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92화 (192/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92화>

192. 비밀과 거짓말 (5)

이튿날.

시리엘과 사절단은 내 뜻에 의해 본성의 대회의실로 모였다.

무슨 말을 들을지 알고 있었는지, 엘프들은 모두 정갈하게 예복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고서 천천히 대화를 시작했다.

“갑작스럽지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혹 실례가 되었다면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내 말에 시리엘은 허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이게 저희의 일이니까요.”

“그렇게 말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실은 제가 세계수께 드릴 답장을 완성해서 그걸 전해 드리려고 불렀습니다.”

“주신께서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서신은 제가 반드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밝게 웃은 시리엘은 클리프에게서 내 편지를 건네받았다.

두 사람이 교차하는 순간, 그들의 눈빛에서 미묘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저러다가 둘이서 야반도주라도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원래 시리엘이 클리프의 히로인 중 하나이긴 했지만.’

내가 했던 게임은 시뮬레이션답게 분기가 정말 많았다.

그중 하나는 시리엘과의 결혼 엔딩.

마지막에는 둘이 엘프들과 스칼렛의 축하를 받으며 이르민술에서 결혼하며 게임이 끝난다.

돌이켜 보면 그거 상당히 무서운 일일지도.

‘세계수는 클리프를 신의 사도로 만들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으니까.’

차원 정복을 위한 열쇠.

나무 여자는 클리프를 이용해서 전 세계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건 내가 근원을 손에 얻으며 더욱 확실해진 사실이었다.

영웅의 제자이자, 성품 자체도 세상에 알려진 영웅의 상과 거의 같으니까.

“의장님, 새로운 책무가 생겼으니 저희는 이만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 하겠군요.”

“예, 그러니 지금 작별 인사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부디 몸 성히 잘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저희야말로 대종족 의회의 배려에 무한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엘프 사절단은 정중하게 이별을 알렸다.

다만 시리엘의 경우에는 어딘가 마음이 불편한 듯 보였다.

지금 이르민술로 돌아가면 언제 또 마계를 방문할지 모르는 일.

영원히 클리프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별말씀을. 게다가 아예 헤어지는 것도 아닌걸요.”

“예? 정말……. 흠흠,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아마 제 답장을 받으시면 새로운 신탁을 내리실 겁니다. 아마 늦어도 1달이면 다시 만나지 않을까요?”

나는 그리 말하며 시리엘과 클리프를 번갈아 보았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시리엘은 돌아올 가능성은 대단히 크다.

엘프의 초월자도 저 둘의 반응을 보았으니, 나를 더 흔들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다시 보내겠지.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네요. 아, 아아.”

시리엘은 어딘가를 쳐다보며 희망찬 미래를 꿈꿨다가 빠르게 현실로 복귀했다.

그러고는 재차 허리를 숙이며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그, 기회가 된다면 조만간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살짝 사심이 느껴졌던 사절단의 환송식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엘프들은 곧바로 짐을 꾸려 판게아로 떠났고, 나와 클리프는 집무실로 올라왔다.

시간이 흘러, 창문을 통해 사절단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국밥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정말로 돌아올 수 있는 거겠지?”

질문을 던지는 클리프의 눈동자는 우수에 젖어 있었다.

저 아련한 눈빛 좀 봐. 누가 보면 강제로 뜯어놓은 줄 알겠어.

나는 절절한 사랑의 힘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꼭 시리엘을 보낸다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해코지는 당하지 않을걸.”

“정말 네 말대로 됐으면 좋겠다. 근데 편지에는 뭐라고 썼는데?”

“날짜를 정해 달라고 했지.”

내가 세계수와 맺었던 약속은 ‘관리자 납치’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관리자를 붙잡을 방법을 내게 알려 주었다.

“날짜라면.”

“약속을 이행할 준비가 되었으니, 판게아로 넘어갈 날짜를 알려 달라고 했어.”

“근데 세계수가 믿을까? 사절단이 본 게 있을 거 아니야.”

“함정인 걸 눈치챌 수도 있긴 하지. 그만둘 생각은 없지만.”

사절단의 구성원들은 몰랐겠지만.

세계수는 그들의 눈과 귀를 통해 이곳의 정보를 수집했다.

아마도 관리자가 안 보인다는 사실도 알아냈겠지.

그렇다면 나의 편지가 함정일 확률이 높다는 것 또한 깨달을지도 모른다.

“야, 그러다가 배신당하는 거 아니야?”

“천만에. 세계수는 절대로 먼저 나를 공격할 수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무조건 관리자의 신체를 손에 넣어야 하거든. 그래야 본인이 끝까지 살아남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을 내주었다.

서서히 멀어져가는 사절단 행렬, 우리는 우두커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을 때.

“그보다 이제 슬슬 관리자들을 만나러 가봐야 하지 않겠냐.”

“나도 같이 가도 되는 거였어?”

“어차피 한배를 탄 사이잖아. 다 알고 있는 사람을 뺄 수도 없고.”

“그러면 뭐.”

나와 클리프는 집무실에서 나와 본성의 외곽 지역으로 향했다.

드넓은 평원과 밭, 곡식이 한창 무르익고 있는 지역을 벗어나자 허름한 집이 나왔다.

내부에서는 강아지남 이외의 두 사람의 인기척이 더 느껴졌다.

‘토끼녀도 데리고 왔네.’

조사관 너구리는 내가 부탁했던 대로 토끼녀를 데려왔다.

처음에는 다들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지만, 이것보다 확실한 계획은 없었으니.

우리는 당당히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제일 먼저 일어나 인사한 사람은 조사관 너구리.

그 뒤로 강아지남이 허리를 숙였고, 마지막으로 토끼녀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목줄에 묶여 바닥에 앉아 있던 채로.

“오우 씨, 누가 보면 야생 토끼인 줄 알겠네.”

“오랜만이네요. 김만득 씨.”

“너는 체형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건 판게아에 머물기 위한 몸이니까여.”

토끼녀는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쪽에서 험한 일을 많이 당한 모양.

웬만하면 불쌍하다는 느낌도 들 만하지만, 어쩐지 내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지, 그러게 누가 억지로 사람을 납치하래.

내가 토끼녀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너구리는 거구의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뒤에 같이 오신 분은…….”

“얘는 클리프야. 저번에 말했던 대로 새로운 팀원이지.”

“바, 반갑습니다. 클리프라고 합니다.”

“저는 조사관 너구리라고 합니다.”

거구의 클리프는 조막만 한 조사관과 악수를 했다.

이번 일에는 대규모의 군대나 여러 세력의 도움을 받기 힘들다.

소수 정예를 이용해 빠르고 신속하게.

그게 이번 계획의 목표이다 보니 클리프처럼 믿음직한 사람들이 필요했다.

“다 모였으니 이제 시작하자. 그런데 정말로 토끼녀를 뜯어봐도 되겠어?”

나는 너구리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건 관리자의 약점을 드러내는 일,

자신들의 내부를 연구한다는 건 쉽게 허용할 사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구리는 의외로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여태까지 방해만 되었으니 이런 희생은 감수해야죠.”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

나는 토끼녀 앞에 섰다.

초월자에게 대령할 미끼를 그냥 가져갈 수는 없을 터.

상대의 요구 조건에 맞춰서 다듬고 포장까지 완벽하게 끝내야 했다.

* * *

늦은 밤, 한적하고 허름한 주택.

가뜩이나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음침한 장소에 섬뜩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사람의 비명 같기도 하고,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는 기묘한 소리였다.

느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듯한 목소리.

그것의 발원지는 허름한 주택의 내부였다.

물론, 비명의 주인은 사람도, 귀신도 아니었다.

“으으.”

토끼녀는 끙끙 앓으며 마룻바닥에서 간신히 일어섰다.

오후에 시작한 실험은 밤늦게까지 진행되었다. 그녀의 기력은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당연히, 나는 저 가증스러운 토끼의 몸부림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회복이 느려, 빨리빨리 못 일어나?”

“우씨! 이건, 학대에요. 학대라고요!”

허름한 주택의 거실.

그 가운데에 묶여 있는 토끼녀는 억울한 듯 입을 열어 소리쳤다.

상대는 꾀병의 달인이다. 아무리 진짜 같은 호소여도 색안경을 벗을 수 없었다.

“이제 알았니? 그리고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이야.”

“칫, 그러니 빨리 성공하시면 되잖아요. 누구 때문에 길어지고 있는데.”

“이제는 아주 막 나가는구나. 좋아, 원한다면 최대한 빨리 익혀 볼게.”

“아, 저, 그게. 죄송합니……. 느어어어!”

나는 근원의 기류를 일으켜 토끼녀의 머리를 감쌌다.

그러자 관리자들의 신체 구조가 내 머릿속에 퍼즐처럼 펼쳐졌다.

세계수가 말하길, 이들에게는 차원 외부와 내부를 잇는 스위치 같은 게 있다고 하였다.

만약 이 가짜 몸에 붙어있는 스위치를 망가트린다면.

‘관리자는 차원 내부에 갇히는 거지.’

그렇게 되면 관리자의 몸을 수색하며 약점을 찾아낼 수도 있으리라.

문제는 이놈들의 신체가 예상보다도 더 복잡했고, 세계수가 일러 준 방식대로 스위치를 망가트리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해도 막상 실전에서는 써먹기 힘든 느낌이었다.

슈우우우.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 법.

나는 아낌없이 근원을 쏟아부으며 토끼녀의 신체를 공략해 나갔다.

세계수는 내가 관리자와 친하니 그들을 납치하기도 좋을 거라고 말했다.

확실히 그건 사실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관리자들이 이르민술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테니.

“나아아악!”

내 기운이 예민한 부분에 닿을 때마다 토끼녀는 비명을 질러 주었다.

당사자의 말에 따르면 벌레 수백 마리가 머리카락 사이를 기어 다니는 기분이라던가.

아무튼. 고문에 가까운 일이 반복되니, 회의적인 태도를 내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강아지남이 반대 의사를 명백히 밝혔다.

“굳이 이렇게 힘을 들일 필요 없이, 토끼 선배를 포박한 척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세계수가 호구도 아니고.

토끼녀를 잡았다는 말에 선뜻 움직일 리가 없다.

그러니 정말로 관리자를 납치한 것처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일단 좀 조용히 하고 있어 봐!”

나는 살짝 성질을 부리며 토끼녀의 머리를 헤집었다.

세계수가 말했던 스위치란 부위는 찾아냈다. 다만 거기를 파고들어 통제하는 게 힘들다.

차원 외부의 힘이 근원을 계속 흩트려 놓았기 때문이다.

‘세계수 본인도 실제로 해 보지는 못했으니까. 당연한 일인가.’

어차피 본인은 실패해도 잃을 게 없다 이거겠지.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 나름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것.

관리자들이 만들어 놓은 보안 장치가 강력하다면, 그걸 그냥 통째로 뚫어 버리면 그만이다.

오류.

내가 생각해낸 해결법은 이랬다.

근원을 막아서는 힘을 오류로 뚫어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지체하지 않고 4가지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다음 몸 밖으로 꺼낸 기운들을 꼬아서 그대로 토끼녀의 머리를 쑤셨다.

“자, 잠시만요! 그건 좀!”

“조용히 해. 금방 끝나니까.”

푸욱.

날카롭게 잘 벼려진 오류가 송곳처럼 스위치가 있는 부분을 꿰뚫었다.

토끼녀의 비명은 곧바로 멈췄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근원을 밀어 넣었다.

외부와의 연결을 제어하는 부분.

근원이 그 안을 파고드는 순간, 토끼녀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겉보기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으나 초월자에 가까워진 내 감각은 속이지 못했다.

‘이거 정말로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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