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95화 (195/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95화>

195. 미끼 (3)

앞으로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시리엘과 사절단은 마차를 몰아서 데모니움 본성으로 왔다.

“여기, 주신께서 보내신 답장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시리엘과 사절단은 대회의실에 모여 세계수의 신탁을 전달했다.

편지에는 ‘지금 당장 가져와.’라는 뉘앙스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나와 주신다면 기꺼이 따라 줘야지.

“혹시 세계수께서 무슨 용무로 사절단을 보내셨는지 아십니까?”

“예, 주신께서 의장님이 죄인을 보내실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아시는군요. 그러면 늦기 전에 빨리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사절단에게 말했다.

그러자 나에게 추가적인 설명을 바라는 듯한 눈빛이 쏟아졌다.

세계수가 모든 엘프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 건 아니라는 뜻이겠지.

‘다들 임무의 본질이 뭔지는 모르는 것도 같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세계수와 뜻을 공유하는 엘프는 몇이나 될까.

하나도 없을 수도 있고, 의외로 수가 상당히 많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손쉽게 알아볼 방법도 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세계수께서는 이 편지를 어떻게 작성하시나요?”

“네? 제가 알기로는 셀리엘 원로님이 신탁을 받고 편지에 적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셀리엘 원로님이라. 처음 들어보는 분이군요.”

셀리엘 원로.

말과는 다르게, 나는 그 여자를 게임 속에서 본 적이 있다.

이르민술에서 핵심 간부로 나오던 엘프였지.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이제는 셀리엘 원로가 세계수의 오른팔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터.

‘특히 셀리엘은 정찰대의 수장이기도 하니까.’

엘프 정찰대.

그들은 이르민술 내에서도 엘리트에 속하는 자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귀 큰 놈들의 출세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시리엘처럼 무녀가 되는 거고 다른 하나는 정찰대에 들어가는 것이다.

참고로 세계수가 죽였던 제사장은 무녀 계열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시리엘 님도 편지의 내용은 모르셨겠군요.”

“물론입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시리엘은 내 말에 펄쩍 뛰면서 손을 저었다.

하긴 직위가 높아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짬이 안 될 테니까.

최소한 원로원에 들어갈 수준이 되어야 세계수와 뜻을 공유하리라.

“이르민술의 보안 의지 덕분에 더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 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제 저희가 죄인을 인도받아도 될까요?”

엘프들은 죄인을 본인들이 데려가려고 했다. 그렇게는 절대 안 되지.

“아니, 그러지 마시고. 차라리 저와 함께 가는 게 어떻습니까.”

“의장님께서 직접 죄인을 호송하시겠다는 말인가요?”

“예, 워낙 흉악한 놈이어서요. 저와 클리프가 이르민술까지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이게 바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시리엘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며 머리를 굴렸다.

현재의 나는 대종족 의회의 수장. 만약 이르민술을 방문하려면 여러 절차가 필요했다.

하지만 또 클리프의 유혹을 뿌리칠 수는 없겠지.

“의장님, 여기서 당장 이르민술로 연락하는 건 힘듭니다.”

“흠, 방법이 없는 건가요?”

“아뇨, 암흑대륙으로 가서 이르민술에 문의해 보면……. 일단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까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나는 대회의실 근처에 남는 방을 내주었다.

엘프들이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클리프는 나에게 바짝 붙어서 사념을 쏘아 보냈다.

- 과연 받아들일까?

- 안 될 이유도 없지. 무엇보다 시리엘이 사절단의 대표잖아.

동행을 거절한다면 또 다른 수단도 있고.

이건 그저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만약 엘프들이 거절한다면 그냥 우리끼리 게이트를 통과해도 되었다.

30분 정도를 기다리자, 시리엘과 사절단은 밝은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갑자기 저희의 숲을 방문하시는 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흉악한 죄인을 데려가기 위함이니. 우선 암흑대륙까지 잘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리엘은 다른 엘프들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말했고.

“다행입니다. 오늘은 본성에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시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사절단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베풀었다.

그날 저녁은 모두 즐겁게 놀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에 쇠창살에 가둬 놓았던 토끼녀를 꺼내 마차에 실었다.

엘프들에게 이 토끼를 왜 데려가는지 아느냐고 물었지만.

몰라요, 주신의 뜻이니까요, 저희도 궁금하네요. 등등.

모두 정확한 내용을 알고 있지는 않았다.

아무튼, 나와 클리프를 포함한 엘프 사절단은 데모니움 본성에서 나와 헬란 영지로 향했다.

두 차원을 연결한 게이트, 그곳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왠지 모르게 가벼웠다.

‘판게아로 가는 게 얼마 만인지.’

마계로 온 이후부터 판게아로 되돌아간 적은 없었다.

귀환이라. 세계수와의 결전을 위한 일이었지만, 그 단어만 들어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만 같았다.

* * *

헬란 영지.

완전한 인간의 영역이 되어 버린 이 영지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우선 모든 큰길에 도로가 생겨 이동하기 수월해졌고, 곳곳마다 쉼터가 있어서 여러모로 편리했다.

게다가 철근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들이 종종 보였다.

‘영지의 마기도 전부 사라졌어.’

마계는 인간이 살기 적합한 지역이 아니다.

대종족 의회의 사람들처럼 저항력이 올라간 경우가 아니라면, 오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기를 정화해야 했다.

판게아 대동맹은 큰 노력을 들여 그 일을 해냈다. 영지 전체에서 마기를 완전히 몰아내 버린 것이었다.

“여기도 정말 많이 바뀌긴 했네.”

클리프도 주위 풍경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이곳은 대동맹이 처음으로 점령한 지역이니까.

시간도 제법 흘렀으니 이만큼 발전했다고 해도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게, 약간 무역 연합의 변두리 지역을 보는 느낌이야.”

“들어보니까. 여기는 무역 연합의 건설 회사에서 공사를 맡았다더라. 다른 구역은 시타델이나 신성 제국이 맡았고.”

“구역마다 건축 형태가 다르겠네. 나중에 관광 사업을 열면 좋을지도.”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나와 클리프는 최대한 일반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정해진 지역에 들어갈 때까지는 수상한 행동은 최대한 삼가는 게 좋았다.

“아마 암흑대륙으로 가시면 더 놀라실 거예요.”

우리가 영양가 없는 말을 주고받고 있을 무렵.

시리엘은 말을 타고 은근슬쩍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사절단의 대표로서 우리를 대접하겠다는 좋은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 목적은 클리프였겠지만.

“지금 거기는 완전한 도시가 되었거든요.”

암흑대륙은 인류의 전진기지.

마계로 향하는 보급품은 반드시 그곳에 들려야 한다.

사람이 움직이면 물자가 필요하고, 물자가 오가는 장소에는 돈이 생기는 법.

여러 세력이 막대한 재화를 쏟아부어 건설한 전진기지는 이제 하나의 자유 도시처럼 바뀌고 말았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인 도시라니.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그렇지, 클리프?”

“다, 당연하지. 거길 들렀다가 갈 생각을 하니 정말 설레는걸.”

연기 좀 제대로 해라.

나는 국밥이를 살짝 째려보고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이르민술에 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 무역 연합도 들리자. 분명 다들 환영할 거야.”

“그거 좋은 생각이네. 개척지의 윌리엄 보안관님도 만나자.”

하하호호.

우리는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가만히 지켜보던 시리엘은 궁금증이 돋아났는지, 토끼녀를 가둔 수송 마차를 가리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괜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저 토끼는 어떤 죄를 지은 건가요?”

“음, 그건 말입니다.”

죄라고 한다면 실컷 떠들어 줄 수 있지.

다만 지금의 시리엘에게 말할 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거란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 주렴.

“그게, 저도 단순히 맡아 놓은 거라서요. 아마 세계수 님께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그러셨군요. 도대체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저런 귀여운 아이가…….”

“귀엽긴요. 모든 일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적당히 답을 내어 준 뒤.

나는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도록 하얀 말의 배를 툭툭 건드렸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로시난테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 갑자기 어디 가?

- 둘이 이야기하게 자리를 피해 주는 거지.

- 민망하잖아. 이 상황에서 어떻게 평범하게 대화를 해?

- 어차피 벌어질 일인데 뭘.

게이트까지는 대략 반나절.

이제 마계와는 당분간 안녕이고, 게이트 너머에는 무수히 많은 엘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펠리스와 스칼렛도 정해진 장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가면 우선 한판 붙겠지.’

전쟁이다.

우리의 전력은 4명이 전부. 반면에 세계수는 대략 4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

한 세력의 병력이라 생각하면 적어 보이지만, 그들 모두가 정령을 다루는 정예 중의 정예.

엘프들이 정령을 소환하면 숫자는 2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다.

길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 눈앞에는 새롭게 세워진 건축물이 나타났다.

마족의 습격을 막으면서, 동시에 물자와 인력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된 관문 요새였다.

문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수많은 마차와 사람들로 가득했다.

두 차원을 잇는 길이 이곳밖에 없으니 정체 현상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군요.”

나는 방향을 틀며 손가락으로 판게아로 향하는 관문 요새를 가리켰다.

이제 저곳만 지나면 사절단의 임무는 반쯤 성공하는 셈.

시리엘과 사절단들도 긴장의 끈을 반쯤 놓은 모습이었다.

“예. 이제 다시 귀환이네요.”

“보니까, 바로 돌아가는 건 힘들어 보이는데,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우선 귀환 요청을 해 놓고. 순번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절차입니다만.”

시리엘은 눈알을 살살 굴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권력자도 이 구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최소 하루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대종족 의회의 수장이라면?

‘뭘 말하고 싶은지 알겠네.’

시리엘은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권력의 칼을 휘둘러 이왕이면 빠르게 판게아로 넘어갈 수 있게 해 달라는 뜻이었다.

이 엘프, 초월자를 모시는 무녀가 맞기는 한 건가.

‘저 자유분방한 사고 덕분에 작전을 걸기는 쉽지만.’

엘프들은 세계수를 신뢰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의 정도는 모든 엘프가 똑같지 않다.

태생부터 초월자에 거부감이 있다거나, 성격 자체가 의구심이 많은 예도 있다.

시리엘은 후자에 속하는 경우였다.

지금만 해도 토끼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는가.

“흠, 제가 한번 말을 해 봐야겠군요. 어쨌든 근처에 숙소를 잡아두고 다시 오도록 하죠.”

“숙소는 저희가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여기는 마계이니 대종족 의회에서 대접해 드려야죠.”

“굳이 그러실 필요는……. 네, 그러면 감사히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시리엘은 잠시 머뭇거렸다가 이내 수락하고 말았다.

내가 나서겠다는데 계속 거절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나와 클리프는 관문 요새의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사절단은 우리를 따라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함께 이동했다.

그렇게 어느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로시난테를 멈춰 세우고 조용히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 직후, 검집에서 무명이 뽑혀 나왔고 건물 안쪽에서는 작은 체형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 루카 의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희는 이르민술의 사절단입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관문 요새 근처에 어떻게 이런 곳이?”

시리엘과 엘프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며 항의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여긴 우리가 만들어 낸 덫, 안으로 들어온 이상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루카, 이제 시작해도 돼?”

건물 안에서 나온 사람은 적발을 길게 늘어트리며 물었다.

스칼렛, 특별히 불러온 고민 상담사님의 눈에서는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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