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84화 (184/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84화>

184. 불청객 (4)

후웅.

나는 집무실 창문을 열고 허공에 몸을 맡겼다.

중력을 무시한 채, 내 몸은 공중을 꿰뚫고 작은 숲을 향해 나아갔다.

본성에서 숲까지 걸린 시간은 단 몇 초 정도면 충분했다.

‘어째서 인기척이 3명이나 느껴지는 거지?’

차원에 균열을 만들어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존재들.

여기로 넘어오고 있는 3명 중 둘의 인기척은 내가 익히 아는 자들이었다.

문제는 나머지 하나. 특별히 경계할 요소가 감지되는 건 아니지만 밀입국자는 무조건 사양이다.

나는 [통달한 자]의 눈으로 그들이 빠져나올 출구를 찾아내 가까이 다가갔다.

슈우우.

근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주변을 에워쌌다.

이 공간은 이제 나의 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적을 죽이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이 시공간 자체를 온전히 나의 바람대로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공간을 노려보았다.

동시에 근원의 기류가 금이 생기고 조각난 차원의 벽을 메꿔 나갔다.

시멘트를 바르는 것처럼 꼼꼼히 말이다.

‘됐다.’

마계로 넘어오려던 밀입국자들의 계획은 실패했다.

관리자들이 만들어 낸 통로의 출구를 막아 버렸으니, 여기로 오지 못하고 되돌아갔을 터.

시험 삼아서 시도해 본 건데 의외로 결과가 괜찮았다.

이러니 관리자들이 림보 영지나 판게아에 나타나기 싫었던 거겠지.

즈으으.

또다시 생긴 차원의 균열.

이번에도 기감에 잡히는 인기척은 셋이었다.

경고를 주는 의미에서 나는 다시금 균열의 틈을 메워 버렸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내 뜻을 이해했는지 차원 내부로 들어오려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하나.

감각에 걸린 존재감은 한 명이었고 강아지남과 기운이 똑같았다.

나는 방해 공작을 그만두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이왕이면 관리자들과 함께 장밋빛 미래를 그려 볼 생각이었지만, 쉽게 속단하기는 어려웠으니까.

뒤이어 차원 벽이 허물어지며 안에서 강아지 형태의 생물이 튀어나왔다.

“여태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모르는 사람을 데려와? 이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는데.”

“그게, 죄송합니다. 워낙 일이 바쁘게 돌아가서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변명은 됐어, 이제야 온 이유부터 말해 봐.”

나는 일부러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물었다.

이제는 근원이 없던 찌질이가 아니라, 마계의 모든 근원을 소유한 초월자 후보가 되었다.

저들이 정보를 숨기고 통제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선 토끼 선배가 구속되셨습니다.”

“구속?”

“예, 혐의는 배임과 직권 남용. 그리고…….”

“아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라. 내가 묻고 싶은 건 네가 찌른 게 아니냐는 거지.”

과거에 나는 이와 관련된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강아지남은 본인들이 알리지 않는 한 당분간은 상부에 들킬 일이 없을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토끼녀가 잡혀갔다면?

정확한 전후 사정은 몰라도, 내부 고발이 굉장히 의심되는 상황이리라.

“맞습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강아지남은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보고 토끼녀에게 일을 더 시키라고 말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내가 푸르카스를 상대하러 떠났을 무렵, 강아지남은 오래도록 날카롭게 갈았던 칼날을 토끼녀에게 사용한 것이었다.

“기분은 상쾌한가 보네.”

“예, 김만득 씨가 선배를 죽도록 부려먹어 주신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뭔가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흠흠, 죄송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저와 김만득 씨에게 도움이 될 일이라는 것이죠.”

“그래? 네 계획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말해 봐.”

우리에게.

나는 그 부분을 유독 강조하며 강아지남의 대답을 기다렸다.

상대는 나와 상의하지 않고 일을 벌였다. 간접적으로 나를 속인 셈.

여기서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 사이의 우정이 많이 손상되는 게 당연했다.

“토끼 선배는 상부와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건 기억하시죠?”

“듣기는 했지.”

“이번에 선배가 구속되며 상부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김만득 씨에 관한 일도요.”

“뭐라고 대답하던데?”

“공식적으로 협력을 요청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아지남은 그 이후로도 몇 가지 말을 보탰다.

많은 정보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지만, 제일 중요한 내용은 따로 있었다.

우선 조사관이라는 사람이 새로 오게 되었다는 것.

그는 상부에서 파견된 새로운 관리자가 앞으로 나를 도와줄 예정이라고 말했다

“네 말대로라면, 차원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머지 하나는 상부 쪽 사람이겠네.”

“그렇습니다. 조사관님께서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소리인지는 잘 알겠어.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예, 말씀하시죠.”

“세계수가 여기서 근원을 사용했어. 너희는 사용하지 못할 거라고 했잖아. 근데 세계수는 마계에서 근원을 쓰던데?”

강아지남은 내 말을 듣더니 살짝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예상 밖이군요. 저희가 수집한 세계수의 정보에는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근거로 확신했던 거야?”

“근원의 힘은 무궁무진합니다. 저희가 확답했던 건 여태까지 세계수가 마계에서 근원을 사용한 이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뭐, 그냥 사용했던 건 아니야. 엘프의 목숨을 희생해서 억지로 펼쳤거든.”

“그런 방식은 처음 있는 일이군요……. 일단 기록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본인들이 실수라는데 뭐 어떻게 하겠나.

애당초 저들의 정보가 항상 100% 적중한 것도 아니었다.

일단은 더 지켜보면서 확인해야겠지.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사관이라는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눠 볼 테니. 여기로 데려와.”

* * *

몇 분 뒤.

나는 강아지남과 토끼녀, 거기에 작고 귀여운 동물 친구를 새로 만났다.

여기가 무슨 ‘모여요, 동물의 숲’도 아니고.

어째 관리자라는 놈들은 생긴 게 전부 짐승 새끼 같은지 모르겠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일의 조사관으로 발령 난 너구리라고 합니다.”

“어, 으음.”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상부에서 파견된 조사관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왼쪽에는 강아지남이 서 있었고, 오른쪽에는 목줄에 매인 토끼녀가 머리를 푹 숙인 채로 묵비권을 행사 중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커다란 토끼 한 마리를 가리켰다.

“말은 편하게 할게. 그보다 얘는 왜 이렇게 데려온 거야?”

“목줄 말입니까? 이건 저희가 죄인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는 도구입니다. 별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음, 너희가 그렇다면야.”

목줄에 묶인 토끼.

이건 죄인이라기보다는 암만 봐도 애완용 토끼와 산책을 나온 느낌이다.

나는 이런 의문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 밀어 버리고 중요한 사안에 집중했다.

“강아지남에게 대충 듣기는 했어.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이라며?”

“네, 그렇습니다. 이번 사건이 크게 번지기 전에 알게 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닌가 보네.”

“……아무래도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너구리는 대답하며 목줄을 살짝 잡아당겼다.

조용히 잡혀있던 토끼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가만히 있을 뿐.

정말로 죄악이 낱낱이 밝혀지기는 한 건지, 꼼짝없이 잡혀있는 모습이었다.

“해결이라고 했으니. 어떤 방식으로 할 건지 듣고 싶은데.”

“저희의 목적은 차원의 안정입니다. 질서를 어지럽히고 차원 외부로 번질 모든 요소를 정리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 요소에 나도 들어가고?”

“아뇨, 그건 확실히 아닙니다.”

너구리는 단호한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관리자는 반드시 나와 협력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약간의 협박을 가미했던 세계수와 비교하면 말투 자체는 호의적인 편.

나는 더 이야기를 해 보라는 듯 가만히 상대의 입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희의 목표는 세계수를 제거하는 겁니다. 그녀는 너무 욕심이 과했으니까요.”

“왠지 거슬리니까 죽여 버리겠다는 말투 같은데. 그럴 거면 모든 초월자를 다 죽여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정말 오해이십니다. 저희는 초월자들과 협력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권위도 인정하고 때때로 도움을 주기도 하죠.”

너구리는 아주 진지한 태도로 말을 쏟아냈다.

뭐, 각자 처한 환경이 다르니 무조건 대화로만 해결할 수는 없는 법.

나는 초월자와 관리자의 입장을 이해하며 말을 이었다.

“좋아. 어쨌든 세계수의 목표에는 나도 들어가니까. 너희가 도와준다면 나도 거들게.”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저와 강이지가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그럼, 얘는?”

내가 토끼녀를 가리키자 너구리는 곧바로 답을 내주었다.

“자격 박탈이죠. 여기 있는 강아지남은 범죄를 도왔지만, 자수하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다 거짓말이에요! 강아지남도 실수를 들키는 게 두려워 앞장서서 도왔다고요!”

“아직도 죄를 뉘우치지 않는군. 어차피 자네의 해고는 기정사실이네. 조용히 우리의 지시에 따르도록.”

너구리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토끼녀를 압박했다.

물론, 나에게는 귀여운 소동물들이 씩씩거리는 정도로 보였지만.

“죄송합니다. 워낙 큰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라 정중하게 대하기 힘듭니다.”

“괜찮아. 나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거든.”

“다행이군요. 김만득 씨께서 괜찮으시다면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너구리는 나와 두 관리자 사이에 있던 일들을 캐물었다.

어쩌다가 끌려온 건지, 어디 출신인지, 이후에 둘에게 받은 대우가 어땠는지.

무슨 사업장 실태 조사라도 나온 것처럼 직원의 태도와 관련된 질문이 많았다.

나는 납치된 경위와 그다음의 일들을 모두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됐습니다. 이만하면 보고서에 충분히 올릴 수 있겠군요.”

“근데, 이게 무슨 질문이야? 이놈들의 태도라느니, 대우가 어땠는지. 그런 게 왜 필요한데?”

“아, 그 설명이 빠졌군요. 사실 저희는 관리 중인 차원에서 문제가 생기면 다른 차원에서 사람들을 빌려오기도 합니다. 호칭은 주로 용사님을 사용하죠.”

“잠시만. 뭐?”

“용사님이요. 다른 초월자들과 협력해서 해당 차원의 여러 무기와 능력을 지원해 드리기도 합니다.”

철컥.

너구리의 말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마공학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저 조사관의 말대로라면 다른 놈들은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 성장한다는 거잖아?

나는 버스는커녕 면허도 못 딴 상태에서 운전대부터 잡았는데 말이야.

“그런데 나는 왜 혜택을 받지 못한 거지?”

“이 죄인에게 불법적으로 고용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들으니 더는 참기 어려웠다.

저 가증스러운 하얀색 뒤통수에 당장 오러탄을 박아 주고 싶었다.

나의 표정을 본 강아지남은 서둘러 토끼녀의 몸을 붙잡았다.

“쏘시죠. 제가 잘 잡아 드리겠습니다.”

“아아악! 이거 놔!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열 받네.

솔직히 말하면 둘 다 꼬치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총을 집어넣고 너구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굳이 분노에 휩싸여 폭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조사관에게 보여 주기는 싫었으니까.

“다 됐고. 나한테 세계수를 쓰러트릴 방법이 있어.”

“그건 저희와 차차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아니, 당장 여기서 답을 내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여태까지 겪은 게 있는데 너희의 말만 믿을 순 없잖아.”

“그 부분은 책임자로서 정말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안하다면 내 작전대로 움직여. 그게 가장 진정성 있는 사과야.”

나는 분노를 영양분으로 삼아 분위기를 압도했다.

어차피 근원을 손에 쥔 이상, 협상의 주도권은 무조건 나에게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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