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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로 살아남기-173화 (173/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73화>

173. 지배자 (1)

림보 영지 내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이 마족들의 세계는 그 어느 곳보다 어두웠다.

다른 마족의 땅은 노을이 진 것과 비슷하다면, 림보의 내부 영지는 초저녁에 더 가까웠다.

“태양이 있는데도 어둡다니. 정말 놀랍구나.”

펠리스는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더니 뭔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검귀의 뒤를 따르는 그림자 광신도가 아니지.

반면에 클리프는 경계심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려 누군가에게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저렇게 대놓고 쳐다보니 부담스럽군. 저 둘을 데려온 이유는 무엇인가?”

누더기 드래곤.

그 위에 올라타 우리와 나란히 날고 있던 발라크는 기계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뭐긴 뭐야, 만약을 위해서 준비한 뒤통수 보호대지.

“도움이 되니까. 푸르카스는 너와 내가 상대하겠지만, 다른 마족들이 있으면 어쩌려고.”

“흠, 알았다.”

“그리고 동료를 데려온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는 발라크 옆에 붙어있는 키메라를 가리켰다.

서큐버스의 날개, 단단한 발록의 몸, 웨어울프의 이빨 등등.

몇 가지 마족과 생물체가 섞였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근처에 있었다.

“같은 의미다. 푸르카스의 부하를 상대할 수단은 필요하지 않겠나.”

“그럼, 서로 불만은 없는 거겠지?”

“알겠다.”

발라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종족이 융합된 키메라, 간편하게 ‘잡탕이’도 그의 주인처럼 무뚝뚝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결국, 푸르카스를 없앤 다음을 대비하려는 건 똑같다는 이야기지.

“클리프, 너도 괜히 자극하지 말고.”

“미안, 그래도 옆에서 마기가 줄줄 흐르는데 어떻게 관심을 끄겠어?”

“그거야. 그렇지만.”

발라크는 푸르카스처럼 아주 긴 세월 동안 존재해 왔다.

그 때문에 여러 대악마의 마기를 흡수한 나와 겨루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기운을 지녔다.

거기에 더해서 다량의 드래곤 하트를 장착한 키메라까지.

“나는 저 기이한 드래곤이 더 신경 쓰이는구나.”

나도 결사단주의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용의 머리가 3개나 달린 키메라는 4개의 드래곤 하트를 전력원으로 삼아 움직였다.

누더기 드래곤이 보유한 마나는 우리 셋의 오러를 합친 것보다도 많을 정도.

단순히 기운의 양만을 따지면 주인인 발라크조차 압도했다.

- 아마, 발라크 본인보다 저 키메라가 주력일 거예요.

나는 펠리스와 클리프에게 사념을 보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발라크는 누더기 드래곤을 다루는 데 능숙하지 못했다.

드래곤 하트를 4개나 사용해서 만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 저 키메라가 주력이라면, 발라크 본인은 근원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야?

- 그럴지도 모르지. 나도 확인해 본 적은 없어.

발라크는 오류를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만한 준비성도 없었다면 푸르카스에게 맞서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발라크 본인의 힘으로 오류를 사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제 푸르카스의 방해는 더 이상 없군. 그렇지 않나?”

우리가 열심히 뒷담화를 까고 있을 때.

발라크는 무심하게 말을 내뱉었고, 우리는 급히 대화를 멈추고 딴청을 피웠다.

나는 잠시 다른 곳을 쳐다보다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어? 음, 확실히 지금은 조용한 편이기는 하지.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여기까지 오면서 공격을 받은 건 서너 번.

본성에 가까워진 이후부터는 그마저도 사라지기는 했다.

“푸르카스는 절대로 손 놓고 기다리는 법이 없지. 분명 무슨 생각이 있을 것이다. 본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공격을 멈췄다는 건 다른 걸 준비하고 있을…….”

뭐야, 무서워.

발라크는 속사포처럼 푸르카스의 이야기를 쏟아 냈다.

광기 어린 키워드들을 전부 빼고 남은 것들을 취합하자면 이렇다.

푸르카스는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대충 이런 뜻이었다.

“뭘 준비하고는 있겠지, 문제는 그게 뭐냐는 거 아니겠어?”

“그건 나도 잘 모른다.”

“그럴 줄 알았어.”

당연한 소리를 뭐 이리 장황하게 풀고 있는 건지.

나는 입을 다물고 본성이 있는 방향으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뾰족한 첨탑과 성체, 허공을 질주하는 로시난테의 머리 너머로 여러 인공물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본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근데 말이야. 푸르카스가 여기 있는 건 맞아?”

내가 살짝 고개를 틀어서 물어보자 발라크는 바로 답을 내주었다.

“놈은 근원을 취하고 수백 년이 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인 거 같은데.”

“전혀 다르다. 나는 영지 안에서는 계속 움직였다.”

아무렴, 방에서 안 나오는 거와 집에서 안 나오는 건 다르지.

“그러니까, 푸르카스가 본성에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말이야?”

“아니, 움직이지 못한다. 자격도 없으면서 대량의 근원을 원한 대가겠지.”

잘 알고는 있네.

나도 놈에 대한 정보는 두 관리자에게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심지어 푸르카스가 본인의 신체를 유지하기 힘들 거라는 내용도 들었다.

분에 넘치는 힘을 취한 업보. 푸르카스가 마신이 가지고 있던 다른 초월자의 근원까지 무리해서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마신은 마계에 있던 근원을 모두 흡수하려고 했었지. 그렇게 무리하다가 푸르카스에게 당한 거고.’

강아지남이 말하길.

세계수는 초월자를 죽이고 근원을 바로 흡수하지 않았다.

근원을 보관하면서 천천히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했다.

반면에 마신은 욕심을 부렸다. 초월자의 모든 근원을 합쳐서 단숨에 삼켜 버린 것이다.

‘턱을 빼고 입을 찢어도 안 들어갔겠지.’

마신조차도 체화하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기운이다.

그것을 절대자에 불과한 푸르카스가 흡수했다면?

살아 있는 게 용하다고 볼 수 있을 터. 온갖 허세는 다 잡았으나 실상은 한계에 봉착한 셈이다.

“뭐, 분수도 모르는 머저리에게 우리 둘이 덤비는 상황이지만.”

“그래서 비겁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설마. 여기가 무슨 격투장도 아니고. 다만 우리도 처지를 잘 이해하자는 거지.”

상대가 어떻든.

우리가 그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근원을 얻기 위해서라면 일단 푸르카스를 쓰러트려야 한다.

⬢[???]⬢

?? 완료: (오러(마나)/마기/신성력/혈마력)

?? 미완료:(?)

> 진행도 효과: 은폐(신화), 파괴력 증가(신화), 저항(영웅), 갈취(전설)

> 잔여 ??: 1

---------

나는 막간을 이용해 상태창을 확인했다.

텔런트 스킬의 등급이 SS로 올라가면서 흡수할 수 있는 기운의 개수가 늘어났다.

즉, 근원을 흡수할 준비는 마쳤다는 이야기.

전쟁을 준비하는 몇 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텔런트만 수련한 보람이 있었다.

‘오류를 연습하면서 숙련도가 많이 올랐지.’

특히 마공학 리볼버 수련이 빛을 발했다.

가뜩이나 다루기 어려운 오류를 더욱 힘든 방식으로 수련했으니 어련할까.

아무튼, 식사할 음식과 식기까지 모두 마련했으니.

‘이제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야.’

* * *

조금 뒤.

지평선 근처에서 거대한 성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림보 본성. 푸르카스의 소굴이 등장하자 모두 숨을 죽이며 앞을 응시했다.

클리프는 연달아 숨을 길게 들이 내쉬었고, 펠리스도 사복검의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긴장을 가라앉혔다.

“푸르카스는 어디 있는 거야?”

클리프는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주변은 근원의 기류로 가득 찼다. 여태까지가 단순한 파도였다면 이제는 소용돌이의 내부라고 봐도 좋을 터.

클리프와 펠리스는 기감이 벽에 막힌 것처럼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있어.”

나는 차분하게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림보 본성의 중앙에 있는 검은색 원기둥.

어둠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한 암흑색에, 높이는 어지간한 첨탑보다도 높았다.

게다가 크기도 본성의 중앙을 통째로 점유할 만큼 거대했으니.

“저 검은색 공간 안에 푸르카스가 있는 거야?”

클리프는 놀란 얼굴로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래, 저렇게 거대하니 건물로 오해할 수도 있지.

나는 국밥이의 대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기감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저건 건물이 아니었다.

“저게 푸르카스야.”

“……방금 뭐라고 하였느냐?”

대답은 펠리스에게서 나왔다.

검은색 원기둥. 나도 저게 생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크기와 높이는 그렇다 쳐도, 우리가 다가오는 동안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으니까.

“푸르카스. 역시나 그랬군.”

우리를 본성으로 안내해 준 발라크조차 저 형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네가 놀라고 있으면 어떡해? 저게 무슨 상태인지 말을 해 줘야지.”

“공간을 압축하고 본인의 마기를 채워 넣어 싸우기 적합한 형태로 신체를 재가공하는 중이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발라크의 설명을 들으니 대충 무슨 상태인지는 이해가 되었다.

여태까지 우리는 푸르카스의 형태를 추측할 뿐이었다.

‘실제로 무슨 형태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지.’

저 원기둥은 마족 태생인 푸르카스에게 최적의 환경.

어떤 형태로든 신체를 가공하여 전투에 유리한 형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터.

발라크의 말대로, 상대는 우리와 맞서 싸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뭐가 어쨌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하나라는 이야기네!”

“그래, 기다려 줄 필요는 없겠지.”

상대가 변신 중이라고?

그렇다면 당연히 변신이 완성되기 전에 흠씬 두들겨 패줘야지.

발라크의 누더기 드래곤이 날개를 크게 휘둘렀고, 동시에 로시난테의 새하얀 피부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뭐야! 둘이 무슨 말을 했길래 갑자기 돌격이야?”

“……이제 싸우는 거냐.”

클리프와 펠리스는 마족의 언어를 몰랐기에 화들짝 놀랐다.

특히 국밥이가 손잡이를 꽉 말아쥐며 소리를 질렀다.

“푸르카스가 싸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어. 변신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싸울 수는 없잖아?”

“뭐야? 그러면 당연히 먼저 패고 봐야지! 당장…….”

불의와 비겁함에 물든 클리프.

그가 당당하게 비겁한 말을 쏟아 내려는 순간.

- 막아라.

강대한 기운을 담은 사념이 공간을 쓸고 지나갔다.

나름 다급해 보이는 상대의 목소리에 내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푸르카스에게는 나 혼자만 가야겠는데?”

“어째서?”

“저기에, 우리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놈들이 오고 있거든.”

림보 본성의 근처에서 날아오른 일련의 무리.

푸르카스의 막대한 기운에 가려져 인식하지 못했지만, 본성 근처의 작은 성체에는 마족들이 숨어 있었다.

“뱀파이어잖아.”

“하이 뱀파이어도 섞여 있구나.”

일족 전체를 끌고 왔는지 머릿수가 상당했다.

어차피 푸르카스와 싸우려면 방해물은 없는 게 좋을 터.

본인들의 상대를 알아챈 두 사람은 무기를 뽑아 들었다.

라일라크, 나는 뱀파이어 속에 숨어있는 악마를 발견하고서 입을 열었다.

“저 중에 라일라크라는 하이 뱀파이어는 조심해야 해.”

“알겠어. 나도 어떤 놈인지 듣기는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꼭 이기기나 해라.”

“전투가 끝나고 보자꾸나.”

휙.

바람을 일으키며 두 사람의 신형이 아래로 하강했다.

하늘로 솟아오르던 박쥐들은 즉시 핏빛의 기운을 뿜어냈다.

물론, 발라크의 키메라인 잡탕이도 둘의 싸움을 돕기 위해 드래곤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번쩍!

로시난테는 두 사람이 등에서 내리자 일직선으로 질주했다.

그렇게 본성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이제 됐어. 너도 다른 곳에 숨어 있어!”

나는 로시난테의 등에서 뛰어내리며 지시를 내렸다.

새하얀 말은 우리의 작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생존을 걱정할 차례.

로시난테가 활약할 시간은 우리가 푸르카스로부터 승리한 다음이었다.

- 내 키메라 위에 올라타라.

성격도 좋으셔라.

나는 발라크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누더기 드래곤 위로 올라갔다.

뒤이어 키메라의 가운데 머리에서 농도 짙은 마나가 느껴졌다.

드래곤 브레스.

파멸의 기운이 담긴 화염 덩어리가 드래곤의 입에서 맴돌았다.

목표는 당연히 본성의 중심에 있는 검은색 원기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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