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83화 (183/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83화>

183. 불청객 (3)

영지로 귀환한 이후.

정말 쉴 틈도 없이 업무란 이름의 무한 지옥에 시달렸다.

대동맹 측에서 방문한 사절단과 이야기를 나누고, 늦은 시간까지 잉크가 마르도록 서명을 해야 했다.

그렇게 밀린 일들을 얼추 매듭지은 뒤에야 비로소 자유의 공기를 맛볼 수 있었다.

데모니움 본성 인근의 작은 숲.

나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장소에 홀로 서 있었다.

이제는 내 개인 수련장이 되어버린 장소. 이곳에서의 단련은 항상 비슷했으나 요즘에는 조금 변화가 생겼다.

검술, 사격, 주술을 거쳐 오류 수련까지 끝냈을 무렵.

“이제 해 볼까.”

나는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을 닦아 내고 눈을 감았다.

두 손에는 무명이나 리볼버를 들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주위의 바람과 냄새, 그리고 소리에 집중하며 완전히 자연에 녹아들 뿐이었다.

슈우우.

내 몸의 표면을 따라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물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것과 비슷한 기분.

기체보다는 묵직하고 액체보다는 가벼운 느낌의 무언가가 몸 전체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실제로 질량이 있는 건 아니지만, 오류와는 다르게 이 기운은 뭔가 묵직한 감각을 주었다.

근원.

초월자의 힘은 기본적인 4개의 기운과는 확실히 달랐다.

심지어 ‘오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오류가 모든 걸 부정한다면, 반대로 근원은 세상을 포용하고 이용하려 한다.

‘대부분 별로 쓸모가 없는 데다가 다루기도 힘든 게 문제지만.’

이 힘은 굉장히 복잡하고 민감하다.

오류처럼 대충 들고 쑤시거나 베면 되는 게 아니다.

어느 사이비 집단의 교리처럼 나를 비우고 완전히 자연에 몸을 맡겨야 한다.

‘집중하면 10m, 안 하면 7m 정도네.’

근원을 이해할수록 운용 가능한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다만 그건 기본에 불과하다.

어떻게든 이 힘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내야 할 터.

확실한 건 몇 개월 정도 수련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포터.

결국,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마구잡이로 섞는 것이다.

결사단의 검술이나 마공학 리볼버를 사용할 때, 근원이 있다면 더 놀라운 일을 만들 수 있다.

지금은 그게 최선이리라.

철컥.

나는 마공학 리볼버를 꺼내고 오러를 장전했다.

모든 약실에 장전이 된 리볼버의 총구는 정면에 서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이어서 방아쇠를 당겨 내용물을 모두 쏟아 냈다.

피피핑!

검붉은 빛줄기.

거의 동시에 발사된 오러탄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공중에 멈춰 섰다.

제아무리 총알처럼 빠르다고 한들, 탄환이 지나가는 공간의 시간을 멈췄으니 움직일 수 있겠는가.

이처럼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생각한 대로 되기는 하네.’

핑! 핑! 핑!

검붉은 실선이 연달아 허공을 가로질렀다.

나는 오러탄에 초월자의 힘을 더하며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았다.

탄환을 강제로 이동시키거나, 공간을 왜곡시켜 여러 탄환이 중첩되도록 만들거나.

다양한 시도를 통해 쓸 만한 조합법을 몇 개 찾아낼 수 있었다.

“일단 여기까지.”

수련 시간이 벌써 12시간을 넘겼다.

나는 머리도 식힐 겸 리볼버를 집어넣고서 근처에 있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았다.

자유 시간을 모조리 근원 수련에 쏟아부어도 성장이 더디니 살짝 답답하기는 했다.

스승이고 뭐고, 주위에서 근원에 대해 조언해 줄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 터.

뭐, 이걸 다루는 사람이 많다면 그게 더 문제겠지.

휘이이.

시원한 바람 소리.

숲속을 헤매던 바람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가만히 지난날의 일들을 떠올리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편하게 휴식을 취한 적이 언제였더라?

돌이켜보면, 판게아로 납치되고부터는 완전히 마음의 긴장을 풀었던 적이 없었다.

‘이 일이 끝나면 좀 느긋하게 쉬어야지.’

이런 말조차 사망 플래그를 세우는 게 아닐까.

약간의 불안감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해졌음에도 여전히 불안함을 내 뒤를 쫓아다녔다.

물론, 계속 더 강한 적이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세계수.

나는 초월자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아마도 그 식물과는 동료나 동맹으로 남기 힘들겠지.

상대의 목적은 마계와 판게아를 손에 넣어 관리자들과 싸우는 것.

그런 초월자의 앞길에 하나의 돌부리가 남았다. 마신의 힘을 거머쥔 내가 마지막 장애물인 셈이다.

만약 내가 관리자와 합심해서 맞선다면?

잘은 몰라도 상대에게는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세계수가 마계에서 나를 죽인 뒤에 근원을 취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마신의 힘을 손에 얻었고, 동시에 오류라는 불가사의한 힘까지 가지고 있으니.

아마 동맹을 맺고 싶다는 세계수의 뜻은 어느 정도 진심일 것이다.

‘그 진심이 다소 과격하기는 했지만.’

유리엘, 세계수는 자신의 부하를 그냥 내주었다.

다른 방식으로 내 행동을 지켜볼 자신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도 해 보았지만, 프레스턴을 비롯해 여러 세력이 보내 주는 정보에는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긴 하지.’

초월자는 본인을 따르는 숭배자를 절대 막 다룰 수 없다.

단순히 도덕성의 문제가 아닌, 실질적으로 본인에게 안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근원의 정체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근원이란 무엇인가?

새로 배달된 택배 상자를 뜯는 것처럼.

나는 1달이 조금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이 기이한 힘을 뜯어보았다.

어디에서 시작된 힘이고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가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아직 깊이의 끝은 감도 안 잡히지만, 적어도 근원의 정체가 뭔지는 대강이나마 파악이 되었다.

슈우우.

정신을 집중하자 내 앞에 동글동글한 형상들이 나타났다.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여덟 개의 구슬. 이것들은 마신과 그가 죽인 다른 신들의 근원이었다.

이들을 살펴본 결과, 근원의 힘이 무엇을 통해 강해지는지 이번에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숭배자들.

근원의 핵심은 그들의 염원이 모여 만들어진다.

즉, 세계수의 궁극적인 힘은 엘프들에게서 나온다는 이야기.

그런 의미에서 유리엘 제사장의 목숨을 버린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몇천 년을 엘프들 위에서 군림했으니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걸지도.

‘잘만하면 이게 세계수의 약점이 될지도 모르겠어.’

초월자와 숭배자는 신뢰를 통해 관계가 이어진다.

만약 엘프들이 세계수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어떻게 될지.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리며 천천히 나무 그루터기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무명에 근원을 사용해 볼까.”

능력의 가짓수가 너무 많든, 이해하는 게 어렵든.

근원은 나의 선택으로 쟁취한 보상이자 무기다. 하는 거 없이 투덜대며 앉아 있을 시간은 없다.

어떻게든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 할 터.

스릉.

나는 무명을 뽑고 몸에 깃든 근원의 기류를 불러일으켰다.

* * *

데모니움 본성의 집무실.

나와 깨비, 그리고 스칼렛은 탁자에 모여 앉았다.

마족들과 대동맹의 최근 행보가 우리가 모인 이유였다.

대화의 포문을 연 사람은 깨비였다.

“마족들은 여전히 조용합니다. 별다른 활동이나 움직임이 없습니다.”

깨비는 살짝 어눌한 영어를 사용하며 보고서를 건넸다.

국경 요새에서 적의 동태를 기록한 문서에는 정말로 특이 사항이 없었다.

“저번에 찔러보라고 했던 건?”

“그게, 스티지아 쪽의 요새를 산포와 소총으로 공격하자 금방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상하네.”

내가 진지한 얼굴로 턱에 손을 갖다 대자, 스칼렛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물었다.

“뭐가 이상한데? 공격해서 요새를 빼앗은 거면 잘한 거잖아.”

“아, 너는 잘 몰랐겠지만. 마족의 요새를 공격한 병력은 500명이 안 되거든.”

일개 대대급 병력.

그만한 병력이라면 마족들이 쉽게 요새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되려 본인들이 반격에 나설 정도.

“그래서 접수한 요새는 어떻게 했어?”

“일단 식량과 무기를 보관하던 창고에 불을 지르고 퇴각했습니다.”

“잘했어. 굳이 점령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우리의 영토는 지나치게 넓다.

너무 거대한 나머지 놀고 있는 땅이 더 많았다.

스티지아 영지는 일단 차지하면 나중에 좋기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외부 확장보다는 내실이 더 중요하다.

“루카, 마족들을 그냥 둬도 되는 거야?”

깨비의 보고를 전부 들은 스칼렛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신이야 발라크가 먼저 했다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와 마족들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놈들이 병력을 추스른다면 당연히 대종족 의회를 공격할 터.

이대로 느긋하게 상황을 관망해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당연히 안 되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발목을 잡을 놈들인데.”

무엇보다 림보 영지는 우리가 차지해야 할 땅이니까.

네크베르 사막은 와제트 족의 고향.

시간이 지나면 응당 우리가 가져와야 하는 곳이었다.

“마족들을 몰아내고 영토를 넓혀야 하는 건 맞지만. 지금은 섣불리 병력을 이끌고 나갈 수 없어.”

“예, 아가씨. 주군의 말씀대로 지금은 조금 힘듭니다.”

이번 전쟁에서 대종족 의회의 희생은 컸다.

스칼렛의 능력 덕분에 많은 부상자를 죽음에서 구해 냈으나 죽거나 불구가 된 자들도 꽤 많았으니.

굳이 그게 아니어도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군대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건 나도 아는데. 갑자기 습격이라도 당할까 봐 그러지.”

“걱정하지 마. 마족 놈들은 우리를 절대 우리를 공격할 상황이 아니거든.”

“그런가? 악마들도 몇 명은 아직 남아 있잖아.”

“라일라크나 프린지는 살아 있을 수도 있겠지.”

정상은 아니겠지만.

나는 빙긋 웃으며 림보 영지에 두고 온 생물체를 떠올렸다.

파멸용의 의지를 이어받은 키메라, 슬쩍 라일라크에게 던져 준 이후로 그것에 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라일라크에게 화염을 쏟아 내는 것까지는 봤는데 말이야.’

그때는 워낙 바빠서 죽음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근원을 얻은 뒤에 림보 영지를 거쳐 갈 무렵에는 둘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예감 상으로는 키메라가 라일라크를 죽이고 떠났을 것 같은데.

정확한 사실은 확인을 해 봐야 알 수 있겠지.

“뭐, 살아서 여기로 와 주면 고마운 일이지. 안 그래?”

“맞아. 우리가 모르는 곳에 있는 것보다 더 확실하니까.”

스칼렛은 내 대답에 동의하며 웃었고, 깨비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근원을 통해 더욱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되었고, 이제는 대종족 의회의 영토 전체를 완전히 아우른다.

적이 이곳으로 쳐들어온다면 당장 로시난테를 타고 출동하면 될 터.

“그럼, 다음으로 대동맹은?”

“편지를 받았는데 큰 이변은 없었대. 아직 림보 영지 문제로 떠들썩한가 봐.”

“나에 대한 말은 안 나왔고?”

“응. 모두 공식적인 자리보다는 뒤에서 말을 나누고 있다고 했어.”

“대놓고 의회만 공격하지 않으면 된 거지.”

시타델, 핑거톤, 록펠스. 결사단.

4곳에서 전해 주는 정보가 모두 같다.

나는 각 세력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정보를 받아 비교해 보았다.

다행히도 아직은 거짓말을 하는 곳은 없었다.

‘혹시 세계수에게 넘어가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몇 분간 대화를 주고받은 뒤.

스칼렛과 깨비는 집무실을 나가 각자가 맡은 일을 하러 떠났다.

당연히 나도 테이블에 쌓여 있는 문서들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로 걸어갔다.

‘다른 곳은 몰라도, 마족들은 조만간 손을 봐야겠어.’

대동맹과 세계수는 당장 섣불리 행동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최우선 목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은 마족.

무엇보다 초월자를 상대하려면 관리자들과의 협력이 필수니, 지금은 혼자서 움직이기도 부담스러웠다.

그 순간.

대종족 의회의 영토로 발을 들이미는 기운이 느껴졌다.

인원은 총 3명, 숫자만 본다면 그리 긴장할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감각에 걸린 침입자의 위치였다.

본성 근처의 작은 숲.

강아지남이 나와 주로 대화를 나누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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