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71화 (171/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71화>

171. 영광의 깃발 (4)

네크베르 사막의 중심 부근.

우리는 길게 이어진 성벽에서 몇 km 정도 떨어진 곳에 야영지를 세웠다.

만리장성처럼 사막 전체를 아우르는 긴 장벽, 그 구조물의 상단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수백 개의 깃발이 보였다.

“루카, 장벽 너머에 뭐가 있는지 보여?”

스칼렛은 빛을 뿜어내며 상대의 진영을 살피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태껏 그녀의 텔런트는 막힌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장벽은 [간섭]의 효력을 거의 완벽히 막아 냈다.

“감각에 뭔가가 느껴지기는 하는데.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어.”

나의 경우에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

[통달한 자]와 [초감각], 두 특성을 통해 장벽 뒤편에 엄청난 숫자의 무언가가 있음은 알 수 있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는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흐릿해서 간파하기가 어려웠다.

‘장벽에 깃든 근원이 적들의 숫자와 정체를 집요하게 은폐하고 있어.’

림보 영지에 들어온 뒤.

우리는 근원을 이용한 푸르카스의 방해 공작을 수도 없이 많이 받았다.

그 덕분에 더욱 능숙하게 초월자의 힘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갈고 닦은 그 감각으로도 온전히 꿰뚫어 볼 수가 없다는 거지.

“나도, 정확하게 뭐가 있는지는 안 보여. 아무래도 반드시 병력을 숨겨야 할 이유가 있나 봐.”

“그러면 여기서 발이 묶이는 거 아니야?”

“일단 대동맹이 도착하고 전투가 시작되면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거야.”

“으음.”

스칼렛은 답답하다는 듯이 침울한 소리를 냈다.

물론, 우리가 아무것도 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대동맹에서 구매한 대포를 성벽에 쏴 보거나 마법을 날려보기도 했다.

‘여태까지 본 성벽과 성능은 크게 다르지 않아.’

무너진 성벽이 복구되는 시간이 더 짧거나 하지는 않았다.

유독 효과가 좋아진 부분은 저들의 기운과 정체를 감추는 기능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대동맹이 도착하지 않은 시점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할 수는 없을 터.

우리와 발라크의 군대는 적의 동태를 살피며 대기하고 있었다.

“의장님, 주술진의 설치가 끝났습니다.”

열심히 장벽을 째려보고 있을 무렵.

사막의 주술사, 와제트 종족의 대표인 아누스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막이 고향이라고 했었나.

“어쩐지 조금 전부터 공기가 묘하게 시원하더라니. 효과가 상당히 좋네?”

“아신 장로님께서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도움도 많이 받았겠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주술사들의 실력도 많이 성장한 거 아니겠어? 이제는 자신감을 좀 가져도 좋아.”

아누스는 내 말을 듣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봐주시니 저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제 막사로 돌아가 대기하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미라처럼 바싹 마른 육신.

와제트 종족의 대표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목을 수그렸다.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려 애썼지만, 딱 보기에도 아누스의 상태는 평상시와 달랐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

“예, 의장님.”

“네크베르 사막이 와제트 종족의 고향이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네.”

“조상들께서 살아오신 땅에 온 건 맞습니다. 하지만.”

아누스는 말을 잊지 못하고 잠시 입을 움찔거렸다.

나는 기다려 주었다. 지금은 모두가 힘을 합쳐서 적을 물리쳐야 할 시기.

가능하다면 불필요한 상념은 모두 털어내야 했다.

“여기는 저희가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사막이 마기에 물들어 있어서?”

“예, 원래 네크베르 사막은 이렇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평범한 모래사막이었죠.”

와제트 족은 노예가 된 이후에 많은 수가 네크베르 사막을 떠나야 했다.

마족들에 의해 상품처럼 거래되었고, 그 때문에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고향의 땅을 밟지 못했다.

그런데 아주 어렵사리 돌아온 땅이 마족들에게 오염되어 버렸다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짧은 기간도 아니고 최소 수백 년 전의 이야기니까요.”

아누스는 처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다른 비마족들도 그렇고. 여기까지 오며 저희의 동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좀 무거웠던 것 같습니다.”

림보 영지에 있을 동족들은 어디로 가버렸나.

아누스는 마음을 어지럽히던 번뇌를 풀어헤쳐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자신의 뿌리가 손상된 느낌. 그 고통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을 터.

스칼렛은 아누스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분명, 동족들도 살아 있을 거예요. 제가 꼭 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스칼렛 아가씨. 저희도 두 분을 믿고 있습니다.”

“푸르카스만 없애면 말끔히 해결될 일이야. 조금만 기다려 얼마 안 남았어.”

저 장벽만 남으면 곧바로 림보 본성이니까.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스칼렛은 황급히 내 입을 막았다.

“루카, 내가 예전에 연극을 보면서 들었는데. 그런 말은 하면 안 돼!”

“읍읍.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 끝인가? 해치웠나? 나는 꼭 집으로 돌아갈 거야. 등등! 그런 말들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스칼렛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과학적으로 입증된 죽음의 단어들을 쏟아 냈다.

그 광경을 본 아누스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저는 의장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니 저희도 실망하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죠.”

“맞아요. 사막은 전쟁이 끝난 뒤에 정화할 방법을 찾아보면 되죠.”

“스칼렛의 말이 맞아. 마기에 침식되었어도 다시 복구할 수 있을 거야. 너희의 주술로도 말이야.”

“예, 이제 저희에게도 힘이 있으니까요.”

아누스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가 자리를 떠났다.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주술사들의 마음을 다잡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뒤돌아서는 아누스의 발걸음이 가벼웠으니 괜찮겠지.

나는 다시 광활한 사막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안타까워. 힘들게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주변에는 적밖에 없다는 이야기잖아.”

반면에 스칼렛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아누스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세컨드 시티로 갔을 때, 스칼렛은 가족을 만나도 환영받지 못할까 봐 걱정이 많았다.

그런 과거가 있기에 아누스에게 짙은 동정심을 느끼는 것이리라.

“그래도 비마족이 갑자기 사라졌을 리는 없잖아. 어딘가에…….”

나는 스칼렛을 위로하려다가 순간 말을 멈췄다.

장벽의 너머, 그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대량의 병력이 집결되어 있다.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 숫자는 못 해도 10만 이상.

과연 림보 영지에 저만한 마족을 우리에게 쏟아 낼 여력이 남아 있을까?

“……스칼렛, 아무래도 장벽에 있는 병력은 마족이 아닌 거 같아. 일단 사람들과 회의부터 해야겠어!”

내가 황급히 몸을 돌리려는 순간.

막사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빈 공작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아주 다급했고, 이마에서는 흥건하게 땀방울이 맺힌 상태였다.

“대동맹이 장벽에 도착했고, 곧바로 마족과 싸움이 시작되었다는군. 발라크의 군대도 전투를 개시할 테니 우리도 빨리 준비해야 하네!”

우우웅.

그와 동시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던 통신구에서도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정구 표면에 뜬 숫자를 보니, 통신을 건 주체는 대동맹이 아니었다.

“발라크.”

상황은 급속도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로빈 공작에게 물었다.

“혹시 전장에 다른 비마족 마계인들이 보인다고 하던가요?”

“아니, 마족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말은 들었네. 상상 이상이라고 하더군.”

“이상하군요.”

동부 전선군에 마족이 엄청나게 많다.

그렇다면 북부 전선군은 어떨까?

나는 확신에 가까운 의문을 품고 발라크의 통신 요청을 받았다.

* * *

몇 분 뒤.

나는 급하게 사람들을 막사로 불러모았다.

모든 종족 대표와 지휘관이 모였을 때, 성질이 급한 고드릭은 먼저 회의의 포문을 열었다.

“대동맹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데. 이제 어쩔 생각인가?”

“마침 발라크에게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북부 전선군 쪽에서도 싸움이 시작되었다더군요.”

탁.

나는 탁자에 통신용 수정구를 올렸다.

움직일 준비가 되면 연락하라. 발라크는 나에게 그리 말했다.

“주군, 기병대와 정예병은 장벽을 공격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병사들의 탄약도 재보급이 끝났고, 저희 PMC의 병사들과 신병들도 태세를 갖췄습니다.”

“시타델의 마법 병단도 준비되었네.”

깨비에 이어서 로빈 공작과 페도르도 의지를 내비쳤다.

여기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없을 터.

그들은 이미 숱한 전투를 거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한 가지. 확인되지 않은 사안이 있습니다.”

나는 확 달아오른 그들의 목소리를 물리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장벽 너머에는 비마족 마계인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쿵.

회의실에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실제로는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모두의 표정에서는 저마다 폭탄이 하나씩 터진 것처럼 보였다.

“의장님의 말씀이 사실이라고 하셔도, 그들이 이쪽으로 배치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종족 대표들 사이에 끼어있던 아누스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북부와 동부 전선군의 전장에서 엄청난 수의 마족이 발견되었고, 우리의 앞에도 최소 10만의 병력이 있어.”

발라크에게서 걸려온 통신을 받았을 때.

비마족들이 보이냐고 물어보자, 그는 적들은 전부 마족이며 숫자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고도 말했다.

그럼, 우리의 앞에 있는 병력은 무엇일까?

“그리고 푸르카스에게는 정신을 조종할 힘도 있고.”

시공간마저 마음대로 주무르는 근원.

그런 힘을 가진 푸르카스가 과연 일반 생물체의 정신을 제어하지 못할까.

유리엘 제사장처럼,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근원을 사용해 얼마든지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저 장벽은 다른 성벽보다 은신 기능이 두드러지게 강화되었어. 그 이유가 뭐겠어? 바로 우리의 혼란이야.”

여태까지 비마족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장벽의 기능이 강화된 부분은 대단히 미심쩍었으며, 적들은 굳이 우리에게 공격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이로써 저들이 바라는 건 이미 드러난 것과 진배없다.

“공격을 기다렸다가 우리를 완전히 공황 상태로 만들어 버리려는 거지.”

“정확히 따지자면. 루카, 너를 노린 작전이겠지.”

옆에 있던 클리프에게서 냉랭한 어조의 말들이 흘러나왔다.

대종족 의회의 목적은 노예의 해방.

만약 다른 비마족과 싸우게 된다면 존재 자체가 부정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대종족 의회에서 내가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도 있을 거고.’

클리프의 말대로 이 일의 목표는 나였다.

대종족 의회가 혼란에 빠지면 마음 놓고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시간이 끌리고 우리의 병력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림보 본성으로 가는 길도 닫히게 될 것이다.

“주군, 무슨 그런 고민까지 하고 계십니까.”

깨비는 테이블에 두 손을 올리며 상체를 길게 쭉 뺐다.

얼굴을 가까이 붙인 그의 표정에서는 이미 단호함이 엿보였다.

그 뒤로 트리어와 루카스, 이바나에 이어서 에버딘도 깨비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싸움은 저희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의 피가 흐르는데, 어찌 저희가 희생을 주저하겠습니까.”

아누스가 결의에 찬 눈으로 승낙한 뒤.

우리는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장벽으로 진군했다.

대포의 포성이 지축을 흔들었고, 마법사들의 마법이 적을 향해 쏟아졌다.

드드드드.

굉음을 내며 열린 장벽의 문.

나의 예측대로 장벽에서 나온 자들에게서는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비마족 마계인, 마족의 고기 방패가 된 자들은 괴성을 지르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끼야아아!”

“우워어어어!”

다 찢어지고 해진 넝마. 급조해서 만들어진 몽둥이.

눈을 까뒤집은 채 달려드는 비마족 마계인들을 보며 사람들은 조용히 무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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