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98화>
198. 심판의 날 (2)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우리와 합류하는 엘프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분명 암흑대륙을 떠났을 적에는 천 명 정도의 규모였는데, 지금은 6천 명에 달하는 인원이 내 뒤를 따라왔다.
“이제 곧 평의회 연방의 해역입니다.”
엘프들을 이끌고 있던 타리엘은 넌지시 말을 던졌다.
과연 세계수와 정보를 공유하던 원로답게, 그녀는 현재 평의회 연방과 나와의 관계를 어렴풋이 아는 듯 보였다.
물론, 그 이상의 정보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아직 연방군 측에서 별다른 조치는 없어.’
평의회 연방은 강력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다.
과거에 부에르의 침략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그래도 판게아에서는 최강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런데 해역 근처까지 다가갔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건 무슨 의미일까.
“보통 이르민술까지 어떤 방식으로 가십니까?”
나는 시선을 살짝 돌리며 타리엘에게 평소에 사용하는 길을 물었다.
타리엘은 잠시 고민하더니 두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크게는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역 연합과 평의회 연방 사이의 해협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역시 그렇군요. 근데 해협은 통과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과거에 라그나를 이끌고 건넜던 남부 해협.
그곳은 배를 타고 가기에는 조금 어려운 곳이었다.
여러 조류가 마구 뒤섞여서 함선이 나아가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맞습니다. 두 세력의 국경이기도 하고. 조류가 불안정해서 잘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뭡니까.”
“평의회 연방의 항구에 함선을 맡긴 다음, 육상으로 이동하는 방법입니다.”
보통 육상보다 해상으로 이동하는 게 빠르지만.
평의회 연방에는 무역 연합처럼 기찻길이 놓여 있어서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다.
다만 6천 명에 이르는 대인원이 움직이는 걸 연방에서 용인하느냐가 문제였다.
‘결국, 미하일과는 한번 만나야 하는 건가.’
어차피 남부 해협을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연방군이 우리를 막아설 방법은 많다.
그렇다면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을 터.
나는 타리엘에게 가장 가까운 항구로 함대를 이끌도록 지시했다.
한참 동안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자.
수평선 너머.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에서 조금씩 다른 색이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등대와 항구를 지닌 도시가 눈에 보일 무렵, 엘프 선원들은 입항 요청을 하며 항구로 천천히 배를 댔다.
“여기는 크토스보라고 합니다. 연방의 남부에서는 가장 큰 항구 도시이기도 하죠.”
크토스보 시.
여기라면 나도 잘 아는 곳이었다.
부에르가 처음 침략을 개시했던 장소였으니까.
“지금 우리는 어떤 신분으로 여기에 정박한 겁니까?”
“대동맹 조약을 맺은 이후부터, 모든 동맹국은 자유롭게 다른 나라의 항구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런 상관도 없겠군요.”
“공식적으로는 그렇긴 합니다만.”
포구에 함선을 정박하던 타리엘은 한쪽을 가리켰다.
군복을 입은 남자들, 상당히 높은 계급의 장교가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아뇨, 저도 처음 겪는 일입니다. 연방군에서 직접 마중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뭔가 일이 일어난 건 확실하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군인들에게서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나는 배에서 뛰어내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군인들과 마주 섰다.
“대종족 의회의 의장 루카라고 합니다.”
우선 반응을 보자.
상대의 의도는 싸움이 아니었다.
그러니 신원을 숨기거나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장교의 반응은 조금 미묘했다.
아무리 암흑대륙에서 깽판을 쳤다지만, 그게 연방군이 나설 이유는 안 될 텐데.
“그 말은 일부러 저를 기다렸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미하일 동지께서 대화를 원하고 계십니다.”
“아, 그랬군요. 통신구를 이용하자는 말은 아닐 테고 직접 만나길 원하시나 보군요.”
“맞습니다. 열차를 준비해 두었으니, 뒤에 계신 엘프분들도 같이 움직이실 수 있을 겁니다.”
연방군의 장교는 손바닥으로 10여 척이 넘는 함선을 가리켰다.
6천에 달하는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일 수단이 마련되어 있다?
이건 무조건 우리의 움직임을 예상해서 미리 준비했다는 이야기일 터.
‘딱 봐도 세계수가 연방을 구슬린 것 같긴 한데.’
뭐, 덫에 걸려도 탈출할 방법은 많다.
애당초 판게아에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함정 속에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
상대의 태도가 의심쩍기는 했으나, 나는 미하일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적이든, 아군이든.
직접 가서 만나 봐야 정확히 의중을 파악할 수 있다.
더욱이 극약처방이라고 할지라도 미하일을 설득할 방법도 생각났으니.
* * *
‘여기는 이제야 좀 사람 사는 느낌이 드네.’
쭉 뻗은 선로를 달리는 기차.
나는 군용 열차의 VIP 칸에서 한가롭게 풍경을 바라보았다.
전쟁의 참화를 한 꺼풀 벗겨 낸 공간이 제법 빠른 속도로 내 눈동자를 스쳐 지나갔다.
평의회 연방은 기습적인 공격에 거의 모든 국토를 유린당했다.
더욱이 그 피해를 온전히 복구하기도 전에 마계와의 전쟁을 벌여야 했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이상한 거지.’
이번 전쟁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세력은 어디일지 짐작하기 힘들다.
하지만 피해가 가장 큰 곳은 고민해 볼 가치도 없이 평의회 연방일 터.
이제야 막 국토를 복구하고 있는데 분쟁을 원할 리가 있을까.
“이상해. 기차가 점점 속도를 줄이는 거 같아.”
옆에 앉아있던 스칼렛은 차창 밖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감각에 걸리는 것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답을 내주었다.
“속도를 줄이고 있는 거 맞아. 여기가 대화의 장소가 될 건가 봐.”
기차는 허허벌판에서 속도를 줄였다.
이유야 뻔하다. 여기서 결론을 짓겠다는 뜻이겠지
크토스보 시에서 하루하고도 반나절.
우리와 엘프들은 기차 3대에 나눠 타서 지금까지 쭉 달려온 참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가 너무 조용했어.’
평의회 연방은 우리를 영토 깊숙이 끌어들였다.
함정일 확률이 매우 높았지만, 적대적인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가 있나.
미하일은 우선 협상을 원하는 게 틀림없었다.
“밖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아주 많아.”
클리프는 [초감각]으로 사람들의 존재감을 감지하며 일어섰다.
전투보다는 대화가 우선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일단 대검은 뽑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경계심은 가져야지. 나는 세 사람에게 적들의 규모와 구성을 알려 주었다.
“연방군은 4만이고, 엘프가 5천이야.”
“전투를 위해 데려왔다기에는 숫자가 좀 적구나.”
펠리스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흘리듯 말을 뱉어냈다.
과한 자신감처럼 비칠 수도 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의 실력이라면 적의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스칼렛, 너는 [공간 이동]으로 도망칠 루트를 미리 알아봐 줘.”
“응. 알겠어.”
“클리프와 단주님은 우선 편안히 계세요. 괜히 적의를 보여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그리하마.”
“그래.”
우리는 서로의 역할을 인지하고 열차에서 내렸다.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광활한 땅.
기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느끼며 지면에 발을 내딛자, 중무장한 연방군의 병사들이 보내는 눈빛이 몸을 쿡쿡 찔렀다.
우리의 등장으로 한창 분위기가 고조될 찰나.
“안내해 주시죠. 여러분들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분명 싸움부터 벌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내가 순순히 그들의 말에 따르겠다고 하자 연방군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대응도 없었다.
마치 너무 쉽게 꼬리를 내려서 더욱 의심스럽다는 느낌.
그렇게 병사들과 대치하며 조금 기다리니 악마와 맞먹는 기운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쿠웅!
맞춤 생산된 기동 갑주.
공중에 높이 떠올랐던 붉은빛의 쇳덩어리가 우리 앞에 떨어졌다.
아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오셨네.
나는 기계 안에 탑승한 미하일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그렇군. 마계에서는 별일 없었나?”
“덕분에요. 그보다 새로운 친구가 많이 생기신 모양이군요.”
기동 갑주를 탄 미하일을 따라서 원로로 보이는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걸 보니 이 일의 설계자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그래도 일단 무턱대고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이니.
“설마 저를 환영하시기 위해 여기에 모이신 건 아닐 테고.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내가 듣기로는 자네가 전대 위원장님을 암살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흐읍.
칼로 잘라 낸 듯한 대답이 튀어나오자 여기저기서 숨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이만하면 끝은 정해진 셈. 이제 각자 무기를 뽑고 혈액으로 호수가 만들어져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주 태연하게 미하일을 응시했다.
“자네가 그리 당당한 이유가 뭔지. 자세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군.”
상대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으니까.
과거부터 현재까지. 미하일은 항상 분노에 휘둘리는 법이 없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뒹군 사람치고는 호전적인 성향이 덜한 편이다.
“대화로 오해를 풀기에는 조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는 동의하네만. 그래서, 싸우기라도 하자는 건가?”
“아뇨, 저의 기억을 공유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제 친구인 스칼렛이 도와줄 겁니다.”
이 일의 실체를 알려 주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해 낸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만약 이오시프를 죽인 이유와 세계수의 야심을 알게 된다면 충분히 설득될 터였다.
이런 아름다운 화합이 이뤄지려는 순간.
“잠시만! 이건 함정입니다!”
불만을 가득 품은 듯한 원로 엘프가 꽥 소리를 질렀다.
확실히 이쪽에서는 미하일이 대립각을 세워 주길 바랄 터.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원로 엘프의 언행을 비꼬았다.
“세계수께서는 평화보다는 분쟁을 원하시나 봅니다.”
“말조심하시오! 수천 명이 넘는 엘프를 납치한 주제에 뻔뻔하군!”
곧 당신도 똑같이 될 텐데 뭘.
어차피 결정권은 이 엘프에게 없다. 세계수가 어떤 수작질을 해도 변하지 않을 터.
때마침 미하일은 기동 갑주의 보호 장치를 풀고 밖으로 나왔다.
“다들 진정하시고. 루카, 내가 자네의 말을 믿을 수 있도록 설명하게.”
“저는 대화를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만하면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자네와 맞섰던 엘프들이 모두 자네를 따른다고 들었네. 환각이나 주술이 아님을 어떻게 증명하겠나?”
“오류가 좀 있습니다. 우선 저들은 저를 따르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진실을 듣기 위해 본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죠.”
미하일은 내 말을 듣고서 기차에 타고 있던 엘프들의 안면을 살폈다.
그들은 무언가 공허한 눈빛을 주변에 뿌리고 있었다.
세뇌되었다기에는 너무나 멀쩡했고, 제정신이라기에는 태엽이 뽑힌 인형과도 같은 느낌.
시선을 다시 나에게 돌린 미하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솔직히 말해서 이르민술의 요청을 받았을 때만 해도 쉬운 일일 줄 알았네.”
“그렇습니까.”
“중재자로서, 납치된 엘프들을 인도받고 자네를 돌려보낼 생각이었지.”
“지극히 현실적인 대응이군요.”
“내 생각에는 오판이었던 것 같군. 예상보다도 일이 더 복잡해.”
현재의 평의회 연방은 이런 사건에 휘둘릴 여력이 없다.
그걸 가장 잘 알았던 미하일은 나름의 해결책을 떠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힘이 부족하다면 뜻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는 법.
미하일은 반드시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면 제가 결정을 더 손쉽게 내릴 수 있도록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말하게.”
“평의회 연방을 구한 건 누구였습니까?”
“음.”
“그리고 이 상황에서 연방을 압박해 군사를 일으킨 세력이 어디입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군.”
나는 여태껏 연방에 손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이오시프를 암살한 거? 그놈의 똥고집이 국가를 파멸로 몰고 가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오히려 나의 행동이 위기에 빠진 연방을 구하지 않았는가.
“그 진실이라는 거. 나에게도 보여 주게.”
“안 됩니다! 지금 이 자의 농간에 놀아나는…….”
“언제부터 이르민술에서 우리의 선택에 간섭했었습니까?”
“그, 그게.”
세계수가 부들거리는 게 여기까지 느껴지네.
엘프들을 둘러싼 근원의 기류가 짜증을 내는 것처럼 마구 꿈틀거렸다.
그러면 뭐 어떻게 하겠나. 여기서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도 못할 텐데.
나는 스칼렛을 통해 미하일에게 정보를 전송하며 생각했다.
‘이제 코앞이야.’
이르민술이 있는 한자 동맹까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