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74화 (174/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74화>

174. 지배자 (2)

네크베르 사막의 한복판.

총과 칼로 무장한 병사들은 모래 위에 피와 땀을 흩뿌리고 있었다.

머리에 뿔이 돋아난 자가 방아쇠를 당겼고, 그와 비슷하게 생긴 뿔족의 심장이 뚫렸다.

흑랑족의 발톱과 이빨이 흑랑족을, 와제트족의 주술이 와제트족을.

동족상잔.

그 끔찍하고 살벌한 피의 저주가 보란 듯이 펼쳐졌다.

스칼렛은 그 난장판 속에서 부단히 애를 쓰며 돌아다녔다.

“여기 부상자가 많습니다!”

“네, 갈게요!”

후방으로 이동해서 부상자들을 치유하고.

“전선 우측에 발록 부대가 나타났습니다!”

“제가 갈게요!”

최전선으로 달려가 마족의 정예 부대를 물리쳤고.

“탄약이 떨어졌다. 누가 뒤에 가서 가져와!”

“여기 있어요. 여기!”

[공간 이동]을 펼치며 탄약을 공수해 오기도 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녀가 지나가는 곳에는 언제나 문제가 해결되어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후우, 후우.”

적의 공세가 수그러들자 스칼렛은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이미 정신력의 한계를 벗어난 상태.

오히려 긴장감이 사라져서 피곤함이 확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누가 봐도 피곤해 보였는지, 병사들을 살피던 깨비가 판게아의 언어를 사용하며 다가왔다.

“스칼렛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네, 물론이죠! 이런 건 확 치료해 버리면 되거든요.”

샤아아.

스칼렛의 주위로 은은한 빛이 내려앉았다.

[원기 회복], 정신력을 포함해 모든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그녀의 기술이었다.

“그, 그래도. 이제 좀 쉬셔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부상자도 많고 적들도 다시 공격해 올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전장에 흩뿌려진 피와 살점은 대부분 대종족 의회의 것이 아니었다.

세뇌된 비마족들. 그들의 피가 거무스름한 모래를 붉게 만든 것이다.

스칼렛은 핏빛으로 물든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게다가 지금은 쉴 때가 아니에요. 우리가 상대한 적군의 숫자가 얼마나 되죠?”

“4만은 넘겼을 겁니다.”

“루카와 클리프에게 들은 정보대로라면, 아직 그 5배는 더 남았다는 거잖아요. 아직은 절대 쉴 수 없어요.”

아직 군대는 잘 버티고 있다.

적들이 아무런 능력도 없이 총과 대포로 무장된 전선으로 달려들었으니까.

스칼렛이 발아래에 있는 뿔족의 시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순간.

“끄아아아! 끄아악!”

“가만히 좀 있어 봐. 가만히 있으라고!”

근처에서 괴성과 함께 소란이 일어났다.

깨비와 스칼렛은 곧바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어갔다.

“무슨 일이냐!”

“대전사님. 그게, 세뇌된 동족을 하나 붙잡았는데. 전혀 말이 통하지 않고 소리만 지르고 있습니다.”

“잠시만요. 제가 봐 볼게요!”

스칼렛은 어수룩한 [림보 어]를 사용하며 병사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까뒤집혀진 눈. 침이 줄줄 흘러내리는 입. 핏줄이 솟아오른 팔뚝.

스칼렛은 빠르게 상대의 상태를 살폈다.

초월자의 힘으로 세뇌된 뿔족 청년은 붙잡힌 상황에서도 발광하며 적을 죽이려 했다.

“뭐가, 보이시나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에버딘이 물었다.

여태까지는 어쩔 수 없이 싸웠지만, 세뇌를 풀 방법이 있다면 상황이 바뀔지도 모를 터.

현장에 도착한 다른 대표와 지휘관들도 스칼렛의 답을 기다렸다.

‘근원의 힘이 보여.’

스칼렛은 텔런트를 사용하며 세뇌된 뿔족을 살폈다.

지금까지 보아 온 것 중에서는 가장 미약한 기운.

위치도 몸의 중앙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확실히 초월자의 힘이 정신에 파고들고 있어요.”

“그럼, 해결할 수 있는 건가요?”

“루카 의장님께서 푸르카스를 없애 주실 건데. 그냥 묶어 놔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 합니다.”

“아니, 성급하게 했다가 실패하면 어떡하죠.”

사방에서 각자의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여러 걱정이 오고 갔지만, 정작 스칼렛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대상자의 머리를 꿰뚫어 볼 뿐.

근원을 정신에서 분리해 뿔족 청년을 살려낼 수 있느냐만을 고민했다.

‘결합이 단단하지는 않아.’

스칼렛은 실마리를 찾고서 조금씩 근원의 힘을 분해했다.

스르르. 설탕이 물을 만나 흩어지는 것처럼, 초월자의 힘은 아주 천천히 대상의 정신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그녀의 텔런트가 동작을 멈췄을 때.

“으으으.”

발버둥 치던 뿔족이 앓는 소리를 냈다.

마구잡이로 괴성을 내지르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여, 여기가 어디입니까?”

뿔족 청년은 정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어깨를 떨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는 대종족 의회의 군대이니까요.”

“대종족……, 의회요? 헛!”

세뇌가 풀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뿔족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갑옷을 입고, 검과 총을 든 동족들.

자신과 비슷한 외형의 존재들이 어색한 느낌의 의복을 착용하고 있으니.

“뭔가, 뭔가 이상하네요. 어떻게 갑옷을?”

어떻게 노예가 갑옷과 무기를 착용하고 있는 거지.

뿔족 청년은 아마도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리라.

스칼렛은 바닥에 주저앉은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대종족 의회에 관련해서 들어본 적은 없으세요?”

“대종족인지 뭔지는 잘 몰라도. 노에 반란군과 관련된 건 들어봤습니다.”

“그게 우리예요. 여기에 보이는 모두가 마족에 대항해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왔어요.”

“그, 그렇군요.”

뿔족의 얼굴은 미묘했다.

처음에 대종족 의회를 마주하면 다들 저런 표정을 지었지.

미적지근한 뿔족 청년의 반응에 불만을 품는 자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그를 이해한다며 서서히 자리를 떠났다.

“아가씨, 일단 이 사람은 안정을 취하도록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겠네요. 혹시 일어나실 수 있으세요?”

“예, 주인님.”

“네?”

“아, 아니요. 음, 혼자서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

뿔족 청년은 갑자기 바뀐 환경에 잘 적응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동족을 죽이지 않고 살려 냈다는 사실에 모두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깨비와 뿔족 청년이 사라진 뒤, 주변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페도르 사장이 스칼렛을 찾았다.

“아가씨, 혹시 다른 사람들도 가능하겠습니까?”

“예, 어떻게 되어 있는지 느낌을 알았거든요.”

“호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데 기회가 많을지는 모르겠어요.”

밝은 미소를 짓던 페도르.

그는 굳은 얼굴로 장벽을 응시하는 스칼렛의 시선을 따라갔다.

지금껏 적들은 세뇌된 비마족을 위주로 편성된 군대를 내보냈다.

“저들도 이제부터는 진심으로 나오겠군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스칼렛의 시선의 끝을 쫓은 페도르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장벽 위에 선 악마, 거대한 발록의 체형을 가진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살비스. 루카가 만난 적이 있는 악마예요.”

스칼렛은 전의를 불태우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 * *

같은 시각.

나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열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건 언제나 등골이 오싹오싹하네.’

누더기 드래곤이 뿜어낸 불길은 세상을 불태울 기세로 검은색 원기둥을 덮쳤다.

과연 드래곤 브레스가 근원으로 만들어 낸 물체를 무너트릴 수 있을까?

처음에는 걱정이 앞섰지만, 불과 몇 초 뒤에 그 생각은 단순한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푸화아아!

성난 불길에 공기가 들끓고, 공간이 통째로 불타올랐다.

화염에 적중한 원기둥 표면이 증발해 버렸으며 내부에 있던 마기가 액체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몸을 사리면서 기운을 끌어올렸다.

‘이걸로 끝나지는 않겠지.’

상대는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선 존재.

변신 도중에 한방 뚜드려 맞았다고 해서 죽을 리가 없다.

감각을 칼날처럼 예리하게 세우고 있던 순간.

스릉.

푸르카스가 있던 자리에서 서슬 퍼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드래곤의 등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저 불안한 마찰음이 무엇이든, 푸르카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이왕이면 한 방이라도 더 때려 놓아야 했다.

그림자 검술 4번, [그림자 난무]

고농도의 오러와 마기가 감싼 흑도.

무명의 칼날에서 검붉은 빛무리가 감도는 흑색의 검강이 튀어 나갔다.

거의 동시에 생성된 수백, 수천 개의 검강은 빠른 속도로 공간을 점령했다.

촤촤촤촤!

모든 기운과 물질이 한데 섞이자 폭풍이 일어났다.

발라크와 푸르카스의 기운이 부딪히며 반쯤 초토화된 공간.

그곳에 나타난 검강들이 그 모두를 뒤엎으며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푸르카스를 감싸던 막이 완전히 사라졌어. 이제 곧 움직일 거야.”

나는 이변을 감지하고 재빨리 누더기 드래곤의 등 위로 올라탔다.

기운들이 부딪치며 생긴 에너지 폭풍 때문인지, 폭풍 속에서 푸르카스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림보 본성의 하늘을 몇 바퀴 돌자.

- 이제부터는 내가 친히 나서 주마.

푸르카스는 온갖 허세를 떨며 목소리를 냈다.

이어서 우리보다 더 높은 상공 위에서 결집하는 마기가 감각에 걸렸다.

츠츠츠, 주위에 퍼져 있던 검은색 기운들은 안개처럼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놈이다!”

평소와 다르게 발라크의 목소리가 커졌고, 나 또한 곧바로 기운을 끌어올리며 높이 도약했다.

그림자 검술 5번, [암적뢰]

쿠구궁.

번개에 가까운 전류가 튀며 몸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공기를 찢으며 장소에 도착하니, 마기가 응집되며 인간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무명에 오류를 담아 휘둘렀다.

슈악.

무명을 감싼 오류는 형태를 만들고 있던 근원의 흐름을 흐트러트렸다.

그런데 느낌이 아주 묘했다.

제아무리 오류가 무엇이든 다 베어 낸다지만, 조금 전에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고 공간을 잠식한 근원의 움직임을 살피니, 그제야 어찌 된 영문인지 감이 잡혔다.

“아주 재밌게 노네?”

나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피식 웃었다.

검은색 원기둥이 부서진 건 우리의 공격 때문이 아니었다.

푸르카스는 단순히 우리와 싸울 준비를 끝냈을 뿐이다

- 감이 좋구나? 괜히 인간의 몸으로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푸르카스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울렸다.

여전히 녀석의 위치는 알 길이 없었고, 발라크도 고개를 두리번거릴 뿐.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나는 감각을 곧추세우며 입을 열었다.

“발라크, 푸르카스는 우리 곁에 있어.”

“무슨, 말이지?”

“네가 검은색 원기둥을 보면서 말했잖아. 푸르카스가 변신을 하고 있다고.”

“그렇다.”

발라크의 의견은 적중했다.

다만 변신한 후의 모습은 딱히 중점을 두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생물체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푸르카스는 신체를 포기하고 이 공간에 스며들었어.”

하지만 상대는 어떠한 생물로 변신한 게 아니다.

림보 본성, 이 공간 자체를 집어삼켰다.

완전한 초월자도 아니면서 그게 가능한가 싶기도 하지만, 푸르카스로 보이는 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설명을 끝내기 무섭게 주변을 장식하던 근원의 흐름이 뒤바뀌며 나를 옥죄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근원의 현란하게 움직인다 한들.

그걸 보고 인지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가 되겠는가.

나는 무명을 움직여 주위로 다가오던 근원을 통째로 잘라 냈다.

“이제 그런 건 안 통하지!”

과거에 라일라크나 바신과 싸울 때.

푸르카스는 시간을 자유자재로 조작하며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하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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