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72화 (172/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72화>

172. 영광의 깃발 (5)

쿵, 쿠구궁, 쿵!

포탄이 비처럼 내려 지면을 두들겼다.

진지를 만들고 그 뒤에 숨은 병사들은 방아쇠를 당겼고.

적들은 기관총과 소총 앞으로 무모하게 달려들었다.

죽는 이는 비마족, 죽이는 이도 비마족.

의지를 갖추고 달려드는 적들을 살생하는 것도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법이다.

하물며 상대가 누군가에게 지배되어 허수아비가 되었다면?

심지어 자신과 같은 외형과 혈통을 지닌 동족이라면 얼마나 끔찍할까.

“적들의 공격은. 잘 막아 내고 있습니다.”

지휘부 막사 앞.

깨비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전황을 보고했다.

오히려 상황이 유리하니 더 화가 나겠지.

아군의 진지로 뛰어오고 있는 비마족들은 본인의 의지를 가진 게 아니니.

“힘들겠지만, 상대의 계략에 넘어가지는 마. 놈들이 바라는 건 이성을 잃고 날뛰는 거니까.”

“예, 주군…….”

깨비는 힘없이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성문을 열고 나타난 비마족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그 숫자는 1만, 앞으로 최소한 그 10배에 달하는 비마족이 남았다는 뜻이다.

“놈들은 우리가 무리하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무슨 말인지 알겠지?”

깨비는 조금씩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원거리에서 화력을 쏟아붓고 있다.

그런데 죄책감이나 분노 때문에 판단력을 잃고 군대를 섣불리 움직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저 장벽에 비마족만 있으리란 법도 없지.’

푸르카스 휘하의 악마들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계속 다른 전선군의 전황을 전해 들었지만, 아직 동부와 북부에서도 악마를 보았다는 보고는 없었다.

우선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아야 할 터.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오러를 담은 지휘관의 목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다.

무작정 달려든 비마족들이 총탄과 마법에 의해 모두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1만.

수많은 동족이 단 10분 사이에 사라졌다.

내 곁에 선 깨비는 비통한 얼굴로 싸늘한 주검이 된 동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르카스의 허수아비가 된 비마족들은 대부분 뿔족과 와제트족.

대종족 의회의 군대는 대부분 뿔족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분위기는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깨비야, 네가 직접 전선으로 가서 신병들을 다독여 줘.”

“……알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몇 마디 위로가 먹히겠냐만.

그래도 지휘관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병사들의 상태를 자세하게 알아야 더욱 적합한 작전을 짜고 행동에 옮길 수 있을 테니까.

“후방에 있는 탄약부터 옮겨라. 빨리 움직여!”

“전선에 부상자는 없습니까?”

“중상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주술사분들께서는 편히 계셔도 됩니다.”

적의 육탄 공세가 수그러진 사이.

우리 진영은 훈련받은 대로 전선에 재보급을 하고, 부상자들을 살피며 바삐 움직였다.

다행히도 군대가 붕괴할 만큼의 혼란은 없었네.

나는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견함도 느꼈다.

“상황을 보니, 잘 버티고 있는 모양이군.”

“오셨습니까? 근위대 쪽은 상황이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로빈은 막간을 이용해 지휘부 막사에 들렸다.

조금 전의 전투에서 마법 병단은 뛰어난 기량을 보여 주었다.

마법사 50명이 쏟아 낸 화력이 신병들의 총탄 세례에 살짝 못 미쳤을 정도.

“우리야 나쁠 것도 없지. 그보다 대동맹에서 연락이 왔네.”

“악마가 나타났다고 하던가요?”

“그렇다네. 랭커셔 후작이 마법으로 장벽 일부를 허물어 버리자 악마가 둘이나 나타났다더군.”

로빈 공작은 동부 전선군의 전황을 간략하게 축약해 주었다.

유리엘은 훌륭한 레이더가 되어 근원의 위치와 공략법을 일러주었고, 시계탑주는 전면에 나서서 돌벽을 부수며 돌아다녔다.

대동맹의 역할은 적의 전력을 최대한 많이 끌어들이는 것.

그런 의미에서 대동맹은 본인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악마 둘도 푸르카스의 지원을 받아서 더욱 강해졌을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이 시점에 멀쩡한 곳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겠나?”

“부정은 못 하겠군요. 근데 두 악마 말입니다. 혹시 제가 이전에 만났다던 그놈들이었습니까?”

대동맹에는 3번째 벽을 넘긴 강자가 많다.

프레스턴, 빅토리아 5세, 알베르트 후작, 트리시아 여후작. 유리엘.

이 사람들만 해도 악마 하나 정도는 능히 상대할 수 있을 인물들이다.

“아니, 자네가 말했던 놈들은 아니라고 했었네.”

“그렇군요. 아무래도 이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통신구를 꺼내며 말했다.

어차피 푸르카스를 처치하지 못하면 악마들은 계속 부활할 것이다.

그러니 적이 모든 전력을 쏟아 내는 이 시점, 지금부터가 우리가 움직일 적기였다.

“자네의 감이라면 항상 옳았지. 스칼렛 양은 진료소에 있나?”

“예, 지금은요. 나중에 전황이 급하게 돌아가면 나서서 도와드릴 겁니다.”

“알겠네. 무운을 빌도록 하지.”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로빈에게 짧은 작별을 고한 뒤.

나는 지휘 막사를 떠나며 두 사람에게 사념을 쏘아 보냈다.

- 클리프, 그리고 단장님. 이제 갈 때가 되었습니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사념을 쏘아 보내기 무섭게 두 사람은 순식간에 내 앞으로 나타났다.

“이제 출발하는 거냐?”

“가기 전에. 발라크는 어떻게 할 건데.”

펠리스는 출발하는 시기를, 클리프는 승리할 방법을 물었다.

확실히 이 둘은 성향이 확 갈리네.

나는 수정구에 오러를 불어넣으며 말했다.

“다들 성격도 급하셔라. 일단 발라크와 약속부터 잡고 말해 드릴게요.”

* * *

쩌어엉!

의회의 군대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

그 위로 높이 뻗어있는 반투명한 보호막에 벼락이 꽂혔다.

강력한 관통력을 이용한 일점돌파. 시커먼 보호막에는 균열과 함께 사람과 말이 지나갈 정도의 틈이 생겼다.

‘강도 자체는 크게 강하지 않아.’

나는 [암적뢰]로 장막을 뚫고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단순히 닿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소멸해 버리는 장막.

하지만 마기와 오러를 최대한 무명과 신체에 욱여넣으니 그다지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히히힝!

때마침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하늘에 섬광이 번쩍였다.

클리프와 펠리스를 등에 태운 로시난테는 보호막의 틈을 통과해 내 앞에 섰다.

작전에 맞춰 내가 장막을 뚫고 들어가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로시난테가 안으로 따라 들어온 것이었다.

“옳지, 옳지. 일단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줘.”

나는 로시난테의 등에 올라타며 그리 말했다.

출발하기에 앞서 뒤에 남은 대종족 의회에게 전할 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병력의 수가……. 비마족 노예를 통째로 데려온 거였어?’

밑에서 느껴지는 살기.

우리를 올려다보는 엄청난 숫자의 눈빛이 몸을 파고들었다.

장막을 넘으며 기감을 방해하던 근원의 힘에서 벗어나자, 온전히 그들의 숫자를 헤아릴 수 있었다.

“맙소사, 스칼렛! 마족이랑 비마족을 합치면 숫자가 20만은 넘겠어!”

드넓은 사막을 가득 채운 군대.

클리프는 소리를 지르며 통신구 너머에 있는 스칼렛에게 자세한 정보를 전달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의 싸움을 도와주고 싶지만.

‘여기서 힘을 쓰는 건 낭비야.’

어차피 림보 영지의 마족들은 푸르카스의 힘에 의지하고 있다.

초월자의 힘을 없애는 게 가장 좋고 빠른 방법이리라.

나는 앞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을 느끼며 클리프에게 소리쳤다.

“악마도 하나 대기하고 있다고 전해!”

“스칼렛, 들었지? 여기에 악마도 하나 있대. 조심해!”

알겠어. 모두 몸 성히 돌아와!

수정구의 반대편에서 스칼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신이 끊어진 직후, 로시난테는 전속력으로 내달리며 하늘을 갈랐다.

번쩍!

섬광이 번쩍였고.

로시난테의 속도를 직접 체감한 클리프가 안장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잠시만, 이거 왜 이렇게 빨라?”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국밥이는 로시난테를 타 본 적이 없었구나.

나는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돼야 적진을 뚫고 들어갈 만하지!”

“하긴, 그런데 발라크와는 언제 만날 거야?”

“일단 사막을 지나서 합류하기로 했어. 10분이면 여길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로시난테의 속도라면 2시간 안에 림보의 끝에서 끝까지 갈 수도 있다.

본성까지는 대략 30분 정도.

아무런 방해가 없다면 빠르게 본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라크도 장벽을 넘어왔나 보네.’

누더기 드레곤과 검은 망토의 존재감.

나는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는 현지 가이드의 기운을 주시하며 나아갔다.

그렇게 네크베르 사막을 벗어나 림보 영지 내부에 들어섰을 즈음.

“앞에서 뭔가가 온다.”

나는 그리 말하며 무명을 뽑았다.

상대의 정체는 하피. 조류와 인간의 외모를 섞은 듯한 마족이었다.

몇 초 뒤, 나머지 두 사람도 적들의 기운을 감지하고 무기를 빼 들었다.

“로시난테는 어쩌지?”

클리프는 허공을 질주하고 있는 새하얀 말을 물끄러미 가리켰다.

“로시난테는 괜찮을 거야. 문제라면 우리에게 있지.”

로시난테는 악마에 버금가는 신체 강도를 가지고 있다.

즉, 고작 하피의 공격에 당할 리는 없을 터.

반면에 등에 붙어 있는 우리는 공격에 당해 낙마할 가능성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놈들은 나에게 맡겨라.”

잠자코 있던 결사단주.

펠리스는 사복검을 꺼내며 사방으로 휘둘렀다.

확실히 단주님의 무기라면 다가오는 공격을 모두 막아 낼 수 있겠지.

“너는 그대로 쭉 달려.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히힝.

목을 쓰다듬으며 로시난테를 진정시키자, 새하얀 말은 알겠다는 듯 짧게 소리를 냈다.

여기 모인 이들은 초월자가 되기 직전의 대악마를 죽이겠다고 자원한 사람들.

겨우 중급 마족인 ‘하피’가 이런 또라이들의 행진을 막을 수 있을까.

끼야아아!

고막을 찢는 듯한 하피들의 비명.

로시난테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소리의 진원지를 파고들었다.

넓게 펴진 그물망처럼 정면을 감싸며, 하피들은 말 등 위에 타고 있는 우리 셋을 노렸다.

그 순간.

묘한 위화감이 내 몸을 쓱 훑고 지나갔다.

나는 무명에 오류를 덧씌우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역시나 공간이 미묘하게 휘어지며 하피 무리와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촤촤촥!

펠리스의 사복검이 주르륵 늘어나며 적들을 찢어발겼다.

그녀의 검은 멈추지 않고 우리에게 돌진하는 마족들을 물리쳤다. 그런데도 하피들을 따돌리지는 못했다.

원래라면 몇 초 만에 하피 무리를 따돌렸겠지만, 구부러진 공간을 로시난테가 빙빙 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탈출할 방법은 간단하다.

힘이 흐르는 방향.

나는 통나무의 나이테처럼 주위를 빙빙 돌며 공간을 막고 있는 힘의 흐름을 보았다.

그리고 흐름의 반대 방향으로 오류가 깃든 무명을 휘둘렀다.

우리를 가두었던 근원의 흐름이 맥없이 끊어졌고, 구부러졌던 공간은 단숨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히히힝!

드디어 탈출이라는 듯.

로시난테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하피 무리를 따돌렸다.

클리프와 펠리스도 공격에 당하지 않고 무사히 등에 들러붙어 있었다.

“휴, 진짜 보통이 아니네.”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건 환영 인사 정도일걸?”

“스승님, 갑자기 후회가 몰려오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이상한 걸까요?”

국밥이는 신세를 한탄하며 폰허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움찔, 클리프의 말을 듣고서 누군가가 작게 몸을 떨었다.

스승님이라는 말을 듣고서 목석같던 펠리스가 아주 살짝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앞으로 이 둘이 합을 맞춰서 움직여야 할 텐데.

‘300년 전부터 이어진 원수 콤비라니.’

뭐, 이 둘은 푸르카스에 대항해서 싸우려고 데려온 건 아니니까.

나는 기감을 펼쳐 습격에 대비하는 한편, 우리를 본성으로 안내할 현지 가이드의 위치를 살폈다.

하피들과 싸우는 사이, 누더기 드래곤은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였다.

- 늦지 않게 도착했군.

발라크는 멀리서 사념을 날려 말을 걸었고.

- 당연하지. 바로 본성으로 가자고.

나도 점점 다가오고 있는 누더기 드래곤을 향해 사념을 보냈다.

현지 가이드와 합류한 뒤. 우리는 푸르카스와 결전을 펼칠 림보 본성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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