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77화 (177/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77화>

177. 근원의 주인 (1)

아주 짧은 정적이 흘렀다.

나와 푸르카스는 이 현상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한 0.5초 정도는 흘렀을까.

깜짝 놀라며 소리쳤던 푸르카스는 세상이 떠나가라 웃었다.

- 흐하하하! 칼날이 사라져 버리다니. 참으로 너에게 어울리는 최후로구나.

명백한 조롱.

심지어 나를 포위하던 마기 폭풍까지 거두며 대놓고 낫을 흔들어댔다.

마치 잡아 보라는 듯, 이제는 절대 이길 수 없게 되어 버렸음을 실감하라는 의미였다.

칼자루.

나는 붉은색 칼자루만 남아 버린 무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검의 상징이자 존재 의미인 것이 없어졌다.

무명을 다루지 않는 자가 보기에는 확실히 검이 파괴되었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닐 터.

“이런 방식을 선택했다 이거지.”

나는 경쾌한 웃음소리를 무시하며 말을 되뇌었다.

무명에 깃든 역대 결사단주의 신념, 세계의 그림자가 되겠노라는 의지에 보내는 찬사였다.

물론, 푸르카스가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말이다.

- 드디어 실성한 게로구나. 아무튼, 칼이 사라졌으니 무엇으로 싸울 거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싸워야지.”

정면에 놓인 푸르카스의 낫은 빙글빙글 돌았다.

이걸 보니 판게아에서 적들의 성질을 긁어놓았던 과거가 떠올랐다.

나는 새어 나오는 조소를 보란 듯이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나도 놀려먹는 거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 알다마다. 어째 취향이 참 비슷하군.

“특히 간신히 이겼을 때 그 쾌감이 어찌나 좋던지.”

- 뭐, 네가 오래간만에 만난 호적수라는 건 인정해 주마.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거지?

푸르카스는 승자의 위치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대악마 하나가 더 남았으나 크게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어차피 발라크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근원의 흐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반쪽짜리는 절대 푸르카스를 이기지 못할 테니.

“이겨야지. 전심전력으로.”

나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원래 티배깅은 다 이겨놓고 하는 거란다.

부러진 것도 아니고 칼날이 사라진 건데 어찌된 영문인지 자세히 살폈어야지?

- 후후. 그래, 차라리 죽을 때까지 발버둥 치는 쪽이 더 재밌…….

쉬익.

내가 무심하게 무명의 칼자루를 휘두르자.

푸르카스의 웃음소리가 끊기고 가만히 공중에 있던 검은색 낫에도 변화가 생겼다.

커다란 날에 상처가 생기며 실금이 그어진 것이다.

“말문이 막히지?”

구성 물질의 일부가 날아간 흑색의 낫.

진화한 무명으로 배어보니 더욱 저 무기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저 안에는 푸르카스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걸.

- 잔꾀를!

갑자기 다급해진 푸르카스는 역정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복병이 등장한 셈이니까.

당연히 나는 도망치게 놔둘 생각이 없다.

“왜? 또 공간에 녹아들려고?”

푸르카스는 본인이 원할 때만 낫을 실체화해서 보여 주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우리 초월자 후보님께서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

만약 통제권을 잃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우우우.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골동품처럼 보이겠지만, 무명은 이제 진화를 끝마쳤다.

굳이 상태창을 살펴보지 않아도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오류가 기세가 더 거칠어졌어.’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단순히 근원의 흐름 몇 가닥을 끊어내는 걸 넘어, 공간의 면을 통째로 들어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 역겨운 놈. 패배자처럼 행동하며 나를 희롱했구나.

본인이 먼저 김칫국부터 마셨으면서.

나는 서서히 공간에 스며들고 있는 푸르카스의 낫을 목표로 잡았다.

그리고 오류로 만들어진 붓을 들었다는 느낌으로 크게 휘둘렀다.

후화아아!

효과는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공간의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칠흑의 낫을 감싸던 흐름이 단번에 흩어졌다.

대충 무슨 느낌인지는 감이 오네.

나는 허공에서 검무를 추며 초월자가 지배하고 있던 공간을 계속 들쑤셨다.

- 마지막 발버둥이라면 받아 주마!

푸르카스가 연필이라면 나는 지우개.

근원으로 본인의 상상력을 풀어놓으면, 그 위를 오류가 뒤덮으며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만들었다.

게다가 새로워진 무명의 기능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류를 조절할 수 있어.’

나는 이 기운을 충분히 조절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진화한 무명을 다루며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베고자 하는 것, 그리고 베고 싶지 않은 것.

이제는 그 둘을 구분하여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

“루카! 드디어 방법을 찾아낸 것인가? 나도 돕겠네!”

푸르카스와 열심히 색칠 놀이를 하고 있을 무렵.

공간의 한 곳에 짱박혀 있던 발라크는 누더기 드래곤을 이끌고 나타났다.

분명 목소리 자체는 나를 도와주겠다는 느낌이었지만.

어째 뒤통수가 싸한 기분이 드는 건 무시할 수가 없었다.

- 발라크, 네까짓 놈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다는 거지?

나와 접전을 벌이던 푸르카스는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확실히 궁금하기는 하네. 계속 공격에 당하며 도망만 다니던 놈이 뭘 하겠다는 걸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내놓고 싶은지, 발라크의 키메라에서 이전과 궤가 다른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보면 알겠지. 안 그런가?”

이때를 노렸다는 듯.

발라크는 주어를 뺀 채로 말을 씹어 뱉었다.

동시에 누더기 드래곤에 장착되어 있던 4개의 드래곤 하트가 기운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휘후우우.

공중에 퍼져 있던 마나.

차원의 균형을 맞추고 있던 기운들이 부조리한 힘에 이끌려 어딘가로 흘러갔다.

도착 지점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 키메라의 머리.

서로 다른 3개의 머리는 입을 쩍 벌리며 주위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그렇지.’

발라크는 오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만 그 범위가 푸르카스가 만든 세계를 완전히 아우를 수준이라는 것.

오류를 다루지 못하는 초월자 후보도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 인간! 뭔지는 몰라도 저것부터 막아야 한다. 우선 힘을 합치자!

누구 좋으라고 멈춰.

발라크가 다루는 오류의 수준이 어떨지는 몰라도, 저만한 양이라면 그 누구도 무사하기는 힘들 거란 판단이겠지.

나는 푸르카스의 휴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칼자루를 움직였다.

“아니, 나는 발라크를 믿어. 우리는 동맹이라고.”

키메라가 준비하는 기술을 살핀 뒤.

나는 전혀 다른 평가를 내놨다. 정말로 발라크를 믿는다기보다는 나에 대한 신뢰에 가까웠다.

어떤 일이 생겨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말이다.

- 미친놈. 저 녀석이 너를 살려 둘 것 같으냐. 우리를 함께 보내 버리려는 거다!

“하하하! 푸르카스. 이제 끝이 다가오니 네놈도 어지간히 똥줄이 타는 모양이구나.”

- 네놈! 우리의 세계를 인간 놈들에게 팔아치우고도 네놈이 멀쩡할 듯싶으냐!

“죽어 버릴 놈이 걱정도 많구나. 걱정하지 마라. 마계는 내가 잘 책임질 테니.”

오랜 염원의 마침표가 다가온 모양인지.

푸르카스와 발라크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윽고 키메라가 주위의 기운을 한계치까지 빨아들였을 때.

“흐하하하! 이제 끝이다.”

나는 피부를 콕콕 찌르는 살기를 느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발라크는 다수의 드래곤 하트를 이어 붙여 키메라를 만들어 냈다.

단 하나만 온전히 사용할 수 있어도 무적에 가까워지는 물건을 무려 4개나.

‘온다.’

극한까지 압축된 마나.

4개의 드래곤 하트가 빚어낸 결과물은 황금색도 붉은색도 아니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완전히 투명한 무언가로 바뀌어 버렸다.

서로 다른 기운을 섞는 나의 방식과는 다르지만, 저것도 오류임은 확실했다.

냄새나 형체. 심지어 소리도 없이.

발라크의 키메라가 쏟아 낸 오류는 나를 포함해 모든 것들을 휩쓸었다.

* * *

잠시 후.

발라크는 폐허로 변해 버린 림보 본성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공중으로 치솟았던 구조물은 모두 바닥에 처박혔고, 하늘과 땅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몸을 옥죄던 푸르카스의 기운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으니.

“나의 승리다. 내가 이겼다.”

흐흐흐.

발라크는 낮은 톤의 웃음소리를 내며 승리감에 도취한 상태였다.

하긴 오래된 악연과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가증스러운 인간을 죽였으니 어련할까.

나도 저 기분에 조금 더 장단을 맞춰 주고 싶었으나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림자 검술 8번, [그림자 참수]

발라크가 홀로 서 있던 폐허에서.

최대한 존재감을 감추고 있던 나의 신형이 스르륵 나타났다.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무명의 칼날은 발라크와 누더기 드래곤을 노렸고.

나는 오러와 마기를 더 끌어 올리며 보이지 않는 벽에 몸을 던졌다.

쿠웅.

시간의 벽.

생명체는 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자 몸을 울리는 큰 진동이 일어났다.

나를 막아선 울타리는 쉬이 길을 터주지 않고 나를 끊임없이 밀어냈다.

발라크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와 물질이 멈춰 섰으며, 고요해진 세계는 숨을 죽이고 나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아직 기운은 충분해.’

나는 푸르카스와의 전투에서 모든 힘을 쏟아 내지 않았다.

아직 힘과 기운은 충분히 남았으니, 장애물로 가로막힌 문을 밀어내듯 계속해서 힘을 줄 수 있었다.

드드드드.

밀린다.

시간의 벽은 내 발목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지 못하고 서서히 물러났다.

마침내 온몸을 감싸던 압력이 사라지자, 모든 게 멈춰진 세상을 자유롭게 거닐 수 있게 되었다.

푸욱.

나는 누더기 드래곤에게 다가가 무명을 찔러 넣었다.

이 상태에서는 오류를 사용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게 모든 일을 끝마쳤을 때. 시간은 다시 강물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읍!”

발라크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검은 망토는 건드리지 않고 키메라만 공격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반응 자체는 더욱 격렬했다.

“감히!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느냐?”

본인의 몸이라.

발라크는 누더기 드래곤을 본인의 몸이라 말하며 역정을 냈다.

말 그대로 저 검은 망토는 단순히 영혼을 가둔 인형일 뿐.

발라크의 진짜 본체는 저 키메라였다.

“네 정신과 드래곤 하트의 연결부를 끊었지. 이 검으로.”

내가 태연하게 답을 내놓기 무섭게.

쿠웅, 누더기 드래곤이 쓰러지며 지면에 머리를 처박았다.

나는 조금 전에 무명을 찔러넣어 드래곤 하트와 발라크의 연결점을 정확히 잘라 내 버렸다.

쉽게 말하면 컴퓨터를 강제로 꺼 버린 것과 비슷하다.

“이런 젠장!”

그와 동시에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발라크의 인형에서 마기로 된 안개가 흘러나왔다.

“왜? 인형에 있는 기운을 흡수해서 연결점을 다시 복구하려고?”

- ……너에게 이 사실을 말해 준 자가 누구냐.

“알면 어떻게 하려고. 이제 죽을 양반이.”

강아지남이 말하길.

여러 개의 드래곤 하트를 엮어서 만든 키메라는 통제를 잃기 쉽다고 말했다.

발라크는 그걸 방지하기 위해 영혼을 나누어 담아 직접 통제해 왔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지.’

나는 통제력을 벗어난 누더기 드래곤을 위해 선물을 꺼냈다.

파멸의 송곳니, 일전에 발라크를 처음 만났을 때 누더기 드래곤을 흥분시켰던 물건이 그 주인공이었다.

개껌의 등장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던 키메라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크와아아!

가만히 있던 가운데 머리가 포효하며 나를 보았다.

누더기 드래곤이 울부짖자, 몸속을 파고들던 발라크의 기운은 속절없이 밖으로 밀려 나왔다.

일종의 재부팅, 드래곤 하트에 잠들고 있던 주인의 정신을 파멸의 송곳니로 일깨운 것이다.

나는 씨익 웃으며 파멸의 송곳니를 저 멀리 던졌다.

“그러게, 배신할 타이밍을 잘 정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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