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76화>
176. 지배자 (4)
“피! 신선하고 강력한 피다!”
창백한 피부와 날카로운 송곳니.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사내가 쉬고 갈라진 목소리를 내며 떠들어댔다.
게다가 뾰족하게 자란 손톱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피를 갈구하기까지 했다.
촤악!
호기롭게 달려들던 사내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클리프가 휘두른 ‘광휘의 심판’이 남자의 목을 통째로 뜯어 버렸기 때문이다.
여유롭게 적의 머리를 잘라냈으나 클리프의 표정은 오히려 좋지 못했다.
적을 하나 죽여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킬킬킬, 소용없다. 순순히 포기하거라!”
“순순히 우리의 동지가 되어라!”
“어서 빨리 에르체베트 님께 저 녀석을 바치자!”
베고, 뭉개고, 쳐 내고.
클리프는 오러를 뿜어내며 적들을 모조리 해치웠다.
광휘의 심판은 원래의 색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붉게 물들었고, 사방에는 적들이 흘린 피와 살점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그런데도 저들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 정말 답이 없을 정도로 몰려드는구나.
클리프는 스승의 말에 동의하며 부지런히 검을 휘둘렀다.
적의 실력은 대단치 않다. 적의 숫자도 여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리 절망적인 편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건 저들의 능력이다.
뱀파이어.
그들은 다른 생명체의 혈액을 통해 성장하며, 자신의 혈정을 나눠 주어 세력을 늘리기도 한다.
가장 성가신 능력은 지독한 생명력.
검으로 사지를 잘라도 금세 회복하는 데다가 일정 이상의 경지에 다다르면 심장이 파괴되어도 잘 죽지 않았다.
여기에 근원의 영향이 더해진다면 어떻겠는가.
“모두 비켜라! 이 몸이 상대하겠다!”
클리프는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악몽, 쓰러트렸던 적이 계속 되살아나는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자신감 있게 걸어오는 여인의 목적이 더더욱 골치를 아프게 했다.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너에게 하이 뱀파이어의 고귀한 혈통을 전수하는 일이니.”
부하들을 뒤로 물린 하이 뱀파이어.
에르체베트라는 이름의 여인은 얇고 가벼운 드레스 자락을 흩날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진지한 모습이 귀엽다는 둥, 반드시 손에 얻고 말겠다는 둥.
그녀는 굉장히 유리한 상황인 것처럼 말을 쏟아 냈지만, 실상은 클리프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한 상태였다.
“여전히 무뚝뚝하구나. 내가 너를 품은 후에도 그럴 수 있으려나?”
에르체베트는 하얗고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하이 뱀파이어의 노리개라. 클리프는 조용히 대검의 손잡이를 말아쥐며 침을 삼켰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검성이 꽥 소리를 질렀다.
- 절대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헛!’
클리프는 스승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뱀파이어는 이성을 유혹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에르체베트가 내뿜는 미묘한 기운 때문인지 클리프의 눈은 계속 그녀의 도드라진 가슴께로 향했다.
위험하다. 목숨이 아니라 조금 다른 쪽으로.
‘애당초 이렇게 싸우게 된 게 문제였어요! 차라리 제가 라일라크를 맡았어야 했는데.’
클리프는 신경질을 부리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여태까지 싸우면서 곤란했던 순간은 많았다.
하지만 저런 육탄 공세로 조금 다른 의미의 고통을 겪었던 경험은 없었다.
- 저게 뱀파이어의 방식이니 별수가 있겠느냐? 그래도 견디고 이겨내면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항상 똑같은 소리.
검성은 항상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스승의 말을 따라서 잘못된 일은 없었으니.
‘알았다고요. 버티면 되는 거잖아요?’
콰앙!
클리프는 대검에 오러를 담아 땅을 내리쳤다.
광휘의 심판이 불러일으킨 충격은 지면을 깨부쉈으며, 본인을 둘러싼 적들을 가볍게 튕겨 내 버렸다.
에르체베트는 힘과 혈마력으로 공격을 버틴 뒤에 깔깔거리며 달려들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하구나! 침실에서는 어떨지 참으로 기대가 돼!”
“좀, 이상한 말 좀 하지 말라고!”
충격파를 견뎌낸 뱀파이어는 단 하나.
클리프는 정면에서 달려오는 에르체베트를 향해 광휘의 심판을 내밀었다.
그리고 부에르의 눈마저 멀게 만들었던 백색의 빛을 주변으로 뿜어냈다.
번쩍!
커다란 대검에서 발현된 섬광.
광휘의 심판의 고유 기능이 만들어 낸 찬란한 빛이 어둠을 몰아냈다.
밤의 귀족들은 여명을 피하려는 듯 몸부림쳤으며, 에르체베트조차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끼야아! 크헉.”
비명을 질러대던 여인에게서 단말마가 튀어나왔다.
아수라장 속에서 여유롭게 움직인 클리프가 에르체베트의 목을 날린 것이었다.
공간을 하얗게 물들인 빛이 사라진 이후, 뱀파이어들은 그제야 윗전의 안위를 걱정하며 몰려들었다.
“에르체베트 님!”
“고얀 놈! 이게 무슨 불경한 짓이냐!”
“몸으로 막아라!”
그들은 몸을 던져 가며 공격했지만, 클리프를 막아설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검이 한 차례 움직이면 뱀파이어들의 사지가 이곳저곳에 흩뿌려졌고, 호기롭게 덤벼든 자들도 모두 분해되어 고기 조각이 되었다.
“후우.”
홀로 땅 위에 선 은발의 청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토록 쉼 없이 적을 몰아붙여도 전투는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다니.
근원의 힘이란 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가졌는지 새삼 실감이 갔다.
- 힘을 너무 소진하지 말고 아끼거라.
스승의 조언을 곱씹으며 클리프는 발밑에 있는 시체들을 흘겨보았다.
이들은 죽지 않는다. 초월자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아무리 시체를 잘게 다져도 다시 살아났다.
그나마 이렇게 깔끔히 정리해 놓으면 몇 분 정도는 쉴 수 있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켜만 보고 있잖아요.’
클리프의 시선이 한 장소로 향했다.
굉음이 들리는 우측, 그곳에서는 라일라크의 무리와 펠리스가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가능하면 결사단주를 도우러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체력의 안배가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진짜 싸움은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요.’
이번에는 클리프의 고개가 좌측으로 움직였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뱀파이어 무리에 뛰어든 건 펠리스와 클리프뿐만이 아니었다.
발라크의 키메라, 온갖 종류의 생물체가 합쳐진 괴이한 키메라도 둘을 도와서 뱀파이어와 싸우는 중이었다.
- 저놈의 특기는 발놀림이구나. 생김새와는 다르게 움직임이 무척 빨라.
검성은 멀리 떨어진 키메라의 움직임을 꽤 높게 평가했다.
아무렴 대악마가 손수 만들었으니 성능이 뛰어나지 않으면 곤란할 터.
클리프는 시선을 거두고서 스승에게 말했다.
‘빠르든 어떻든. 본성의 싸움이 끝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요.’
* * *
온갖 곳에서 파괴를 담은 검은색 기운이 터져 나왔다.
푸르카스가 지니고 있었을 막대한 양의 마기.
상대의 신체가 소멸하며 사라진 줄 알았던 기운들은 공간에 녹아들어 우리의 등을 노렸다.
퍼퍼펑!
시커먼 기운이 폭발하듯 퍼지며 몸을 덮쳤다.
나는 혈마력을 이용해 기운을 흡수하는 한편, 급격하게 뒤틀리고 변화하고 있는 공간에서 목표를 찾아냈다.
푸르카스의 낫. 내 무명을 성장시킬 경험치가 감지된 위치는 다름 아닌 머리 위에 있었다.
깡!
급하게 가로로 눕힌 흑도가 낫을 막아냈다.
무명은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날을 덜덜 떨며 비명을 질러댔고, 푸르카스는 나를 더욱 압박하며 상상을 현실로 만들려 했다.
순순히 당해 줄 수는 없지. 나는 칼날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낫을 흘려보냈다.
챙, 채챙.
칠흑의 낫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내 요혈을 노렸다.
나는 연달아 들어오는 공격을 부드럽게 넘기며, 무명에게 최대한 많은 경험을 주입해 주었다.
- 좀 죽어라!
푸르카스는 이제 더는 웃지 않았다.
모든 위협을 돌파하면서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으니 어련할까.
“어림없지. 네가 먼저 죽으면 생각해 볼게.”
우우웅.
나는 리볼버에 4가지 기운을 장전하고 여러 방향으로 쏘아 보냈다.
무형무색의 오류는 주변을 잠식하고 있던 근원을 흩어버리며 푸르카스의 장악력을 낮췄다.
- 쥐새끼 같은 놈!
스스스.
푸르카스는 무너져 내리는 공간의 벽을 메꾸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실제로 상대에게 눈이 달려 있지는 않았지만, 주위에서 쿡쿡 찌르는 살기가 거둬진 게 느껴졌다.
‘좋아, 일단 시간은 끌었고.’
나는 존재감을 감추며 무명을 살폈다.
검은 열심히 성장하고 있다. 다만 칼날 위를 걷듯이 파괴와 강화의 사이를 오갈 뿐.
긍정적인 부분은 무명의 상태가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진동이 느껴질 정도니, 이게 의미하는 바는 아주 뚜렷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거의 반나절을 도망치며 버텼다.
무명을 계속 한계로 몰아붙였고 이제 그 결실을 볼 순간이 다가왔다.
내가 공간을 돌아다니며 근원 몇 가닥을 더 끊었을 무렵. 완전히 넝마가 되어 버린 발라크는 사념을 통해 나를 불렀다.
- 루카. 아직도 멀었는가?
처음에는 꽤 멀쩡했었는데.
검은 망토는 이전보다 기운이 다소 옅어져 있었다.
계속 몸을 재생하며 에너지를 소비한 탓이겠지.
- 조금만 더 버텨 봐. 그러면 한 방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용기를 심어 주며 열심히 공간을 휘저었다.
실제로도 당장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으나 있다고 해도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발라크는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 절대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 알겠다. 최대한 적의 시선을 끌면서 버텨 보겠다.
발라크의 대답과 함께.
푸르카스가 나를 위해 준비한 특별 선물이 정면에서 나타났다.
마기 폭풍, 휘몰아치는 폭풍의 중심에는 푸르카스의 낫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 이제 도망도 끝이다. 언제까지 무의미하게 시간을 버릴 거지?
푸르카스는 웃음기를 쫙 빼며 나의 죽음을 선언했다.
무의미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우리의 술래잡기는 적어도 나에게는 아주 유익하고 참된 시간이었다.
나는 점점 진동이 격렬해지는 무명을 의식하며 폭풍으로 뛰어들었다.
그림자 검술 2번, [환영 활보]
마기 폭풍에 비견되는 수많은 환영.
수천 명의 루카가 일시에 움직이니, 마치 검붉은 안개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존재감을 최대한 줄이며 혈마력과 신성력으로 외부를 덮었다.
폭풍의 핵, 그 속으로 가기 위해서는 푸르카스의 방해를 뚫고 들어가야 하니 무장은 필수였다.
쿠과과과!
아가리를 벌린 괴물처럼.
내가 만들어 낸 환영들은 뭉개지고 흩어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환영 활보]는 단순한 눈속임이지 공격용이 아니니까.
진짜 공격은 여기에 있다.
우우웅.
오류를 휘감은 무명.
나는 여러 기운이 합쳐지며 만들어 낸 나의 오류를 믿으며 나아갔다.
폭풍에 피부가 긁히고 베이고 쓸려도 개의치 않았다.
무명이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는 게 손과 팔을 통해 전달되었지만.
‘이제 됐어.’
챙!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내민 칼끝은 푸르카스의 무기에 닿으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온몸을 타고 전율이 느껴졌다.
- 뭐, 뭐냐!
푸르카스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현상이 일어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무기가 깨지는 건 그리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버티지 못하면 부러지는 게 세상의 이치.
그러나 긴 세월을 살아온 푸르카스에게도 그만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칼날이 사라졌어.’
전율이 휩쓸고 지나간 후.
내 눈동자에는 칼자루만 남은 무명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