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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로 살아남기-188화 (188/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88화>

188. 비밀과 거짓말 (1)

서로 간단히 안부를 물은 뒤.

우리 셋은 작은 등불을 켜놓고 탁자에 둘러앉았다.

이 시점에 마계에 오다니, 내 기억으로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한 그룹의 회장이라면 더더욱.

“스칼렛을 데려가려고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

“이왕이면 딸아이도 데려가고 싶지만.”

“저는 아직 가기 싫어요. 마계에서 루카를 도울 거예요.”

딸의 확고한 태도에 아버지는 혀를 내둘렀다.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데려가겠나?”

“스칼렛도 은근히 고집이 세니까요.”

“오랜만에 마음이 통하는군. 아무튼, 스칼렛 때문에 이곳으로 온 건 아니네.”

데이브는 마계에 왔다.

아직은 일반인에게 마계의 여행이 허가되지 않았지만, 록펠스 그룹은 무역 연합의 최고 그룹이다.

대동맹의 사절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터.

데이브는 살짝 뜸을 들였다가 결정을 내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 무역 연합에 엘프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네.”

“그렇습니까.”

“의외로……. 담담하군?”

“예상했던 일이니까요.”

세계수라고 마냥 놀고 있지는 않았겠지.

그녀는 판게아 내에서 본인을 지지할 세력을 찾고 있을 게 분명하다.

무역 연합은 그중에 하나일 뿐,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그게 끝이 아니라네. 자네에 대한 나쁜 소식도 들려오고 있어.”

“저요?”

“마신의 부하가 되었다느니. 마족의 새로운 신이 되었다느니. 뭐, 그런 거 말일세.”

“대단히 악의적인 소문이네요. 저는 지금까지. 으음.”

살짝 억울하긴 하다.

여태까지 마족들 뚝배기를 깨부수고 다녔는데, 정작 판게아에서는 나를 씹고 있었다니.

정보가 부족한 일반인들이 선동과 날조에 휘둘리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소식을 접하니 살짝 분노가 치솟기는 했다.

“루카, 혹시 화났어?”

내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스칼렛은 걱정스러운 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연히 화는 나지만, 엄한 곳에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지. 똑같이 갚아 줄 생각이야 하고 있지만.”

“갚아 줄 대상이 누구인데?”

“당연히 세계수지. 평범한 사람들은 놀아나고 있는 거야.”

세계수.

그녀가 엘프를 풀어서 내 악담을 퍼 나르고 있을 터.

앞에서는 동맹을 제의하고 뒤에서 칼침을 놓는 거야 이미 숱하게 경험한바.

일일이 따질 필요도, 대응책을 모색할 필요도 없다.

상대가 가장 원하지 않는 것, 나도 똑같이 아픈 부분을 찔러 주면 되는 거다.

“그보다 엘프들이 단독으로 활동하지는 않을 텐데. 그들을 지원하는 세력은 없습니까?”

“아마도 로키드 그룹일 걸세. 거기 회장이 요새 엘프들과 아주 친하더군.”

“핑거톤이나 록펠스와 맞먹는 세력이군요.”

“그렇지. 아직 정부 관료들과도 연줄이 깊어서 대놓고 쳐 내기는 힘들다네. 그런데 말일세.”

“말씀하시죠.”

“자네는 어쩌다가 세계수와 척을 지게 되었나?”

아주 예리하고 고리타분한 질문입니다, 회장님.

데이브는 의구심이 잔뜩 묻어나오는 어투로 물었다.

나와 스칼렛은 그의 질문에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참, 몇 번째인지.’

많은 사람이 이와 비슷한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진실을 접한 자들은 자신만의 답을 얻었고, 이 위험하고 거대한 판에 자동으로 끼게 되었다.

내가 입을 열 찰나, 스칼렛은 나와 똑같은 의견을 그녀의 아버지에게 내놓았다.

“아빠, 저희가 진실을 알려 드린다면 반드시 답을 내주셔야 해요.”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니?”

“말 그대로입니다. 이 이상으로 접근하신다면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죠.”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반드시 나름의 답을 내놓아야 한다.

내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생사가 걸린 문제이니까.

무엇보다 진실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먼저 이렇게 경고해 주지 않으면 큰 충격을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리라.

“무슨 이야기인지. 살짝만이라도 말해 주게.”

“음, 제가 회장님과 스칼렛을 만나게 해 드리고, 악마와 대악마를 때려잡으며 여기까지 온 건 우연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니?”

관리자의 시뮬레이션.

나는 지구에서 했던 게임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네, 운명이라고 볼 수도 있고. 누군가의 계획이기도 하죠.”

“운명이자 계획이라. 그럼. 자네가 대동맹이 설립되었을 때 말했던 그 초월자의 안배란 말인가?”

“비슷합니다. 다만 초월자라 부르기에는 조금 이질적입니다. 차원 외부의 존재거든요.”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게.”

데이브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나와 스칼렛을 번갈아 보았다.

생명의 위험을 감지한 그의 본능이 저절로 대화의 흐름을 끊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겁을 집어먹은 듯한 그의 얼굴은 오래가지 못했다.

“……말해 주게. 그 진실이라는 거.”

“아빠.”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단다. 이미 나와 그룹은 위험에 처해 있어. 더 위험해지느냐 마느냐의 문제지.”

데이브는 스칼렛을 설득시키고 다시 시선을 나에게 고정했다.

하긴 저 사람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지.

록펠스 그룹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고 싶어 하는 야심가니까.

“준비되셨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스칼렛, 준비해 줘. 빠르게 가자.”

“으응.”

어떤 일이든 하다 보면 실력이 느는 법.

스칼렛의 힘을 빌려, 나는 데이브에게 진실에 다가가는데 필요한 정보를 전해 주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벌어진 커다란 음모의 전말을 데이브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무, 무슨.”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방대한 정보를 전달받은 데이브의 상체가 상체를 살짝 비틀거렸다.

평범한 인간이 단번에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울 테니.

나와 스칼렛은 데이브가 회복할 동안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스칼렛, 이게 전부 사실이냐?”

“네, 저도 처음에는 뭐가 뭔지 제대로 알기 힘들었어요.”

“아마 정보를 준 사람이 네가 아니었다면 나도 믿지 않았을 거다.”

데이브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후우. 그렇다면 자네는 이 세계의 인물이 아닌 게로군.”

“신체는 판게아에 속해 있지만, 영혼은 외부에서 불러들인 겁니다.”

“그런가?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아주 혼란스럽네. 그러니까, 몇 분이라도 시간을 주게.”

“알겠습니다. 저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고맙네.”

“당연한 일이죠. 스칼렛, 너는 나오지 말고 회장님이랑 함께 있어.”

“으응, 알겠어.”

끼이익.

나는 둘을 방에 두고 혼자서 건물 외부로 나왔다.

어느덧 데모니움 영지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어졌고, 풀벌레 소리와 부엉이 소리가 가끔 귀를 건드렸다.

‘세계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나는 서둘러 수정구를 꺼내서 두 사람에게 연락을 취했다.

시타델의 로빈 공작과 결사단의 펠리스.

두 사람은 나의 우군이면서 많은 정보를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판게아의 일들을 조사해 달라고 한다면 되겠지.

둘과의 통신이 끝났을 때.

- 루카, 아빠가 들어와도 좋대.

스칼렛은 정신을 파고들며 데이브 회장의 말을 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데이브가 내 손을 거절할 변수가 있을까.

이미 로키드 그룹이 세계수에게 붙은 이상, 대척점에 놓인 록펠스 그룹의 선택은 뻔하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나는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며 물었다.

“자네와 함께하겠네. 내가 무엇을 하면 좋겠나?”

선택 자체는 들어보지 않아도 됐다.

다만 록펠스 그룹에게 무슨 일을 시킬지가 관건이었다.

“세계수가 어디까지 팔을 뻗고 있는지, 우선 그 정보를 수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네. 이거 빨리 무역 연합을 돌아가야겠군.”

“그리고 스칼렛도 데려가시죠. 그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더 적절할 겁니다.”

“오, 정말 고맙네! 자네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당장…….”

“잠시만요! 루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작스러운 퇴거 명령이 떨어지자.

아버지와 딸은 화들짝 놀라며 저마다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입을 막고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둘 다 오해하지 말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스칼렛, 지금 대종족 의회에는 네가 할 일이 없어. 하지만 판게아에는 있지.”

“내가 거기서 뭘 해? 나는 사람들을 선동한다던가, 정보를 조작해서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건 할 줄 몰라.”

“말이 심하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이제 록펠스 그룹은 위험해졌다.

세계수가 멍청하지 않다면 반드시 데이브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려고 하겠지.

그렇다고 내가 가서 도와줄 수도 없는 상황이니, 유능한 경호원을 붙여 주는 게 제일 현실적이었다.

“앞으로 세계수는 록펠스 그룹을 노릴지도 몰라. 근데 여기서 나를 제외하고 근원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잖아?”

“아! 그렇구나.”

“그 말인즉슨, 여기가 판게아보다 안전하다는 이야기인가?”

“콕 집어서 말하긴 힘들지만, 판게아는 세계수의 앞마당이니까요.”

초월자의 힘은 믿음과 염원에서 나온다.

세계수를 믿는 숭배자가 많이 있는 땅일수록 그녀의 힘이 강해질 터.

이르민술이 아니라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겠지만, 근원은 여러 제약이 걸려 있어도 두려운 힘이다.

“알겠어, 아빠를 따라갈게.”

“아니, 이렇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차라리 마계에 더 있으면서…….”

둘의 생각은 한순간에 뒤집혔다.

스칼렛은 무역 연합으로 돌아가겠다고 주장했고, 데이브는 반대로 마계에 남기를 원했다.

그래도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

이튿날, 데이브와 스칼렛을 데리고 차원 게이트가 있는 헬란 영지로 떠났다.

* * *

스칼렛이 무역 연합으로 돌아가고 며칠이 지났다.

대종족 의회의 일상은 그 이후로 별로 변하지 않았다.

뭔가 허전하고 비어버린 느낌은 들었지만.

“스칼렛 양이 없으니, 여기도 뭔가 어색한 느낌이군.”

데모니움 본성의 집무실.

테이블에 앉은 로빈 공작은 창문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리 말했다.

펠리스도 조용히 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역 연합이 불안하긴 하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음, 그렇긴 하겠지.”

로빈 공작과 결사단주,

이 둘이 집무실에 모인 건 일주일 전의 약속 때문이었다.

판게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

세계수가 깔고 있는 밑밥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다들 모였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시타델은 어떻던가요?”

“자네의 말대로 모종의 거래가 있더군. 엘프들이 왕실 사람들과 접촉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네.”

“왕실이요?”

여왕은 시타델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7위계 대마법사이면서 수십 년 동안 훌륭하게 나라를 이끈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마계와의 전쟁도 승리로 이끌어서 왕권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왕가 안에는 본인이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별로 문제는 안 되시나 보군요.”

“시계탑주와 7위계 대마법사인 내가 폐하를 지지하는데 뭐가 무섭겠나?”

저 양반, 배신은 안 하나 보네.

로빈 공작이 현명한 판단을 해 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긴 시타델은 세계수의 간섭 따위에 위태로워질 나라는 아니지.

다음으로 결사단의 정보를 가져온 펠리스가 대화를 이었다.

“사라센에게 연락해서 최근 엘프들의 동향을 전부 긁어 왔다. 읽어 보아라.”

“감사합니다. 어디…….”

역시 정보력 하면 결사단이지.

펠리스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신성 제국과 한자 동맹. 그리고 평의회 연방을 중점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종합적으로, 이전보다 엘프들의 활동 빈도가 급격히 늘어났다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자세한 정보는 시간이 더 걸릴 거다.”

“그것도 필요하긴 하겠지만, 이 서류로 세계수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겠네요.”

“당장 쳐들어갈까?”

“아뇨, 그랬다가는 역풍 맞기 십상이죠. 일단은 우리도 조용히 맞수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펠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세계수는 본인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 그러면 최소한 중립으로 바꿔 놓아야지.

나는 씩 웃으며 결사단주를 바라보았다.

“단주님, 결사단이 이 방면으로는 최고가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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