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87화>
187. 청소부 (3)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스치며 지나갔다.
하늘에서는 하얀 쓰레기가 끊임없이 쏟아졌고, 바닥은 푹푹 파여서 제대로 걸어갈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여기서 진짜 개고생을 했었지.
히힝.
물론, 지금은 우리의 친구 로시난테가 있다.
우리는 폭설을 뚫으며 니플헤임 영지의 중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라일라크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프린지는 니플헤임 영지가 있는 북부로 떠났기 때문이다.
얼음 동굴.
프린지가 숨어 있는 곳은 과거에 내가 발라크를 만났던 장소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곳의 위치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
바신의 키메라였던 로시난테는 이곳의 지리를 잘 알았고, 덕분에 눈보라 속에서도 헤매지 않고 빠르게 입구를 찾아냈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어.”
히이이.
하얀색 말은 조용히 소리를 내며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로시난테를 보내고 조용히 프린지가 머무는 곳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퍼붓는 폭설을 뚫고 나아가자, 저 멀리서 어렴풋이 불빛이 보이기 보였다.
‘일단 생존자가 더 있는지 살펴볼까.’
나는 존재감을 낮추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얼음 동굴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마족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노예 놈들이 여기까지 올까?”
“설마, 여기에 뭐가 있다고. 여기에 있는 건 눈이랑 얼음밖에 없는데.”
“하지만 놈들 목적이 마족 척살이면?”
“그런 걸 생각해서 뭐 해. 놈들이 오면 싸우는 거지.”
보초병들의 대화 주제는 아주 단순했다.
요즘 밥이 맛이 없다든지, 몸이 근질거려서 좀 싸우고 싶다든지.
그들은 사소한 불만 사항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나는 굳이 둘을 죽이지 않고 그냥 입구를 통과했다.
‘조금 더 센 애들을 찾아야 하나.’
하급이나 중급 마족들은 애당초 아는 게 없다.
위에서 싸우라면 싸우고, 후퇴하라고 하면 후퇴하는 게 전부.
이들이 가진 정보로는 오늘 저녁 메뉴조차 모를 정도니 귀를 기울일 가치가 없었다.
얼음 동굴의 내부.
감시병들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자 상대적으로 높은 계급의 마족들이 보였다.
상급 마족, 그들은 밑의 계급보다는 더 생산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다.
“프린지 님은?”
“아직 상태가 좋지는 않더군.”
“큰일이야. 발라크 님도 돌아가셨고 키메라도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던데.”
“살아서 돌아온 게 천만다행이지. 그보다 자네는 여기에 계속 남을 건가?”
“그게 무슨 말이지?”
이들은 주로 한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들.
밑에 딸린 부하들이 있다 보니, 그들의 대화는 생존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제 우리는 끝이라네.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냐. 여기가 가장 안전해.”
“그건 최소한 오키라 님이 살아계셔야 가능한 일이지. 지금의 프린지 님은 우리를 지켜 주실 수 없을 걸세.”
“후우, 그건 그렇지. 상황이 정말 답답해졌어.”
두 상급 마족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역시, 다른 곳에서 들었던 대로 오키라를 포함해 다른 악마들은 전부 죽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더 정보를 모을 필요는 없을 터.
나는 은신을 풀면서 두 상급 마족의 머리를 날렸다.
촤악!
둘의 고민거리를 없애 주고.
길고 차가운 통로를 따라서 깊숙이 들어가니, 안에서 경계를 서던 마족들이 튀어나왔다.
그중에는 제법 높은 계급의 마족들도 많았다.
“침입자를 막아라!”
“여기서 막는다. 누가 가서 주군께 소식을 알려!”
“더는 못 지나간다, 인간!”
앞을 막아선 마족들은 저마다 유언을 남기고 쓰러졌다.
대충 들어보니 프린지의 친위대였던 모양.
장애물을 해치우고 나아간 끝에 내가 들어간 곳은 발라크의 왕좌가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안녕. 오랜만이지?”
왕좌 근처에 주저앉아 있는 남자.
나는 가죽옷을 걸친 인마족에게 손을 흔들며 널찍한 장소로 들어왔다.
명랑하게 인사를 건넨 나와는 달리, 프린지는 심기가 불편한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잘만 웃었는데 말이야.
“어째서, 우리를 배신한 겁니까?”
프린지는 간신히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배신이라니? 뒤통수를 먼저 노린 쪽은 발라크였다.
당연히 나도 기회가 오면 돌아설 생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먼저 행동한 건 내가 아니었다.
“무슨 소리야. 서로 다 알고 있던 일들이잖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당신네와 화합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음, 그런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
림보 영지를 공격하기 전.
발라크와 대동맹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자는 서약을 하긴 했었다.
다들 짜고 치는 고스톱인 줄 알았는데. 그걸 믿는 마족이 있을 줄은 몰랐네.
“근데 발라크는 절대 인간과 화합할 생각이 없었을걸? 실제로도 그렇게 됐잖아.”
“그렇다면 당신이 주군을 먼저 공격한 게 아니란 이야깁니까?”
“당연하지. 음, 당연한 건 아닌가? 어쨌든 동맹을 파기하고 먼저 공격한 쪽은 발라크였다고.”
“그럴 수가…….”
프린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결국, 우리를 버리려 했어. 바신의 생각이 맞았던 거야.”
이제는 혼잣말까지.
그의 상태는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믿었던 상관에게 배신을 당하고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까지 생겼으니 어련하겠는가.
나는 자비를 내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 순간, 프린지는 힘겹게 바닥에서 일어섰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봐.”
“제 주군. 발라크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근원은 내 것이다!
활기찼던 발라크의 음성이 아직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해맑게 외치며 마신의 제단으로 달려가던 그의 모습도 눈에 선했다.
“그냥. 대악마스럽게 죽었지.”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저희에 대한 말이나, 다른 유언 같은 것들 말입니다.”
젠장! 젠장!
분명 죽기 전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그런 말들을 했었지.
나는 아무도 원하지 않을 진실을 말해 줄지 말지 살짝 고민해 보았다.
‘역시 비밀로 해 두는 편이 좋겠지.’
그의 마지막은 평소에 보여 줬던 모습과는 아주 달랐다.
애당초 복수를 위해 부하들을 사지로 내몬 인성의 소유자가 아닌가.
발라크는 딱 그 수준에 맞춘 최후를 맞이했다.
이렇게 되니까 남아 있는 얘네가 되게 불쌍하잖아?
“아니, 그런 건 없었어. 서로 격렬하게 싸우다가 죽었거든.”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습니다. 저는 싸우다가 죽고 싶습니다.”
“좋을 대로.”
나는 뒤로 걸으며 프린지와 거리를 벌렸다.
혹 상대가 도망치거나 수작을 부린다 해도 걱정은 되지 않았다.
뭔가를 하려고 한다면 그전에 오류나 근원으로 저지할 테니.
슈아아아.
내 걱정은 단순한 기우였는지.
프린지는 활을 소환하더니 칠흑색 기운을 응집해 활시위에 끼웠다.
대악마에 근접하는 마기, 상대는 죽음을 각오하고 본인이 가진 마기를 최대한 화살에 욱여넣었다.
이윽고 공격할 준비를 끝낸 순간.
파아아앙!
거센 파공음을 낸 화살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검은색 화살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마기가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관통력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탓에 오히려 외형이 더 단순해진 것이었다.
‘위력만 놓고 보면 대악마도 기겁할 수준이네.’
나는 손을 들어 근원의 기류를 불러일으켰다.
공격이 날아오는 경로에 초월자의 힘으로 방어막을 펼쳤고, 프린지가 쏜 화살은 그대로 공중에 멈추고 말았다.
어떤 공격이든 시간의 흐름을 막아 버리면 쓸모없는 법.
그만큼 근원의 힘은 사기적이었다.
“허.”
정면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온 힘을 다한 공격이 막혀 버렸으니 어련할까.
내가 지닌 힘은 마신에게서 나왔기 때문인지, 특히 마족이나 마기를 상대할 때 성능이 더 좋았다.
라일라크의 정신에 간섭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덕분이었다.
“훌륭해. 잘 싸웠어.”
그 말을 끝으로 프린지의 화살은 분해되어 사라졌다.
뒤이어 칼자루만 남은 무명이 상대의 어깨선을 따라 스르륵 움직였다.
프린지의 목숨을 거두고서, 나는 방에서 빠져나와 로시난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제 마족들은 최소 수십 년 동안은 조용하겠네.’
고위 마족 이상의 강자들은 보이는 족족 처리했다.
살아남은 마족들은 대부분 상급 이하의 똘마니들.
현대적인 무장을 갖추기 시작한 대종족 의회에는 위협적인 존재들이 아니었다.
모든 목표를 완수했으니 이제 복귀할 때가 왔다.
* * *
짧다면 짧은 시간.
나는 이틀 만에 마계 청소를 끝내고 곧바로 데모니움 본성으로 귀환했다.
이번 여정에서 새로 얻은 것들은 이러했다.
오러: 5181
혈마력: 1629
라일라크와 키메라를 쓰러트리며 흡수한 기운들.
특히 드래곤 하트 3개를 빨아들이며 내 오러가 크게 성장했다.
초월자의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토대가 더 견고해지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근원에 대한 숙련도도 제법 올렸고.’
실전은 최고의 훈련인 법.
적이 약하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렇게 손에 얻은 것들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나와 로시난테는 데모니움 본성에 도착했다.
지금 시각은 늦은 저녁,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닐 시간대는 아니어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조용히 내성 후원으로 가자.”
로시난테는 요구에 맞춰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의 환대를 받고 싶었으나 이번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내가 데모니움을 떠난 것 자체도 몰랐으니.
“히힝.”
“수고 많았어. 당분간은 푹 쉬고 있어.”
48시간이 넘도록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많이 힘들었겠지.
나는 로시난테의 등에서 내리며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하얀 말은 가만히 내 손길을 받더니, 금세 꾸벅꾸벅 졸면서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나도 들어가서 좀 잘까.’
내일부터는 다시 업무와 수련을 반복해야 할 터.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런데 본성에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뭘까?
‘굉장히 평범한 사람의 존재감인데.’
관리자나 세계수의 사람은 아니다.
분명 어디선가 만나 본 사람의 존재감이 내 감각에 걸렸다.
대동맹에서 온 사절단인가. 확률적으로 본다면 그럴 가능성이 가장 컸다.
나는 즉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정체불명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일단은 정중하게.
똑똑똑.
문을 두드리니 방 안쪽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렸다.
익숙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 어디선가 만나 본 적이 있는 사람임은 틀림없었다.
“스칼렛이니?”
이어서 상대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이 내 의문을 덜어 주었다.
세상에 스칼렛을 저렇게 부를 사람은 많지 않지.
나는 상대의 정체를 떠올리고서 입을 열었다.
“접니다, 회장님.”
“루카 의장?”
“예,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게.”
방 안의 남자는 충전식 수정구를 들고 누군가에게 통신을 걸었다.
아마 그 대상은 스칼렛일 터.
몇 초가 지나자, 남자의 연락을 받은 적발의 여인이 공간을 이동해서 내 앞에 나타났다.
“루카, 굉장히 빨리 왔네?”
“헤매지 않아서 얼마 안 걸렸어. 그보다 데이브 회장님은 왜 여기에 계시는 거야.”
“그게. 일단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아빠, 저예요.”
달칵.
스칼렛이 문을 두드리자 남자는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데이브 록펠스, 이제는 무역 연합의 일인자가 된 사람이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등장은 살짝 놀라운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나?”
나는 주변을 살피고서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직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딸을 만나러 온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