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96화 (196/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96화>

196. 미끼 (4)

인적이 드문 허름한 건물.

이 장소는 원래 결사단의 임시 기지였다.

주변이 유독 한적했던 건 주술진을 펼쳐 외부인이 다가오지 않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즉, 어떤 일이 일어나도 밖에서 지원군이 올 수 없다는 뜻이리라.

“근원은 내가 벗겨 낼게.”

곡도의 칼날이 사라졌다.

칼자루만 남은 무명은 엘프들을 향해 거침없이 움직였다.

쉬익, 칼자루가 허공을 베며 지나가자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엘프들에게서 무언가가 잘려 나갔다.

근원의 줄기.

세계수가 엘프들을 통제하던 구속이 풀린 것이다.

뒤이어 스칼렛은 30명쯤 되는 엘프에게 [정신 지배]를 걸었다.

순식간에 의지를 빼앗긴 사절단, 그들은 스칼렛에게 순순히 신체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전보다 텔런트의 숙련도가 월등히 높아졌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클리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리엘 씨는 네 손으로 옮겨 줘.”

“그래.”

클리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정신이 빼앗긴 시리엘을 안아 들었다.

나머지 엘프들은 스칼렛의 [염동]을 써서 옮겨 주었다.

이로써 첫 단추는 잘 끼워진 셈.

나는 숨을 몰아쉬며 수송 마차에 갇혀있는 토끼녀에게 걸어갔다.

“정말 무시무시하시네요. 앞에서는 함께 웃다가 전부.”

“뒷말은 끝까지 하지? 갑자기 말을 끊으니까 다 죽여 버린 것 같잖아.”

“흠흠. 어쨌든 이제 저는 풀어 주세요.”

“절대 안 되지. 이제부터 시작인데.”

토끼녀는 세계수가 바라고 있는 미끼.

얘를 데리고 다녀야 계속 어그로를 끌 수가 있다.

끊임없이 상대를 흔들며 실수를 노린다. 이건 강한 상대와 싸울 때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일단 마차에서 나와. 수갑은 계속 차고 있고.”

“칫, 어차피 저는 아무것도 못 하거든요?”

“믿을 테니까, 순순히 밖으로 나오기나 해.”

토끼녀는 멍청해도 바보는 아니다.

불사의 몸을 가진 관리자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아무리 고통을 줘도 죽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쓸데없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험한 꼴을 당할 터.

마차 밖으로 나온 토끼녀를 데리고, 나는 스칼렛과 클리프가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때? 일은 잘돼 가?”

“루카가 말했던 건 진즉에 다 끝냈어.”

“빠르네.”

스칼렛은 누워 있는 엘프들을 돌보고 있었다.

사절단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머릿속에 하나씩 팩트 주사를 놓아준 상태였다.

팩트 주사란, 바로 그들의 초월자에 관한 뼈 아픈 진실이었다.

“스칼렛, 기억을 심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

“음, 한 3초 정도면 충분해.”

“3초? 옛날에는 몇 시간씩 걸렸잖아.”

“후후,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이야기지. 무엇보다 전달할 기억의 양이 엄청 적기도 하고.”

스칼렛이 말하길.

옛날에는 10년 치 이상의 기억을 통째로 옮기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했다.

반면에 지금은 기억의 양이 약 3시간 분량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때 비해서 실력도 좋아졌으니.

“그럼, 정신을 지배하고 기억을 주입하는 게 5초에서 7초면 되는 거네.”

“응! 그리고 한 번에 최대 50명까지 가능해.”

“음, 넉넉잡아 7초에 50명이면. 1분에는 대략 400명이 조금 넘고. 10분이면 4000명.”

10분에 4000명.

물론, 실제로는 그만한 효율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10분에 2000명이라도 근원을 끊고 세계수의 진실을 심어 넣을 수 있다면?

다른 건 몰라도 세계수의 힘은 확실히 약해지겠지.

‘일단 그렇게만 되어도 다행이긴 하지.’

시작은 사절단.

그다음은 암흑대륙에 있는 엘프들이다.

최고로 이상적인 상황은 사절단의 엘프들이 진실을 깨닫고 우리와 함께하는 것.

솔직히 여기까지는 크게 바라지 않는다. 세계수에 대한 믿음만 사라져도 감사한 일이었다.

“으으. 잠시만, 이 기억은 뭐야?”

“머, 머리가 아파.”

“주신께서, 혹시 신탁 같은 건가? 이게 뭐지?”

엘프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그들은 정신을 파고든 누군가의 기억을 접하며 혼란에 빠졌다.

세계수가 제사장의 목숨을 빼앗고, 엘프의 목숨을 사용해서 근원을 사용하고.

숭배자를 단순한 도구로 대하는 모습들이 사절단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다들 어떠십니까?”

나는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던 엘프들에게 다가갔다.

마치 모두 죽어 없어진 대악마가 다시 나타난 것처럼, 사절단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 그 심정은 이해할 만하지.

“여러분들이 본 건 저의 기억입니다. 거짓이 아니라 실제라는 이야기죠.”

“모두 귀를 막으시오! 저 사악한 존재의 말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무릇 신실한 숭배자라면 그릇된 것에 현혹되면 안 되는 법.

조금 직책이 높아 보이는 남자 엘프는 이마를 찡그리며 내 말을 막았다.

‘이게 정상이긴 하지.’

원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설령 그들의 머리에 들어간 기억이 사실인 걸 알았다고 해도, 당장 나를 신뢰할 수는 없을 터.

저들은 나를 배척하며 신념을 지키기 위해 똘똘 뭉치려 했다.

“혼란하시겠죠. 하지만 진실은 여러분들이 보신 그대로입니다.”

나는 두 팔을 크게 벌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더 말씀을 드리자면, 세계수는 당신들의 뿌리라던가, 반드시 섬겨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개소리! 나는 이르민술에서 200년을 살면서 직접 주신을 모셨소! 한데 당신 같은 외부인의 말을 어떻게 믿겠소?”

어떻게 믿겠냐니.

[통달한 자]의 눈은 엘프의 말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여 주었다.

저들의 믿음은 흔들리고 있다. 진심으로 세계수에 대한 신뢰가 굳건하다면, 저런 말을 외칠 이유가 있을까.

내 눈에는 바람 앞에 흔들리는 갈대 30여 개가 보일 뿐이었다.

“저기, 저희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혼란한 상황이 이어지던 와중에.

다른 엘프가 눈치를 보면서 본인들의 미래를 물었다.

자신들에게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 궁금한 것이었다.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여태껏 제법 단단하게 유지해 온 엘프들의 단결력이 조금씩 흔들렸다.

정말로 살려 줄까? 아니면 이용당하는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우리를 살려 놓겠다는 건지.

그들은 침을 삼키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너무 겁먹지 마세요. 이용하려는 건 맞으니까.”

불안감은 금세 황당함으로 뒤바뀌었다.

이제는 공포심보다는 내 말을 들어보고 싶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말 그대로, 무슨 개소리인지 듣고 싶다는 뜻.

모두의 시선이 내 입을 향하자, 나는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억에서 보았듯이. 세계수는 다른 초월자들을 죽였습니다. 아마 지금 시대의 원로분들은 알고 계시겠죠.”

엘프의 수명은 굉장히 길다.

원로급에 해당하는 자들이라면 수백 년 전의 일들도 잘 알고 있을 터.

사절단 중에는 기억 자체가 거짓이 아니냐는 말도 나왔지만, 그리 생각하는 엘프는 극히 소수였다.

“그래서 제안을 하겠습니다. 저랑 같이 가시죠. 이르민술로.”

“네?”

“지금 뭐라는 거야.”

“말도 안 돼. 이대로 숲으로 돌아가자고?”

어이없을 정도로 당당한 내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리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제안을 거부하는 엘프는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진실은 이르민술로 가서 확인해도 늦지 않을 테니.

“루카 의장님. 그걸 저희가 어떻게 믿죠?”

결국, 사절단의 대표인 시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녀는 웬만하면 동행자들을 모두 살려서 고향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게 대장의 책무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 질문에 어깨를 으쓱였다.

수천의 엘프 정예병이 덤빈다고 한들, 우리와 싸워서 이기지는 못한다.

저들은 스칼렛의 방어를 뚫지 못하며 클리프의 공격을 막을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근원의 힘을 가진 초월자 후보도 있지 않은가.

“저의 적은 여러분이 아니라 세계수입니다. 이유는 기억을 보셨을 테니 충분히 아실 겁니다.”

엘프들이 내 말을 전적으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본인들의 초월자에게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생긴 모양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세계수에게 의문을 품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한 가지 더 묻고 싶습니다.”

“예, 뭐든지.”

“혹시 다른 엘프들이 의장님의 앞길을 막는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여러분에게 한 것처럼 할 겁니다. 다치는 사람이 없게. 아니면 여러분들이 설득을 도와주셔도 되겠네요.”

설득을 돕는다.

그 말에 엘프들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칫 잘못하면 변절자로 내몰릴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되자, 스칼렛이 다가와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게이트는 어떻게 통과할 거야? 거긴 세계수가 쥐고 있다며.”

“토끼녀가 있는데, 쉽게 포기하지는 못하겠지. 그리고 관리자들이 도움을 주기로 했어. 통과는 문제없을 거야.”

“그렇구나.”

차원 게이트는 차원 내부와 외부의 경계.

거기서는 관리자들도 나를 도울 수 있었다.

‘이제 마계에서의 볼일은 끝났고.’

나는 게이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차원 게이트를 통과하는 건 예상보다도 더 쉬웠다.

일단 대종족 의회의 의장이란 감투를 쓰고 있으니 신원 확인은 간단히 통과되었다.

게다가 제 발로 함정으로 들어오는데 굳이 밀어낼 필요는 없었는지.

우리가 차원을 넘어 판게아로 진입할 때까지 세계수의 방해 공작은 없었다.

화아아악!

정신없이 이어지는 긴 통로를 지나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졌다.

푸르고 맑은 하늘과 상쾌한 공기.

그토록 바라던 판게아의 환경이 내 오감을 건드렸다.

“쓰읍하.”

나는 판게아의 공기를 폐부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었다.

이어서 천천히 시선을 돌려 따스한 햇볕 아래에 서 있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포위한 군대. 그들은 암흑대륙에 상주하고 있던 엘프들이었다.

“루카 의장, 순순히 인질들을 풀어 주시오.”

게이트를 포위하고 있던 군대 안쪽에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기운의 강함으로 미루어 볼 때 원로급에 해당하는 엘프일 터.

그와 동시에 나를 따라서 게이트에 뛰어들었던 스칼렛과 클리프, 그리고 엘프 사절단도 속속 판게아에 도착했다.

“벌써 이렇게. 다 포위됐잖아?”

“루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클리프와 스칼렛은 곧바로 나와 등을 맞대었다.

감각에 느껴지는 엘프의 숫자는 1000명이 조금 넘는다.

이만한 숫자의 병력으로 우리를 막아서려 하다니.

‘세계수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하긴 근원의 줄기가 끊어졌으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턱이 있나.

세계수는 우리가 억지로 사절단을 끌고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설마 내가 말로 설득해서 여기까지 데려왔다고는 꿈에도 몰랐겠지.

“다들 오해하는 게 있는데. 내가 납치한 거 아니야.”

“…….”

“그래, 안 믿는다 이거지.”

믿어 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가 없다.

다소 과격한 방식을 써서라도 믿음을 가지게 만드는 수밖에.

스릉, 나는 무명을 꺼내며 오류를 덧씌웠다.

세계수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근원을 일으켰지만, 여기는 그녀의 성역이 아니었다.

휘이익.

상대가 먼저 손을 쓰기 전에.

내가 손잡이를 휘두르자, 일대의 근원이 돌풍을 만난 나뭇가지처럼 쓸려나갔다.

때마침 스칼렛의 힘이 내게 깃들며 오류의 출력은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빨리 정리하고 가자.”

오류가 적의 진영을 휩쓸며 근원의 줄기를 통째로 걷어냈다.

세계수와의 연결이 끊어진 엘프들은 우수수 쓰러졌고, 그 뒤로 스칼렛과 클리프가 따르며 열심히 뼈 아픈 진실을 꽂아 주었다.

‘계속 보내 봐. 누구에게 유리할지.’

엘프들을 보내면 전부 다 흡수해 버리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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