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80화>
180. 근원의 주인 (4)
근원을 손에 쥔 직후.
나는 온몸을 타고 흐르는 기운에 잠시 넋이 나갔다.
‘타르타로스 섬 전체가 보여.’
눈과 귀가 섬 전체에 펼쳐진 것과 같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전지전능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에 준하는 능력이 나에게 부여되었다.
의지를 가지면 내가 원하는 지식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타르타로스의 역사, 섬이 존재하며 거쳐 온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스르륵 지나갔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텔런트: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의 진행률이 상승합니다. 근원+8]
[특성: [■■■■]이(가) 개방되었습니다.]
[특성 개방이 거부되었습니다. 시스템의 권한을 벗어났습니다.]
[거부, 거부, 거부, 거부.]
상태창의 메시지는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근원 자체를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었고, 시스템이 판단할 수 없는 힘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초월자의 힘을 흡수하며 생긴 깜짝 이벤트가 끝나자.
“말도 안 돼. 어떻게 당신이, 당신이!”
가장 먼저 근원의 움직임을 감지한 세계수가 반응을 보였다.
사실, 나도 이렇게 깔끔하게 근원을 흡수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일단 어떻게든 힘을 차지하자는 생각으로 이곳까지 왔기에 살짝 얼떨떨한 느낌을 받기는 했다.
“젠장! 젠장!”
그 뒤로.
조금 뒤늦게 도착한 발라크는 머리를 싸매며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보기 좋네.
나는 발라크에게 다가가며 칼자루만 남은 무명을 휘둘렀다.
“커헉.”
말끔하게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키메라는 그대로 절명했다.
그는 드래곤 하트를 신체에 담고 있었지만,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타르타로스는 이제 나의 세계. 주인의 허락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리라.
“발라크는 잘 가시고. 세계수, 너는 이제 어떻게 할래?”
나는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을 꿰뚫어 보았다.
상대가 가진 근원의 힘은 이 땅 위에서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직 정령사로서의 능력은 남아 있지만, 그걸로는 타르타로스에서 나의 적수가 될 수 없을 터.
세계수는 굳이 더 저항하지 않고 패배를 인정했다.
“당신의 승리입니다. 축하 선물로 하나만 말해 두죠.”
유리엘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선배가 후배에게 학교생활을 일러주듯.
세계수는 앞으로 나에게 찾아올 일들을 섬뜩한 목소리를 통해 말해 주었다.
“감시자들은 튀어나온 못을 싫어합니다. 당신이 더욱 완벽해질수록 압박은 더욱 심해질 거예요.”
관리자들은 초월자를 경계한다는 이야기.
판게아와 마계의 주인이 될 생각이라면 저 조언이 뼈가 되고 살이 되겠지만.
내 궁극적인 목표는 군림과 지배가 아니다.
“조언은 잘 들을게. 그래서 뭘 하자는 건데?”
“당신은 마계, 저는 판게아. 이렇게 세계를 나누고 손을 잡자는 거죠.”
“나를 죽이고 근원을 독차지하려던 사람이 누구더라.”
여기까지 뛰어오면서 나는 세계수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근데 지금 와서 뭐가 어째?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아도 한계라는 게 있을 텐데.
눈앞의 여인은 아주 당당하게 동맹을 요청했다.
“그거야 선의의 경쟁이었다고 볼 수 있죠. 승자의 배려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법이랍니다.”
“입으로 뱉는다고 그게 모두 언어가 되는 건 아니야.”
“흠흠.”
유리엘은 잔뜩 날이 선 대답에 헛기침을 내뱉었다.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클리프와 펠리스는 조심스럽게 내 곁으로 모였다.
아무래도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루카, 찝찝하지만 우리도 무기가 생겼으니 세계수랑 협상하는 게 어떨까?
클리프는 세계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사념을 보냈다.
적을 용서하자는 말이 아니라 싸움을 잠시 멈추자는 의미.
지금 막 전쟁이 끝난 상황, 무턱대고 새로운 싸움을 치르기에는 상황이 안 좋았다.
- 당장 저 제사장과 엘프들을 죽이고 당장 이르민술로 쳐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
반면에 펠리스는 싸움을 주장했다.
엘프들의 전력은 대부분 마계에 있다.
만약 여기서 선빵을 치고 엘프들을 모조리 보내 버린다면?
‘1대1이라면, 우리에게 상황이 유리해질지도 모르지만.’
대동맹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겠지.
결사단이야 급발진을 이해해 주겠지만, 다른 세력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미지수.
자칫 잘못하면 판게아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몰랐다.
“생각이 많은 모양이군요. 이해는 해요.”
세계수는 피식 웃으며 나와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본인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자신감이 절로 느껴졌다.
“원하신다면 말미를 드릴게요. 저의 소원은 감시자로부터의 자유이니까, 다른 뜻으로 곡해하지는 마시고요.”
“굳이 시간을 줄 필요는 없어.”
“호오, 정말요?”
“그래, 네가 다른 초월자들을 전부 죽인 건 사실이니까. 더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지.”
세계수는 관리자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합의를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그 분위기를 망쳐 놓았다.
“갑자기 재미없는 말이나 하시고. 그건 제가 살기 위한 일이었어요.”
“이해는 해.”
나는 세계수의 말투와 미소를 그대로 되돌려 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거래는 신용으로 하는 거잖아? 신용 등급이 낮다면 담보를 걸어야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뭘 더 드리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원하시는 물건이 있다면 나중에 엘프를…….”
“아니, 네가 마계에서 손을 뗀다는 증거. 그걸 줬으면 좋겠는데.”
마계는 이제 점차 내 구역이 될 것이다.
그러니 세계수의 하수인들이 여기서 얼쩡거리는 건 보기 싫었다.
즉, 이제 그만 방을 빼라는 뜻이다.
“하지만 대동맹의 군대가 여기 남아 있는 한 엘프들을 모두 철수시킬 수는 없어요.”
“그래서 뭐? 엘프들을 판게아로 돌려보내는 건 싫다는 거야?”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죠. 대신에 다른 식으로 신뢰를 드리는 건 어떨까요?”
세계수는 손가락을 움직여 본인을 가리켰다.
그녀가 신뢰의 표시로 주겠다는 건 유리엘 제사장의 몸이었다.
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근원의 힘을 통해 바로 알아차렸다.
‘유리엘 제사장은 엘프이긴 하지만.’
유리엘은 일반적인 생물체와는 달랐다.
신체를 개조한 건지는 몰라도 생명체에는 있을 수가 없는 부분이 보였다.
일종의 귀빈실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가 본인의 정신에 접속할 수 있도록 배정된 공간이 있었다.
“후후후, 근원을 손에 얻으셨으니 이제는 잘 보이시겠죠? 마계에서 손을 뗀다는 의미로 유리엘의 목숨을 드리죠.”
본인의 장난감을 소개하듯.
세계수는 유리엘의 뺨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클리프는 앞으로 나서며 따졌다.
“잠시만! 지금 당신의 신도를 팔아먹겠다는 겁니까?”
초월자의 대리인 역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계수가 그런 유리엘의 몸을 포기한다면 우리에게는 절대 손해가 아닐 터.
하지만 제사장은 세계수를 위해 헌신한 충신.
그런 충실한 신도를 도구처럼 쓰고 버리겠다는 상대의 언행에 클리프는 크게 화를 냈다.
“그게 바로 초월자라는 겁니다. 우리와 당신은 달라요.”
세계수의 대답은 겨울밤의 공기처럼 냉랭했다.
이어서 그녀는 히죽 웃으며 클리프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시리엘이라고 했던가요? 그 아이는 당신을 많이 아끼던데. 원한다면 선물로 그냥 줄 수도…….”
“자, 괜한 말다툼은 그만하고.”
역린을 건드렸는지.
협상을 말하던 클리프의 눈이 투지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괜히 싸움이 더 커지기 전에, 나는 그 둘의 사이를 가르며 가운데에 섰다.
“이상한 말은 이쯤하고. 일단 네 말은 들어볼게, 나도 감시자라는 놈들에게 휘둘리기는 싫으니까.”
내 대답에 세계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클리프와 펠리스는 불만을 내비쳤지만, 우선은 내 뜻을 존중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래서 이제 초월자 선배로서 먼저 계획을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나의 물음에 세계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시자, 혹은 관리자에 맞설 계획.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무턱대고 그들에게 맞설 수는 없으니까.
“감시자는 이 세계에서 완전히 내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반대의 방법을 써야죠.”
* * *
네크베르 사막.
우리는 로시난테를 타고 의회의 군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두 사람 전부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한나절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나 체감상 무척 길었던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다사다난하긴 했지.’
세계수는 감시자들에게 한 방 먹일 방법을 말해 주었다.
그 방법이 정말 유효한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루카, 정말로 세계수와 손을 잡을 거야?”
내 뒤에 타고 있던 클리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날아오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니,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 내 말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덩달아 펠리스의 얼굴도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니.”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또 네가 세계수랑 손잡는 줄 알았잖아.”
둘은 서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을 건넸다.
미쳤다고 세계수랑 편을 먹겠나, 만약 관리자들을 몰아내면 다음 목표는 내가 되겠지.
더군다나 세계수는 차원 내부의 존재. 밖에서 온 놈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를 위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마냥 적대시해서는 안 돼. 세계수는 판게아에서 영향력이 크니까.”
나는 클리프를 보면서 말했다.
우선은 관리자와 세계수의 사이를 오가며 영리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국밥이는 내 계획을 듣더니 드물게 정곡을 찔렀다.
“근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네가 한 거와 다를 게 없잖아.”
“비슷하기는 해도 엄연히 다르지. 이제는 나에게 근원이 있잖아?”
근원.
초월자의 힘은 수평선 너머에 있는 물건처럼 뿌옇고 옅은 느낌이다.
이성이나 논리로 학습하는 게 아닌, 눈을 감고 손을 더듬으며 물체를 알아맞히는 것과 같으니.
‘조금 더 체화시킬 필요가 있겠어.’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게 내가 세계수와 당장 관계를 파탄 내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뭐, 이번에 손에 얻은 것들이 제법 많기도 하고.
■────능력────■
근력: 315+35 민첩: 466+59
지능: 183+5 체력: 366+23
오러: 3864 마기: 9541
신성력: 1291 혈마력: 1069
근원: 8
텔런트: ???
■────특성────■
[인간 방패] [2.0] [희생자] [개코] [초감각] [통달한 자] [폭탄마] [운수 좋은 나] [돌개바람] [천의 얼굴] [철인] [초인적인 힘] [마독불침] [천재적 두뇌] [대악마] [성령의 빛] [밤의 제왕] [세계의 그림자]
■──────────■
나는 상태창을 펼쳐서 변화된 점을 살폈다.
우선 무명이 성장하며 전체적으로 추가 능력치가 늘어났다.
거기에 발라크의 키메라가 지니고 있던 마나를 오러로 변환해 흡수했고, 세계수가 내어 준 유리엘의 시체에서 신성력을 흡수했다.
그 덕분에 [성스러운 자]는 더 높은 등급의 [성령의 빛]이라는 특성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근원이 새로 생겼지.’
8점.
다른 능력치의 숫자들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초라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숫자가 나왔는지, 또 어떻게 숫자를 늘릴 수 있을지.
아직은 모든 부분에서 의문점이 많았다.
히히힝!
내가 새로 얻은 힘들을 살피고 있는 사이.
로시난테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흥겨운 소리를 냈다.
하얀색 말이 가리키는 곳에는 대종족 의회의 군대가 설치한 야영지가 보였다.
아무튼,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