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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로 살아남기-175화 (175/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75화>

175. 지배자 (3)

시간을 조작하려던 푸르카스.

나는 그의 개수작을 오류로 몽땅 베어 내고 황급히 도망쳤다.

- 호오, 그동안 많이 성장했구나. 하지만 배짱은 작아졌어.

푸르카스는 서둘러 발라크에게 돌아가는 나를 보며 비웃었다.

아, 꼬우면 너도 친구 데려오든가.

나는 상대의 말을 무시하며 드래곤에 올라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어?”

“그게.”

검은 망토의 말은 이어지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졌다.

설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건가.

짐짝이 하나 생겨 버리면 곤란한데, 나는 발라크를 째려보며 대답을 독촉했다.

“빨리 말해. 어영부영하다가 뒤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가면과 검은 망토로 몸을 가린 대악마.

발라크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공포와 격양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푸르카스가 설마 이토록 초월자에 가까워졌을 줄은 몰랐다.”

“그걸 말이라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루카! 나는 푸르카스의 근원을 온전히 읽어 낼 수 없다! 그러니 나를 도와줘라!”

뭐, 주변에 가득 찬 근원의 기류를 읽어내는 건 힘들 수 있지.

그래도 저 철면피 같은 당당함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세상에 쓸모없는 동료는 없다. 다 어떻게 굴리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뻔뻔하기는 한데. 일단 그 요청은 받아들일게. 그러니까. 피해!”

슈앙.

나는 쏜살같이 날아오는 정체불명의 물체를 감지하며 높이 뛰어올랐다.

암흑의 색을 띤 커다란 낫, 내가 본 물체는 영화에서 보았던 ‘사신의 낫’과 흡사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크아악!”

잽싸게 공격을 피한 나와 다르게.

어설프게 움직인 발라크는 어깻죽지부터 골반까지 길게 갈라지며 상체가 둘로 나뉘었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즉사했을 만한 상처.

상체가 세로로 반이 잘려 버렸지만, 이상하게도 발라크는 비명만 질러댔다.

“솔직히 말해 봐. 안 아프지?”

“아니다. 죽고 싶을 만큼 아프다.”

발라크의 몸은 순식간에 치료되었다.

아니, 나았다기보다는 복구되었다는 표현이 더 걸맞을지도.

세로로 갈라진 상체는 곧바로 봉합되었고, 혈액이나 장기가 흘러내리지도 않았다.

“이거 괜찮은데?”

“그게 무슨 소리냐. 아군이 죽을 뻔했는데.”

개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발라크의 망토 속이 비어 있다는 것쯤은 진즉에 알았다.

대악마는 언젠가 죽을 텐데, 발라크는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겠는가?

‘저 망토는 발라크의 본체가 아니야.’

강아지남이 말하길.

저 검은 망토는 발라크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영혼의 일부를 옮겨 담은 인형일 뿐.

어쨌든 공격에 당해서 죽을 걱정은 없으니 방패로 사용하기에는 좋았다.

“뭐,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걸. 어쨌든 내가 도와줄 테니까 말하는 대로 움직여.”

“알겠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가만히 있어.”

“응?”

“가만히 있으라고.”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야 내가 편하게 돌아다니지.

뒷말을 삼키고 공격에 대비하려던 순간.

슈우우우.

우리의 정면에 순수한 마기가 모여들었다.

조금 전과 같은 크기와 외형의 낫, 나는 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발라크와 거리를 두었다.

‘저 무기는 뭔데 계속 튀어나오는 거지.’

검은색 원기둥이 무너졌을 때 들렸던 금속음이 저것과 관련이 있나?

나는 거대한 낫의 정체를 고민해 보았다.

푸르카스가 본체를 버렸다고 가정한다면,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죽일 수 없을 터.

일단은 승리의 실마리를 잡는 게 우선이었다.

- 발라크, 네놈은 도망가지 않을 생각이냐.

“마음대로 떠들어라. 아직도 겁이 나면 먼저 도발부터 하고 보는 건가?”

- 훗, 오만한 놈.

허공에 나타난 낫에서 흉악한 기세가 뿜어졌다.

절대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공간이 서서히 압축되더니 농후한 마기가 초승달 모양처럼 응집되어 쏘아졌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발라크는 승부를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섰다.

이어서 키메라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3개의 머리에서 동시에 파멸의 화염이 방사되었다.

물론,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샤악.

손에 들린 무명을 휘두르자.

발라크를 향해 스멀스멀 다가가던 근원의 기류는 힘을 잃고 사라졌다.

그 직후, 푸르카스와 발라크의 기운이 부딪치며 차원을 둘러싼 벽이 마구 흔들렸다.

드드드드.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느낌.

나는 미친 듯이 몸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둘의 격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의외로 둘의 싸움은 박빙이었다.

‘내가 근원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발라크가 일방적으로 당했겠지만.’

어찌 되었든.

두 대악마의 싸움은 한 합에 끝나지 않았다.

기운이 충돌하며 새빨갛고 검은 파편들이 흩어졌고, 폭죽처럼 화려하게 하늘에 펼쳐졌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신형을 늘어트렸다.

거대한 낫.

저것을 제외하면 푸르카스와 연결된 접점은 없다.

그러니 우선 저 날붙이부터 확인해보면 답이 튀어나올 터.

철컥, 마공학 리볼버가 빠르게 권총집에서 뽑혀 나왔다.

우우웅.

나는 실린더 안에 오러를 채워 넣었다.

초월자를 잡으려면 오류를 써야 하겠지만, 지금은 내 예상을 증명하기 위함이니.

오러탄은 [리볼버 패닝]을 통해 거의 동시에 목표물로 발사되었다.

티티티티팅!

명쾌한 타격음이 되돌아와 고막을 때렸다.

조금 전에 나타난 사람 형태의 응집체에선 아무런 타격감도 없었는데.

그에 반해서 저 거대한 낫은 현실의 물건처럼 오러탄에 반응을 보였다.

“왜 그런 어정쩡한 공격을 한 건가.”

“어정쩡하지 않았어. 제대로 찌른 거지.”

나는 서서히 모습이 사라져가는 전투용 낫을 가리켰다.

발라크는 그 광경을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푸르카스의 낫이……, 사라졌군.”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저 낫은 원래 푸르카스가 쓰던 무기야?”

“맞다. 대악마 이전부터 줄곧 애용하던 무기지.”

역시 현지 가이드가 있으니 좀 편하네.

만약 푸르카스가 정말로 초월자가 되었다면, 저 무기를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놈은 아직 초월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자아를 유지하려면 본인과 연관된 연결점이 필요하리라.

“저 무기가 푸르카스의 본체야. 최소한 부숴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

“흠, 저 녀석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겠군.”

푸르카스는 계속 우리를 비웃고 놀렸다.

그런데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면 이유는 뻔하겠지.

설령 본체가 따로 있다고 해도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다.

‘살짝 켕기는 부분은 있지만.’

나는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발라크의 기운을 살폈다.

다른 신체나 도구에 영혼이 정착하는 건 의외로 많이 발생하는 일이다.

폰허부도 클리프의 몸에 영혼이 깃든 것처럼.

‘심지어 발라크 본인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저 가증스러운 복면가왕은 바보처럼 행동했다.

혹시 본인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거라는 티를 내고 싶은 건가.

힘을 아낄 생각이라면 참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만들지 않을 테지만.’

* * *

우리가 푸르카스의 약점을 찾아낸 뒤.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본격적으로 나와 발라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푸르카스는 림보 본성의 공간을 뒤죽박죽 섞으며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땅이 머리 위에, 하늘은 발끝에 달려 있다니.

‘무슨 놀이동산에 온 것 같네.’

차이점이라면 지금은 앞에 ‘죽음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정도.

주위의 공간은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땅덩어리가 쪼개지며 하늘을 날더니 용암이 치솟고, 림보 본성의 구조물이 계속 나를 쫓아다녔다.

왕실의 보고처럼, 림보 본성이라는 공간이 현실의 법칙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다.

“크아아악!”

자동 비명 주크박스가 되어 버린 발라크가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마기가 깃든 나무가 그에게 날아와 적중했기 때문이다.

비명은 굉장히 신경 쓰이고 짜증났지만, 푸르카스의 심기도 훌륭히 긁어주었다.

‘아무튼, 시간을 벌어 주고 있는 거니까.’

세상이 미쳐 돌아간 이후부터.

나는 줄곧 오류를 씌운 무명으로 공간을 들쑤시며 도망쳤다.

푸르카스가 만들어낸 놀이동산은 불안정했고, 힘의 흐름을 끊으면 통제를 잃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푸르카스의 낫이 은밀히 내 등을 노리기도 했다.

챙!

두 무기가 겹치며 불꽃이 튀었다.

오류를 덧씌운 무명은 흑색의 낫에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굳이 본인의 무기에 영혼을 정착시킨 이유가 있었어.’

푸르카스의 낫은 단단했다.

무엇이든 잘 베어버리던 무명으로 생채기조차 내지 못할 정도.

게다가 근원과 마기를 극한까지 밀어 넣어서 지금의 오류로도 자를 수 없었다.

- 흐흐흐, 그런 잡동사니로는 자를 수 없다.

푸르카스는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우리에게 약점을 잡혀서 침울해 있던 게 불과 몇 분 전일 텐데.

이토록 금방 활기를 되찾으니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근데 너도 나 못 죽이잖아.”

- 흥,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고 있는 주제에 너무 건방지구나.

“너도 초월자 후보치고는 너무 경박해.”

푸르카스의 말대로 승리의 여신은 나에게 썩소를 보여 주고 있다.

다행히도 클리프와 펠리스는 공간에 갇히지 않았지만, 내가 도와주러 가거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현지 가이드로 데려온 발라크도 든든한 방패 이상의 역할은 못 하고 있으니.

‘뭐, 썩소도 미소는 미소니까.’

나는 낫을 쳐낸 뒤에 존재감을 낮추며 자리를 벗어났다.

승리할 방법은 정말로 없을까? 친절한 초월자 후보님께서 말씀하시길, 내 검은 너무 구닥다리라고 하셨다.

해법은 바로 거기에 있다.

부러지지 않으면 더 강해진다.

나는 강아지남에게 들은 이 흑도의 비밀을 속으로 되뇌었다.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진화하는 검.

과거에 검귀의 경우에는 폰허부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검이 부러지고 말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나에게는 공격을 대신 받아 줄 동료가 있으니까.

“크아아악!”

발라크의 비명이 재차 공간을 울렸다.

이번에는 뾰족한 첨탑이 날아와 그와 누더기 드래곤을 덮친 것이다.

다른 쪽으로는 도움이 안 되더라도 저런 식으로 방패 역할을 잘만 해 준다면야.

내가 더욱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겠지.

샤악.

발라크의 도움에 힘입어.

나는 공간을 유지하고 있던 근원 하나를 더 끊었다.

그러자 공중에 있던 구조물들이 푸르카스의 통제를 벗어나며 허물어졌다.

후우웅.

그와 동시에 내 위치를 파악한 푸르카스의 공격이 날아왔다.

본성에 있던 건축물, 지면에 박혀있던 고목, 본성의 성벽 일부.

갖가지 물체가 날아왔으나 몸을 뒤틀며 간단히 피해 냈다.

“이런 거 말고. 제대로 된 거로 가져오라고!”

전투용 낫을 이용한 직접적인 타격이 아니라면.

이런 간접적인 수단으로는 절대 나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최소한 푸르카스에게는 그렇게 느껴지도록 언성을 높였다.

찌릿.

[통달한 자]와 [초감각]의 경고.

마침내 초월자 후보께서는 내 고성에 답을 내어 주었다.

극도로 응축된 마기.

눈앞에 푸르카스의 무기를 빼닮은 흑색의 낫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마기를 뭉쳐 빚어낸 수백의 날붙이는 한꺼번에 나에게 달려들었다.

저것들 틈에 진짜 무기를 숨겨서 허점을 노리겠다는 건가.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상관없다. 단숨에 쓸어버리면 되니까.

그림자 검술 3번, [달빛 베기]

오러와 마기.

서로 다른 기운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무명을 감쌌다.

신화에 도전하는 두 기운은 칼날을 수없이 분열시켰고, 나는 검을 늘어트리며 적절한 기회를 노렸다.

촤아악! 서겅.

분열된 무명의 칼날은 한 점으로 수렴하며 가짜 무기들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이제 앞에는 [달빛 베기]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무기만이 남았다.

무명의 성장용 경험치. 나는 그것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신성력과 혈마력을 더해서 오류를 완성시켰다.

채앵!

뒤이어 두 무기가 부딪치며 큰 소리가 주위로 울려 퍼졌다.

나는 느꼈다. 무명이 평소와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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