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81화>
181. 불청객 (1)
“단주님! 클리프!”
우리가 하늘에서 내려오자.
스칼렛은 흙먼지로 범벅이 된 채로 달려오며 하나씩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펠리스와 클리프의 얼굴을 살핀 그녀는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루카까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모두 네 덕분이지. 우리가 없는 동안 고생 많았어.”
나는 붉은 머리카락에 붙은 이물질을 떼어 주었다.
스칼렛은 내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배시시 웃었다.
정말로 끝났구나. 무사히 귀환해서 스칼렛을 만나니 우리의 승리가 더욱 실감이 되었다.
“스칼렛, 근데 어째 사람 숫자가 더 늘어난 느낌인데?”
나와 스칼렛이 해우를 만끽하던 사이.
클리프는 근처의 머릿수를 세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하늘에서 보았을 때부터 이상하기는 했지. 군대의 인원은 척 보기에도 그 수가 늘어나 있었다.
“응, 원래 마족들에게 잡혀 있던 사람들이야. 지금은 모두 풀려났고.”
스칼렛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종족 의회는 열정의 악마라는 놈이 이끄는 군대와 맞서 싸웠다.
병력 대부분은 세뇌된 비마족 노예들, 마족들은 그들을 방패로 내밀며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마족들이 제대로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비겁하게 비마족 사이에 껴서 우리를 습격했다니까!”
어째 말하는 속도랑 목소리가 점점 커지네.
스칼렛이 말하길, 악마 살비스가 직접 나섰던 순간이 가장 위기였다고 말했다.
물론, 로빈 공작과 스칼렛의 협공으로 지금은 사막에 묻혀 버렸지만.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로빈 공작께서 마법으로 막! 이렇게 막!”
“설명하는 건 좋은데, 천천히 숨 좀 쉬면서 말해.”
“아, 응? 미안. 내가 갑자기 너무 흥분했지.”
쓰읍, 휴.
스칼렛은 깊게 숨을 들이 내쉬며 잔뜩 올라간 어깨를 아래로 내렸다.
어찌 되었든 마족들의 공격을 잘 버텨 냈다는 이야기였다.
이번 전쟁은 가장 험난하고 위험한 일이었다. 어찌 보면 상당히 무모하기도 하고.
나는 기회가 생긴 김에 가장 어려운 일을 맡아 준 세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다들 나를 믿고 따라줘서 정말 고마워. 단주님도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당연한 일이다. 그보다 무명의 상태가 심상치 않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것이냐?”
목숨을 거는 일쯤이야.
펠리스는 되려 수련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도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진 무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아, 이번에 푸르카스와 싸우며 좀 변했어요. 성장했다고 해야 할까요?”
“성장?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구나.”
“저도 최근에 안 사실이에요.”
무명에 관한 진실.
펠리스는 요약한 정보를 듣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초대 결사단주가 제작한 검, 다른 결사단주의 신념이 깃들어있다는 말을 듣자 그녀의 얼굴에 깃든 기운은 더욱 무거워졌다.
“흠. 어지간하면 사후에 무명을 반납하도록 권유하려 했는데. 이러면 힘들겠구나.”
“어쩐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더라니. 그런 생각을 가지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네가 죽은 뒤에는 결사단에 귀속시켰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사라진 다음?
대대로 이 검을 물려줄 생각은 없다.
갈등의 조짐이 되도록 내버려 두느니,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게 좋을 터.
다만 펠리스의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고맙긴 하다만. 그걸 받는다고 해도 사용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아, 그렇긴 하죠.”
유일.
무명이 성장하며 새롭게 바뀐 등급이었다.
판게아를 한창 플레이했을 때,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신화급 아이템을 잠시 빌려 쓸 수는 있었다.
그러나 유일 등급은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이템 설명란도 완전히 맛이 갔고.’
기이한 문자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설명란.
무명이 오류를 통해 성장하자, 시스템은 아이템에 대한 해석을 전혀 내놓지 못했다.
즉, 무명에는 관리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
이걸 판게아의 사람들에게 물려주어도 과연 쓸 수나 있을까.
“혹시 원하시면 한번 다뤄 보실래요?”
“그래도 되겠느냐?”
“만약 단주님이 사용하실 수 있다면 미련 없이 반환하겠습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요.”
“알겠다.”
“조심하세요.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펠리스는 오류 덩어리가 된 무명에 거침없이 손을 갖다 댔다.
이걸 말리크나 다른 장로들이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분명 절대 안 된다며 말렸겠지. 그만큼 펠리스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달그락, 스릉.
펠리스는 무명을 들고 검집에서 뽑아냈다.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칠흑의 칼날, 무기가 더욱 성장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독 더 빛나 보였다.
나의 우려가 무색하게 펠리스는 평범하게 무명을 들고 휘둘렀다.
“역시 검귀 사조께서 쓰시던 검이라 다르구나.”
펠리스는 간단히 평을 내리고 검을 돌려주었다.
아무래도 오류에 절여졌다고 통째로 근본이 바뀌지는 않는 모양.
그녀는 뭔가 아쉽다는 눈빛으로 무명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어.”
“문제가 뭡니까?”
“내 오러가 주입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너에게 맞춰진 모양이구나.”
“그러면 나중에 마음 내키면 반납하도록 할게요. 그래도 되죠?”
“……마음대로 하거라.”
펠리스는 관심을 거두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목숨을 건 테스트를 끝낸 뒤. 우리는 병사들이 있는 장소에서 벗어나 지휘부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군!”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지휘부 막사에 있던 깨비와 에버딘은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반겼다.
땀과 피로 범벅이 된 갑옷, 둘은 더러워진 의복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부대를 돌보고 있었다.
“나야 멀쩡하지. 너희는……, 말하지 않아도 고생한 흔적이 훤히 보이네. 다들 정말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사실 저희는 별로 한 일이 없어서 부끄럽습니다.”
“맞아요. 저희는 아가씨를 곁에서 거들어드린 게 전부거든요.”
깨비와 에버딘의 눈동자는 스칼렛을 가리켰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호기심을 갖고 쳐다보자 스칼렛은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 그냥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줬을 뿐이거든.”
“스칼렛, 왠지 조금 재수 없다?”
클리프는 뇌에서 단어를 정제하지 않고 곧바로 뱉어냈다.
하지만 그런 무례한 언행을 나무라는 이가 없었다.
솔직히 나도 국밥이의 발언은 인정하는 바였다. 근원을 손에 얻은 내가 들어도 조금 짜증 날 뻔했으니까.
“미안. 그럴 의도는 없었어. 어쨌든 세뇌된 사람들의 뇌에서 근원을 분해한 게 전부야.”
스칼렛은 내가 푸르카스를 쓰러트리기 전에 많은 사람을 구했다.
그녀가 가진 [에너지 분해]를 이용해, 수많은 비마족들을 구해 낸 것이다.
단순히 대상을 베어 버리는 오류와는 달리, [간섭]은 더욱 다양한 응용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짜 시기긴 하네.’
나는 손가락으로 붉은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둘에게 말했다.
“봤지? 얘라서 가능한 일이야.”
“그, 그렇습니까?”
“애당초 초월자가 마음먹고 조종하는 걸 해방한 거잖아.”
저건 괴물이란다.
만약 스칼렛이 대종족 의회에 두어 명만 더 있었다면 이미 세계정복도 했겠지.
나는 두 대표의 아쉬움을 달래 주며 막사 내부를 둘러보았다.
“근데 다른 대표들은?”
“이바나와 아누스는 병사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트리어는 야영지를 보강하고 있고. 루카스는 비행대를 이끌고 주변을 정찰하고 곧 돌아올 거예요.”
대표들은 각자 맡은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제법 그럴듯한 하나의 세력이 된 느낌.
깨비와 에버딘은 현재 상황을 종합해서 나에게 보고했다.
사상자의 숫자, 부대별 현황, 보급 문제 등등.
나는 군대의 상태를 살핀 뒤에 다른 사안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들어오면서 마법사들과 드워프들은 보이지가 않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판게아 측에서 소집 명령이 떨어져 다들 돌아갔습니다.”
“록펠스 PMC의 부대는 스칼렛 아가씨와 함께 이곳에 남으셨고요.”
로빈 공작과 고드릭의 부대는 이곳을 떠났다.
전투가 힘들어서 그들을 호출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전쟁이 끝난 다음에 부르는 이유가 뭐지?
이건 쉽게 이해할 만한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이유가 말해 주고 떠난 거야?”
“엘프들이 갑자기 쓰러지고 죽었다고 했습니다. 소수도 아니고 그 숫자가 아주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뭐?”
“대동맹에서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어째서 짐작 가는 부분이 떠오르는 걸까.
대표들의 말을 알아들은 클리프도 자연스럽게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곧이어서 클리프의 사념이 나에게 도착했다.
- 이거 설마.
- 그 설마가 맞는 것 같다. 어쩐지 나중에는 근원을 사용하지 않더라니.
싸울 때는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세계수는 아주 비싼 값을 치르며 근원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로써 의문도 풀렸으니,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데 대동맹의 사람들이 떠나면서 아무런 말도 없었어?”
“원래는 함께 인페르노 영지로 돌아가자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의장님을 기다려야 하니까요.”
내가 의리는 있는 놈들을 부하로 뒀네.
실상은 대동맹의 부대가 우리를 떠난 게 아니었다.
대종족 의회가 나를 기다리기 위해 이 사막에 남았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그러면 우리도 돌아가야지?”
림보 영지의 지배자는 사라졌다.
그렇다고 우리의 병력을 가지고 림보 영지를 점령할 수는 없는 노릇.
일단 조기의 목표는 이뤘으니 이제 데모니움 영지로 복귀할 때가 되었다.
* * *
북부 수송기지.
우리 대종족 의회는 우선 과거에 점령해 두었던 인페르노의 거대한 요새로 돌아왔다.
후방으로 빠진 이후, 대종족 의회의 군대는 더 바쁘게 돌아갔다.
그동안 군대의 부상자들을 치료했고, 새롭게 일원이 된 림보 출신의 비마족들에게 식량과 의류를 보급해 주었다.
그렇게 며칠 뒤.
로빈 공작은 우리의 안부를 묻고자 다시 대종족 의회의 군대를 찾았다.
물론, 혼자서만 북부 기지에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드워프 고드릭은 같이 복귀하지 못했지만, 그 자리를 프레스턴 단장이 대신 채워 주었다.
“음, 결국 발라크와는 그렇게 되었군.”
프레스턴은 림보 영지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발라크의 배신은 이미 예상하던바.
내가 잘 살아남았고 발라크가 죽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딱히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기 상황은 좀 어때요?”
“엘프들 일이라면. 이제 더 이상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더군.”
“다행이네요. 원인은 뭐였습니까?”
“시계탑주는 세계수와 관련이 깊을 거라고 했네.”
로빈 공작은 잔에 든 물을 홀짝이며 입을 열었다.
역시 랭커셔 후작이라면 진실에 가까워질 만하지.
나는 살짝 고민에 빠졌다. 이 일의 진실을 알려 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래서 진짜 이유는 뭔가?”
그런 내 고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은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줄 알고 이곳으로 온 거니까.
이 이야기는 세계수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일이다. 굳이 부탁한다면 말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세계수는 엘프들을 도구로 생각하더군요. 어떻게 그런 초월자가 있는지.”
나는 ‘그 초월자 정말 못 됐더라.’라는 느낌을 주며 운을 띄었다.
“정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근원을 사용하더라고요. 저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엘프들의 생명력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군. 그게 가능한가?”
“글쎄요. 저도 아직 근원을 얻고 얼마 안 돼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거든요.”
“만약 이게 진짜라면 좀 두려운데.”
“그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겠소.”
신도를 훌륭한 에너지 공급원으로 여기는 초월자라.
최소한 그 존재에 호의적인 생물체는 없을 터.
그런 의미에서 로빈 공작과 프레스턴의 반응은 지극히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런 초월자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겠죠?”
“그럼, 세계수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이거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되겠군.”
판은 만들어졌다.
나는 조용히 찻잔의 내용물을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행동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먼저 이 두 사람을 포섭해 둬야겠지.
“전하, 무서운 이야기라뇨. 제가 언제 판게아의 평화와 안녕에 해가 되는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