시 가로막고서 입을 열었다.
“이런 모습으로 만나는 건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예전에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이네.”
“그때만 해도 모든 게 괜찮았죠. 이렇게 된 게 아쉬울 따름이에요.”
“뭐가 아쉽다는 건데?”
“모든 게요. 우리끼리 싸울 필요는 전혀 없었으니까요.”
세계수와 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토끼녀는 피식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우 같은 년. 조금 전에는 죽으라고 저주를 걸더니. 지금은 좀 겁나나 보지?”
“선물로 가져오신 짐승이 말이 좀 험하네요.”
역시 이 둘은 붙여 놓으면 안 되나.
전 관리자와 체포를 앞둔 초월자는 재회하기 무섭게 다시 말싸움을 벌였다.
토끼녀의 말대로, 세계수가 갑자기 낮은 자세로 나오는 건 신경 쓰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관리자들의 의견대로, 싸우는 것 자체가 싫은 걸지도 모르지. 다른 속셈이 있을 수도 있고.’
뭔 개소리인가 싶지만.
너구리와 강아지남은 세계수의 전투 능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애당초 저 초월자의 시작은 작은 나무, 여태껏 직접 전투를 치른 경험 자체가 적었다.
실제로 배신과 기습이 아니었다면 다른 초월자들이 쉽게 당할 일도 없었다.
‘엘프들을 희생시켜 위력을 극대화하는 것만 주의하면 될 거고.’
마계에서 세계수가 근원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능력.
그녀가 열심히 숨겨왔던 일명 ‘희생 강화’만 잘 대처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게 관리자와 회의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다 됐고. 건설적인 이야기 좀 해 보자. 너희들은 어떻게 맨날 싸우기만 하냐?”
티격태격하는 관리자와 초월자.
그 둘은 내 말에 쌍욕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세계수는 싱긋 웃으며 다시 이전과 비슷한 제안을 내놓았다.
“저와 함께하신다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드릴게요.”
“너무 케케묵은 소리인 것 같은데. 네 목숨을 달라고 해도 그럴 거야?”
“극단적인 것만 빼면요.”
안타깝지만 내가 원하는 건 세계수가 들어줄 수 없다.
세상을 반으로 나눠서 가지자는 건 딱히 내 소원이 아니니까.
당장 떠올려 본다면 휴식이 조금 필요하다.
만약 세계수와 힘을 합친다면 휴식 같은 건 영영 손에 얻지 못할 터였다.
“예를 들면?”
“어디 보자. 루카 님께서 마음에 드실 만한 게.”
세계수는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그래 보였다. 그렇게 몇 초나 흘렀을까.
녹색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듯이 휘익 하고 움직였다.
“이게 네 제안이냐?”
이곳은 세계수의 뜻대로 통제되는 세상.
그런 곳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면 그게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나는 이상한 낌새가 보이자마자 곧바로 움직였다.
무명의 칼날이 현란하게 움직여 세계수의 목을 노리려는 순간.
“안타깝네요. 제 준비성이 더 뛰어났으니까요.”
무명의 칼날이 닿기 직전.
세계수의 몸이 분해되며 민들레 씨처럼 흩날렸다.
그러면서 고요하기만 하던 장소에 근원으로 이루어진 폭풍이 불었다.
마치 수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래가 입을 쩍 벌리는 것처럼.
촤아악.
폭풍에 속해있던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팔뚝을 베며 지나갔다.
고도로 압축된 근원은 진화한 무명의 오류로도 없애지 못할 만큼 견고했다.
뒤이어 허벅지와 복부,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신체가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다.
“우왁! 나 죽어!”
토끼녀는 연거푸 단말마를 내지르며 죽어 갔다.
당연히 나도 멀쩡할 수는 없었다. 세계수가 준비해 둔 근원 폭풍은 철저하게 내 몸을 난자해 버렸다.
쿨럭.
입안에서 비릿한 혈향이 진동했다.
두 무릎은 힘이 풀리며 자연스럽게 꿇려졌고, 무명을 쥔 손도 부들부들 떨리며 칼자루가 빠져나오려 했다.
이전에 세계수의 기습에 당해 사라진 초월자들과 비슷한 모양새일 것이다.
“당신이 무턱대고 제 초대에 응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자신감? 아니면 오만?”
세계수는 안전한 상황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엘프의 초월자는 손을 내밀며 근원을 취하려 했다.
“어쨌든 인간의 몸으로 여기까지 온 건 칭찬 받아 마땅한…….”
촤악.
자신만만하게 뻗은 손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피가 뿜어지지는 않았지만, 세계수는 깨끗하게 잘린 절단면을 보고서 황급히 몸을 뺐다.
늦었다. 이미 베었으니까.
“커헉!”
우측 어깨부터 좌측 골반까지.
깔끔하게 잘려나간 세계수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혈마력에 근원을 더해서 깔끔히 치료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렴, 내가 무턱대고 여기로 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