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85화>
185. 청소부 (1)
데모니움 본성의 꼭대기.
나와 강아지남은 감시탑의 정상에서 본성 주위의 넓은 평원을 내려다보았다.
강아지남은 한참 동안 멍하니 풍경을 구경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만득 씨는 이 장소가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마계의 풍경은 독특한 개성이 있었다.
노을빛이 도는 마계의 하늘이 만들어 낸 고즈넉한 분위기는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기가 마족의 소굴이 아니었다면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싫어해. 풍경 자체야 나쁘지 않지만,”
“그러시군요. 이유를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여기는 내 삶의 터전이라고 볼 수 없으니까. 그냥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곳일 뿐이야.”
이곳에 정이 쌓이지 않은 건 아니다.
대종족 의회, 깨비와 종족 대표들 등등.
내가 손수 일으킨 세력과 영입한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
애정을 갖지 않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 일일 터.
‘하지만 그건 사람들 때문이지. 마계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니니까.’
마계는 내가 모르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피할 수 없으니 즐기자는 마음가짐으로 버텨 냈을 뿐.
지금이야 집처럼 편안한 느낌이지만,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굉장히 떨리고 숨이 막혔다.
게다가 이곳을 좋아하지 못할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강제로 끌려온 곳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지구에서 2년 동안 굳건이에게 끌려갔던 것처럼.
나는 관리자들에 의해서 판게아에 잡혀 왔다. 그나마 거기는 친숙한 곳이기라도 했지.
여기는 침을 줄줄 흘리며 나를 죽이려는 마족들로 가득한 시궁창이었으니.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안 그러면 총으로 다 쏴 죽이고 싶어질 거야.”
“죄, 죄송합니다.”
강아지남은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완전한 협력 관계가 된 이후로 더욱 나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이번 일의 마무리가 잘 안 되면 본인도 징계를 받는다고 했던가.
아무튼, 과거보다 훨씬 더 태도가 공손해졌다.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만.’
조사관 너구리, 그와의 대화는 성공적이었다.
관리자들은 나를 지원하기로 약속했고, 세계수를 이 세계에서 영원히 축출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그 이후에는 차원의 안정화에 서로 최선을 다한다는 조건이었다.
‘일이 끝날 때까지 근원은 내가 가지고 있기로 했으니까. 당장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없고.’
차원의 안정화.
그건 딱히 복잡하거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근원을 한곳에 모아서 차원에 귀속시키는 것.
그렇게 하면 판게아와 마계의 생명체들이 다시금 자신의 초월자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즉, 토끼녀가 사고를 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거다.
“저 그런데. 어째서 상태창은 그냥 두시기로 하신 겁니까?”
강아지남은 내 눈치를 보면서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정식으로 관리자와 손을 잡은 뒤, 조사관은 나에게 장착된 상태창을 개선해 주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대로 둬도 돼. 어차피 근원을 손에 얻은 마당에 무슨 소용이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저들이 내 깊숙한 곳을 건드는 게 싫었다.
최소한 세계수가 정리되기 전까지는 경계하는 편이 좋겠지.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됐으니까, 저번처럼 실수나 하지 마. 너희들이 잘못된 정보를 알려 줘서 죽을 뻔했었잖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더욱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아지남은 다시금 허리를 접으며 본인의 잘못을 인정했다.
‘말뿐인 사과라 딱히 의미는 없지만.’
물론, 관리자들이 약속을 어길 이유는 없다.
나를 이곳에 끌어들인 목적을 이뤄 준 다음에 다시 돌려보내 주면 되니까.
하지만 여태까지 내가 겪은 일 때문인지, 이놈들을 믿어 주는 게 쉽지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너희들이 해 줄 일은 간단해. 나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무조건 지시에 따라 행동해야 해. 알겠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은 언제나 똑 부러지네.
저 말대로 결과가 나와 준다면 얼마나 좋겠어.
어찌 되었든 전권은 나에게 일임되었고, 작전의 기획부터 실행까지 모든 결단을 내가 내리게 되었다.
‘일단 준비를 마치고 계획을 시작해야겠지만.’
이대로 세계수에 맞서는 건 위험하다.
저쪽도 남몰래 갈고 닦은 비장의 기술이 있을지도 모를 일. 가능한 근원의 숙련도를 올린 다음에 싸움을 걸어야 했다.
맞다. 강아지남에게 물어볼 게 있었지.
“참, 네가 예전에 토끼녀가 세계수와 협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예, 기억납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었죠.”
“근데 그거 사실이었어?”
“아뇨. 저희의 기술로 선배의 기억을 읽었지만 세계수와 협력했다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둘은 따로 만나고 있었잖아. 나도 그건 알고 있었다고.”
“단둘이 대화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일종의 견제였습니다.”
강아지남이 말하길.
세계수와 토끼녀는 만나기만 하면 전투에 가까운 싸움이 일어났다고 했다.
비밀리에 둘이서 이야기한 건 일종의 담합.
서로의 약점을 말하지 않고, 공평하게 실력만으로 경쟁하자고 합의를 맺은 것이다.
‘그냥 멍청한 쓰레기였잖아.’
잠시만?
진실이 그렇다는 건 강아지남의 이야기가 틀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웃고 있었다.
마치 의도한 상황이었다는 듯이 아주 음흉하게.
“설령 배신하지 않았다고 해도 별로 상관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선배는 처벌을 받았을 테니까요.”
“너, 되게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래,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행정 업무를 도와주도록 해.”
“예,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강아지남은 당분간 대종족 의회에서 지낼 계획이었다.
너구리와 나를 잇는 중간 다리, 토끼녀가 하던 역할을 일부 옮겨 받은 셈이었다.
음흉하고 무서운 놈이 자리를 떠난 뒤, 나는 불그스름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관리자들과는 담판을 냈으니,’
그전에 근원에 최대한 익숙해져야 할 터.
천천히 생각해보니 효율적으로 힘을 단련할 방법은 가까이에 있었다.
니플헤임, 스티지아, 림보. 이 3곳에 남아 있는 마족들의 잔당은 훌륭한 허수아비가 아닌가?
‘이참에 청소해 놔야겠네.’
* * *
며칠 뒤.
대종족 의회의 하루는 아주 평화로웠다.
노동자들은 일터로, 아이들은 간이 교육소로, 군인들은 감시 초소와 훈련장으로.
모두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정해진 일과를 시작하던 참이었다.
“이번에도 혼자 간다고?”
데모니움 본성의 작은 후원.
나는 시원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클리프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들었다.
당연히 그 옆에는 스칼렛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카, 클리프의 말이 맞아. 이제는 혼자 다닐 필요 없잖아?”
“가서 마계를 정복하겠다는 말이 아니잖아. 로시난테랑 함께 가는 거기도 하고.”
“정 그렇다면야. 내가 너를 어떻게 말리겠니.”
“루카, 조심해야 해. 알겠지?”
클리프와 스칼렛은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사실, 두 녀석도 나의 안전을 위해서 말리는 게 아니었다.
혼자서 고생하지 말고 일을 나눠서 함께 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면 외부에 들킬 위험이 크지.’
이왕이면 내가 자리를 비웠다는 소문이 나지 않는 게 좋다.
그렇기에 저 둘을 제외한 어떤 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뭐, 그만큼 빨리 일을 끝내고 올 계획이기도 하니.
“하루에서 이틀이면 충분해. 만약 더 오래 걸리면 단주님이나 종족 대표들에게만 말해 줘.”
“그래, 알았다. 잘 갔다 와.”
“가는 길에 내가 싸 준 도시락도 꼭 먹고!”
나는 손을 흔들며 로시난테 위에 올라탔다.
두 사람은 잘 돌아오라며 나를 배웅했고, 동시에 하얀 말이 땅을 박차고 높이 솟아올랐다.
처음 목표는 스티지아. 이유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번쩍!
새하얀 빛과 함께 풍경이 뒤로 밀려났다.
나는 편안하게 자세를 잡고 스칼렛이 손수 싸 줬다는 아침 식사를 펼쳤다.
직접 준비했다고 말했지만, 도시락을 열어 보니 그 말은 반쯤 거짓이었다.
‘요리에 개성이 넘치네.’
손바닥보다 살짝 큰 도시락.
그 안에는 여러 요리가 잔뜩 들어 있었다.
보기 좋게 잘 만들어진 것부터 무슨 요리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부류까지.
정말 다양해서 굳이 먹고 싶지 않은 건 안 먹어도 될 정도였다.
“지금부터 밥 먹을 거니까, 조심해서 움직여.”
“히힝.”
나는 포크를 들고 음식에 집중했다.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모양이 이상한 음식도 재료와 요리법 덕분에 맛은 정말 훌륭했다.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이후, 우리는 대략 몇 시간 정도를 날아간 끝에 스티지아 경계에 다다를 수 있었다.
넓은 숲.
두 영지는 침엽수로 이루어진 숲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었다.
스티지아 영지 안으로는 들어가 본 기억이 없다.
그도 그럴 게, 바신은 밖에서 객사해 버렸고 그 뒤로는 발라크와 동맹을 맺었으니.
“안으로 들어가자. 본성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
“히힝!”
로시난테는 속도를 유지하며 영지 안으로 들어갔다.
기감에 걸리는 마족들의 숫자는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대종족 의회에 위협이 될 고위 마족 이상의 실력자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본성으로 가 보면 뭐라도 알겠지.’
험준한 산과 숲으로 이루어진 스티지아 영지.
애당초 마계는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편이지만, 이곳은 다른 영지보다도 더 심했다.
아, 니플헤임은 빼고. 거기는 완전히 자연 그대로니까.
“푸르르.”
하얀 말은 소리를 내며 작은 성을 가리켰다.
로시난테는 바신의 키메라, 이 녀석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스티지아의 본성이었다.
그래서 딱히 부탁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이곳까지 태워 주었다.
“안전하게 하늘에 있어.”
스릉.
나는 무명을 뽑으며 말 등 위에서 뛰어내렸다.
스티지아 본성은 한 영지의 중심이라 하기에는 그 크기가 아주 작았다.
일반적인 요새보다 살짝 큰 정도. 내부에 거주하는 마족의 숫자도 몇천을 넘지 않았다.
다만 나중에 대종족 의회의 성으로 쓰일 가능성이 크니, 마구 부셔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검술보다는 오류가 낫겠지?’
무명에 4가지 기운을 쑤셔 넣자.
칠흑의 칼날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면서 칼자루만 공허하게 남았다.
최소한 일반인의 눈으로는 그리 보일 터.
이어서 나는 본성 안으로 착지하며 칼자루를 마음껏 휘둘렀다.
쉬익, 쉭, 샥.
마족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본성 한복판에서 정교한 칼춤이 펼쳐졌다.
이제는 몸에 스며들어 버린 그림자 검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칼자루에서 튀어나온 무형의 기운은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자르고 갈라 버렸다.
“커헉!”
“으아아악!”
“내 다리가, 다리가!”
사방에서 마족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팔이나 다리를 잃은 마족들은 비명을 마구 질러댔고, 조용해진 마족들은 몸이 분리되어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런 난장판 속에서도 본성의 벽이나 건물은 멀쩡했다.
‘이런 기능이 은근히 쓸모가 있네.’
무명이 성장하며 오류에는 한 가지 기능이 더해졌다.
이제는 마구잡이로 베고 다니는 게 아닌, 목표를 정해서 원하는 상대만 벨 수 있게 되었다.
오류의 길이도 이전보다 수십 배는 길어져 굉장히 실용적으로 변했다.
‘강한 놈들은 전부 죽었고.’
나는 침묵이 내려앉은 본성을 돌아다녔다.
마구 뛰어다니며 검무를 춘 탓에 주위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한 마족과 눈이 마주쳤다.
“다, 당신은!”
치명상을 입은 고위 마족급의 인마족은 내 얼굴을 보고서 화들짝 놀랐다.
“나를 아는 모양이네.”
“알다마다요. 노예들을 이끄는 인간이 아닙니까?”
“잘 안다면 다행이지.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네가 대답해 줄래?”
“……모두 말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 주세요.”
인마족은 그래도 말이 통하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낮추며 첫 질문을 던졌다.
“프린지는 어디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