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86화>
186. 청소부 (2)
림보 영지의 중심부.
네크베르 사막을 지나서 본성 근처에 도착하니 폭삭 무너진 본성이 보였다.
한 달이 다 된 시점임에도 이곳은 여전히 폐허 그대로였다.
‘그래도 인기척이 좀 느껴지기는 하네.’
남아 있는 마족의 숫자는 많이 적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감지한 마족의 수가 2만을 넘지 않을 정도.
게다가 본성 근처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천 명을 넘지 않았다.
나는 로시난테를 안전한 곳에 두고 본성으로 다가갔다.
‘들었던 대로 라일라크는 여기 있고.’
한때 림보 본성이었던 폐허.
라일라크와 살아남은 그의 식솔들은 모두 이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프린지를 찾기 위해 스티지아를 찾았지만, 목표를 라일라크로 바꾼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본성에서 만났던 인마족.
그 녀석은 상당히 진솔한 친구였고, 아주 착하게 본인이 알고 있던 정보를 알려 줬다.
다만 프린지의 위치를 몰랐던 게 문제일 뿐이지.
나는 그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길을 걸었다.
‘저희는 장벽을 넘어 본성으로 진격했습니다.’
‘그 뒤에는? 본성은 폐허가 되었을 텐데.’
‘예, 그런데 라일라크와 드래곤이 폐허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프린지는 그걸 보고 바로 달려들었고, 저는 그때 이곳으로 도망쳐서 그 뒤는 잘 모릅니다.’
분명 키메라가 다 먹어치우고 끝났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프린지와 라일라크는 죽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긴 대악마에 근접한 두 악마가 작정하고 덤볐다면 이겼을 수도 있겠지.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지?”
“주인님께서 별다른 말이 없으시니,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듣기로는 아직 상처가 낫지 않으셨다던데. 인간들이 오기 전에 어서 여길 떠나야 해.”
뱀파이어들의 대화 소리.
걱정이 잔뜩 담긴 그들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건드렸다.
라일라크의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보지?
그의 상황이 어떻든 별 상관은 없겠지만, 크게 다쳤다면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쉬각!
뱀파이어들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마족들은 가능한 많이 처치하는 게 이로울 터.
나는 존재감을 낮추고서 눈에 보이는 뱀파이어를 해치우며 전진했다.
“침입자가 있다! 다들 주거지로 모이라는 라일라크님의 명령이다!”
저들의 대응 속도는 상당히 느렸다.
라일라크의 부상이 정말 심한 탓인지, 본인의 식솔들이 없어지는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뱀파이어들을 모아 준다면 나야 수고를 덜 수 있으니 좋지.
폐허의 너머.
라일라크의 은신처까지 가는 건 쉬웠다.
방해되는 모든 생명체는 핏물이 되어 바닥에 뿌려졌고, 이제 남아 있는 적들은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내가 은신을 풀고 무너진 건물의 입구로 다가가자.
“그대의 이름이, 루카라고 했던가?”
쉬고 갈라진 라일라크의 음성이 낮게 깔려 음울한 소리를 냈다.
“맞아. 이제 슬슬 끝을 낼 때가 되지 않았어?”
나는 말을 내뱉으며 천천히 어두컴컴한 내부로 들어갔다.
뱀파이어들은 마구잡이로 덤비지 않고 조심스럽게 길을 터 주었다.
그들을 따라서 어둠을 뚫고 내부로 들어가니, 바닥에 누워 있는 라일라크의 모습이 보였다.
‘거의 반송장이네.’
얼핏 살펴본 그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화상이 온몸을 뒤덮었고, 녹아내린 피부는 더 이상 재생되지 않았다.
아마도 드래곤 브레스에 호되게 당한 탓이겠지.
“어서 오시오. 변변치 않지만, 여기가 우리의 새로운 집이오.”
“가족들이 많아서 먹여 살리기가 힘들겠어.”
“흐흐흐.”
예전에 봤던 귀공자는 어디 가고.
내 앞에는 죽기 일보 직전의 중환자가 정신줄을 놓은 채 웃고 있었다.
그는 부서진 벽의 잔해를 등받이 삼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시간을 끌 이유는 없을 터.
나는 곧바로 무명을 들어 라일라크를 가리켰다.
“보니까, 시간이 지난다고 나을 만한 상처는 아니네.”
“그렇소. 그대가 나를 살려 줘도 오래 살 몸은 아니니, 가능하면 빨리 끝내시오.”
“너무 쉽게 말하는데. 부하들만이라도 살려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 종족의 원수와 거래를 할 수는 없소.”
성품이 참 대쪽 같은 흡혈귀야.
스스로 말하지 않겠다면 다른 방식을 찾으면 된다.
나는 제자리에서 시선을 빙그르르 돌렸다. 찾아보면 살고 싶은 뱀파이어가 있겠지.
그러나 주위에 모여 있던 뱀파이어들은 모두 굳건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배신자는 나오지 않을 거 같네.’
파멸용의 키메라와 프린지.
아직 이 둘을 더 찾아야 하는데, 여기서 실마리가 끊어져서는 곤란하다.
나는 턱을 문지르며 잠시 고민하다가 새로운 방법을 떠올렸다.
“아직 해보진 않았지만, 네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억지로 도움을 받아야지.”
“뭐요?”
촤악!
나를 포위하고 있던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눈앞에서 식솔들을 잃은 라일라크의 살기가 바늘처럼 내 몸을 찔러댔다.
물론, 이렇다 할 효과는 없었다.
“이 노오옴! 커, 커허헉!”
소리를 질러대던 라일라크의 눈동자가 흰자로 뒤덮였다.
그는 게거품을 물며 실신하더니, 이내 사지를 늘어트리고 축 늘어졌다.
죽은 건 아니다. 근원을 억지로 머리에 쑤셔 박은 부작용일 뿐.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키메라와 싸웠는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프린지라는 바신의 부하가 나타난 덕분에 시선이 분산되었고, 그래서 살 수 있었습니다.”
“음, 그래서 나머지 둘은 어떻게 됐는데.”
“전부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둘은 큰 상처를 입고서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습니다.”
라일라크는 순순히 정보를 내주었다.
본인의 의지는 아니고, 근원의 영향을 받아 정신을 조종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키메라와 프린지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내고 일어섰다.
‘대충 어디로 갔는지는 알겠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악마들은 모두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
남아 있는 위험 요소는 프린지와 키메라가 전부.
그 둘만 해결하면 이제 마계에 나의 적은 완전히 사라진다.
“크허어억. 우우욱!”
내가 계획을 정리하는 사이.
정신을 차린 라일라크는 안에 있던 내용물을 토해 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한가득 드러났다.
“설마, 설마. 이 힘을 어떻게?”
“왜? 나는 마신의 힘을 가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라일라크는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따지고 보면, 적국의 사람이 자기 수장을 죽이고 왕이 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의 성격상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스걱.
무명이 움직이자 라일라크의 숨이 끊어졌다.
나는 그에게서 흘러나온 혈마력을 모두 흡수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 목표는 키메라. 비교적 움직임이 적을 것 같은 프린지와는 달리, 키메라는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상처가 크다니까,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
드래곤의 특성상.
그들은 상처를 입으면 가까운 동굴을 찾아 숨는 버릇이 있다.
본능만 남아 버린 키메라라면 아마 심장의 주인이 가진 경험을 그대로 따라 할 터.
나는 서둘러 키메라가 도망친 방향으로 향했다.
* * *
림보 영지의 이름 모를 산속.
나는 상당히 큰 입구를 가진 바위 동굴을 찾아냈다.
이 근처는 무언가에 의해 부서지고 불타 버렸고, 그나마 성한 곳은 이 동굴 입구가 전부였다.
게다가 안에서는 아주 짙은 농도의 마나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으니.
“밖으로 나와. 안에서 깔려 죽기 싫으면.”
나는 무명을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르르르, 안쪽에서 흘러나온 울음소리는 강력한 기운을 뽐내며 주변을 휘몰아쳤다.
다른 건 몰라도 거절의 의미가 담겼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좀 곱게 나오지, 동굴에 파묻히면 찾아내기 귀찮은데 말이야.
우우우웅.
나는 하는 수 없이 무명에 오러와 마기를 가득 주입했다.
자르고 베는 건 오류가 가장 좋지만, 넓은 범위를 타격하는 건 아직 이쪽이 더 좋으니까.
거기에 근원을 덧씌운다면 더욱 인상적인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림자 검술 3번, [달빛 베기]
무수히 많이 불어난 칠흑의 칼날.
내가 뿜어낸 근원은 무명에 들러붙어 시공간에 개입했다.
그러자 이미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난 칼날은 다시 몇 배로 불어났다.
당연히 단순한 착시 현상은 아니었다.
‘일단은 4번이 한계네.’
나는 왜곡된 시공간 속에서 [달빛 베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 덕분에 이렇게 한계치를 넘어선 칼날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휘이이.
마침내 시공간을 잡아 두었던 근원의 힘이 약해지며 일대에 공기가 뒤로 밀려났다.
팔을 수평으로 움직이자, 중첩되어 있던 기술이 일거에 터져 나오며 동굴의 입구와 그 주변을 덮쳤다.
촤아아앙!
총 4개의 종말점.
동시에 펼쳐진 [달빛 베기]는 각기 다른 종말점으로 모여들며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치 마이크에 에코를 넣는 것처럼 공간을 진동시켰다.
결국, 수천 개가 넘는 검강에 난도질 된 동굴 입구는 형태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구.
시야를 가리는 모래 먼지가 서서히 걷힌 뒤.
동굴 입구가 있던 위치에는 돌이 쌓여 만들어진 작은 언덕이 보였다.
안타깝게도 키메라는 살아 있었다. 3개의 드래곤 하트가 만들어 낸 존재감이 내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입에는 화염을 잔뜩 머금은 채로.
푸화아악!
가운데 머리가 뿜어낸 화염이 위에서 쏟아졌다.
드래곤 브레스는 분명 위협적인 공격이 확실하다.
초월자 후보가 되었어도 저 공격을 정통으로 맞으면 무사하기는 힘들 테니까.
그림자 검술 6번, [투영]
옛날이라면 당장에 도망갔겠지.
하지만 지금은 근원이 내 손에 있다. 나는 [투영]을 최대한 압축해서 지름을 7m로 좁혔다.
그다음 근원으로 공간의 지배력을 강화해 외부와 더욱 단절되도록 만들었다.
그것으로 모든 대비는 끝났다.
‘화염이 전혀 파고들지 못하네.’
온돌처럼 뜨끈뜨끈한 느낌이라도 들 줄 알았건만.
키메라가 뿜어낸 브레스는 내 [투영]을 전혀 뚫어내지 못했다.
역시 근원이 최고야. 늘 새롭고 짜릿해.
나는 장막을 걷어내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키메라를 보았다.
“또 불이나 쏘려고?”
이번에는 3개의 머리가 전부 나를 노렸다.
얘는 공격이 너무 한결같아서 탈이란 말이야.
휙, 공격을 감지한 나의 신형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공기가 채우며 바람이 불었다.
쿵, 쿠궁, 쿠구궁.
빈 장소에 집채만 한 불덩어리가 연달아 떨어졌고.
키메라가 만들어 낸 불꽃놀이에 지면이 녹아내리며 뜨거운 열기가 용솟음쳤다.
화력만 따지자면 재앙 그 자체지만, 통제되지 않는 키메라의 반응 속도는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서걱.
화염이 이글거리는 공간에 무언가 잘리는 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오류를 덧씌운 무명이 머리 3개를 동시에 자른 것이었다.
몸을 통제할 수단이 사라지기 무섭게 드래곤의 몸통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1달 전이었으면 잡느라 고생 좀 했겠는데.’
키메라의 몸은 굉장히 단단했다.
푸르카스의 공격도 버텨 냈을 정도니 말해 봤자 입만 아플 터.
만약 무명이 성장하지 않았다면, 이놈을 상대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소비했으리라.
저벅, 저벅.
나는 근처의 화염을 오류를 휘둘러 꺼트리며 키메라의 시체에 접근했다.
드래곤의 가죽이나 뼈는 챙기기 힘들었지만, 드래곤 하트에 깃든 힘을 가져가는 건 아주 쉬웠다.
그저 손만 뻗으면 알아서 딸려오니까.
슈우우.
키메라에 들어 있던 엄청난 양의 마나가 내 몸을 파고들었다.
기운을 흡수하며 나는 다시금 텔런트의 존재에 감사함을 느꼈다.
라일라크의 정신을 조종하거나, 내 기술에 근원을 덧대거나.
근원을 포함해, 모든 기운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건 순전히 내 텔런트 덕분이었다.
‘내가 푸르카스보다 근원을 배우는 속도가 빠른 것도 말이지.’
이제 다음은 프린지가 있는 니플헤임 영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