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70화 (170/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70화>

170. 영광의 깃발 (3)

정찰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클리프는 적당한 수송로를 찾아냈으며, 병사들을 위협할 존재들도 조기에 발견하고 처리했다.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수송 작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늪지대 건너편의 요새.

폐허가 된 요새의 선착장에는 사람과 물자가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지휘관들은 늪지대를 건넌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선착장에 내리면 곧바로 배를 옮겨라!”

“어이, 거기! 넋 놓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여!”

지휘관들의 호통을 채찍질 삼아.

병사들은 개인 물품과 약간의 소모품을 들고 폐허가 된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4만 명 정도가 되었다.

대종족 의회에서 출발했던 병력은 거의 5만.

병력의 20%는 림보 영지에 발조차 붙이질 못했다.

전투로 사상자가 생겼고, 그들을 돌볼 사람들과 수송기지를 지킬 병력이 후방에 남았기 때문이다.

“병력이 많이 줄긴 했네.”

내 곁에 서 있던 클리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사망한 병사는 1천을 넘지 않았지만, 병력이 줄어든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마저도 스칼렛이 없었다면. 더 줄어들었을 거야.”

“그렇긴 하겠지.”

“뭐야,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기 날아오고 있네.”

선착장의 반대편.

나는 북부 수송기지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보급품 상자 더미를 가리켰다.

늪지대의 하늘에는 물건을 운반하고 있는 마법사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본인 체중의 100배에 달하는 보급품을 들고 오는 스칼렛도 있었다.

“으아아아. 이게 몇 번째지?”

쿠웅!

나무로 짠 거대한 상자 여러 개가 선착장에 떨어지자 큰 소음이 일어났다.

스칼렛은 피곤에 절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두 눈에서는 원망의 감정이 살짝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카, 분명히 마법사들이 와서 일이 줄어든다고 하지 않았어?”

“처음에는 그랬지. 분명.”

“근데 왜 내가 일반 보급품을 나르고 있는 거야.”

“그야.”

물자를 더 빨리 움직이기 위해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뒷말을 잘랐다.

원래라면 일반 보급품은 병사들이 탄 나룻배에 조금씩 옮겨 담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플라잉 마법이 가능한 인재들이 여럿 생기며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스칼렛, 네가 정말 뛰어난 능력자니까 그런 거지. 원래 잘나면 피곤한 법이야.”

“정말로, 그런 거야? 클리프도 그렇게 생각해?”

“무, 물론이지.”

클리프는 반강제로 내 의견에 동조했다.

여기서 스칼렛의 편을 들었다가는 무거운 짐을 들고 늪지대를 왕복하게 될 테니까.

우리의 응원을 받고서, 생체 수송 드론은 다시 건너편의 선착장으로 돌아갔다.

“야, 그런데 어째 공작 전하의 모습이 안 보인다? 물건도 안 옮기고 어디서 뭐 하시는 거야.”

“뭔 소리야.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계신대.”

“엥? 요새랑 선착장. 그 어디에도 안 보이는데?”

클리프는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공작 전하의 순간이동 마법진은 공간을 많이 차지하잖아. 그래서 특별히 다른 곳에 공간을 배정해 드렸지.

요새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

아무것도 없는 초원 위에는 대종족 의회의 물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클리프는 내가 가리킨 곳을 유심히 살피다가 마법이 만들어낸 섬광을 목격했다.

“설마,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니까 저 멀리 보내 놓은 거야?”

클리프의 말은 내 양심을 푹 찌르며 들어왔다.

틀린 말은 아닌데, 너무 표현이 적나라하잖아?

“그렇게 말하면 뭔가 이상하잖아. 그저 서로 편하게 일하자는 거지.”

“무서운 놈. 너는 딱 마계가 잘 어울린다. 그냥 여기에서 살지 그래.”

“그걸 이제야 알았냐. 뭐 하고 있어? 물건 옮기지 않고.”

독한 놈.

클리프는 그리 말하며 나와 함께 족히 수백 kg은 나갈 상자들을 옮겼다.

마법사들과 스칼렛의 도움으로 병사들이 옮길 물건의 양은 대폭 줄었다.

덕분에 스칼렛은 더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만큼 빠르게 수송 작전을 끝낼 수 있으리라.

‘나중에 먹을 거라도 좀 찔러줘야지.’

나와 클리프는 일을 거들며 대화를 나눴다.

이제 병력은 전부 넘어왔고, 보급 물자도 거의 옮긴 상태.

정리가 마무리되면 군대가 이동할 채비는 끝난 셈이다.

“앞으로 요새를 많이 마주칠까?”

“아니, 여기 주변은 대부분 농장이거나 밭이거든. 요새는 거의 없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무엇보다 이 일대는 대부분 초원이라 방어하기도 쉽지 않고.”

림보 외곽에 해당하는 이곳은 방어 시설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데모니움과 에레보스 영지는 영토 대부분이 초원과 평야라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림보의 경우에는 적을 막기에 아주 탁월한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영지 내부와 외부를 나누고 있는 사막이 바로 그곳이다.

“강아지남한테 들었는데. 네크베르 사막이 군대를 막기는 최적이라고 하더라.”

“사막이라면. 군대가 제대로 이동하기는 힘들겠지?”

“맞아. 내 생각에도 군대가 진격하는 건 거기가 한계일 거야.”

“그럼, 그 뒤에는.”

클리프는 말을 잊지 못했다.

네크베르 사막의 너머, 림보 내부는 정찰조차 시도해 보지 못한 미지의 공간이다.

강아지남이나 토끼녀에게서도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한 곳이었다.

“뭐, 내부 지역도 사람이 사는 곳일 테니까.”

“사람이 아니라, 마족이 사는 곳이겠지.”

“대충 비슷한 거지 뭘. 그리고 우리에게는 동행할 현지 가이드도 있잖아?”

“그 가이드라는 게, 푸르카스 다음으로 강한 대악마라는 것도 꼭 말해야지!”

종족 차별은 나쁜 거란다.

가이드라는 건 지역 소개만 잘하면 되는 법이다.

물론, 발라크가 흑심을 품었고 언제든지 나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 있다는 게 문제지만.

“너무 겁을 먹으면 발라크가 진짜로 쉽게 볼걸?”

“쉽게 보건 뭐하건. 어차피 배신은 확정된 사실이잖아.”

“맞는 말이야.”

발라크와는 시한부 동맹 관계.

푸르카스를 쓰러트리면 다음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하기 힘들다.

카시안도 그랬지만, 다른 이들도 발라크가 끝까지 동맹을 유지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먼저 동맹을 깨고 철저히 배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이야 서로 뜻이 많아서 힘을 합치고 있을 뿐.

당연히 나도 그 의견에는 찬성한다.

“걱정도 많다. 내가 설마 아무런 계획도 없이 발라크를 가이드로 쓰겠냐.”

“정말로?”

“내가 그렇게 신뢰감이 없었나? 오늘따라 유독 심하네.”

“아니,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거잖아. 걱정돼서 그러지.”

클리프의 표정에는 많은 것들이 묻어 나왔다.

마치 병원에서 막 고래를 잡고 나온 소년의 얼굴을 보는 느낌.

앞으로는 절대 어머니와 단둘이 돈까스를 먹으러 가지 않겠다는 느낌의 의지가 엿보였다.

“이번에도 걱정하지 마. 다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믿어도 되겠지?”

“그러엄. 나는 승산 없는 싸움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여태까지 잘 봤잖아.”

클리프는 호언장담하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건 맞지.”

* * *

쿠에에엑!

거대한 지네처럼 생긴 마수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오러탄에 넝마가 된 벌레를 끝으로, 더 이상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마족은 없었다.

“사격 중지!”

기병대의 대장인 깨비가 마공학 리볼버를 거두며 외쳤다.

흑랑족의 발톱에 짓밟히고, 오러탄에 몸이 꿰뚫린 시체들.

나는 벌판을 수놓은 마족의 시체들을 보며 혀를 찼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란 이런 거지.’

림보 평야를 지나가던 도중.

우리는 아주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마족의 기습을 받았다.

기병대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사망자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깨비는 마족들의 시체들을 살피고서 입을 열었다.

“주군, 아무래도 진군을 늦출 목적으로 공격하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작해야 몇백.

림보 영지의 마족들은 적은 숫자를 이용해 불시에 우리를 기습했다. 아주 반복적으로.

성가신 점은 근원의 힘으로 어느 장소에나 나타날 수 있다는 것.

지금만 해도 적들이 우리의 뒤에 나타날 때까지 나조차 반응하지 못했다.

‘병력의 수가 적어서 피해는 없었지만. 왜 이렇게까지 병력을 내다 버리는 건지 알 수가 없네. 혹시?’

개전이 되고서 1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동맹과 우리가 해치운 마족의 숫자만 해도 10만에 가까웠다.

신이 아닌 이상, 이런 엄청난 손실을 모두 복구하는 건 불가능할 터.

‘뭔가를 준비할 시간을 버는 건가.’

그것도 아주 급하게.

대종족 의회의 군대는 초원 지역의 밭과 농장을 뚫고 진격했다.

이제 곧 있으면 네크베르 사막에 도착할 예정.

놈들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조금만 기다리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으리라.

“주변에 다른 마족 부대는 없었네.”

전장의 수습이 끝나가던 무렵.

주변 인근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온 로빈 공작이 하늘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곧 출발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서두를 필요는 없네. 대동맹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제 사막까지 반나절 거리라고 하더군.”

“다들 약속한 날짜에 잘 맞춰서 도착하고 있다는 이야기니, 잘됐네요.”

“그런가? 나는 솔직히 좋은 소식인지는 잘 모르겠군.”

계획에 맞춰서 움직이고 있으니 좋아할 만한 일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곳이 무덤 자리라면 어떨까.

로빈 공작은 그 때문인지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리엘 제사장이 한 건 해냈다더군.”

“안 그래도 근원을 어떻게 처리했나 궁금했습니다.”

“진군 도중에 근원이 깃든 요새를 마주했는데, 유리엘의 지시에 따라서 시계탑주가 마법으로 파괴했다더군.”

근원을 직접 처리한 게 시계탑주라면 다행이다.

“세계수는 시계탑주의 눈 역할만 한 거군요.”

“결과적으로는 그런 셈이지. 그래도 가능하면 빨리 시계탑주가 제사장의 도움을 받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네.”

“저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8위계의 마법사.

찰스 랭커셔의 실력이라면 근원이 깃든 성벽 정도는 능히 파괴할 실력을 갖추고 있다.

아직은 제대로 감을 못 잡은 모양이지만, 근원에 익숙해지면 세계수의 의존도를 덜 수 있을 터.

내가 변수들을 짜 맞추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그런데 자네는 언제쯤 군대를 떠날 생각인가?”

로빈은 살짝 눈치를 보더니 툭 던지듯 말을 뱉어냈다.

아무래도 대놓고 물어보기에는 조금 불편하겠지.

“푸르카스가 전력을 다하는 시점이요. 림보 본성에 마족들이 많으면 곤란하니까요.”

“이건 내 예감이지만. 결전은 네크베르 사막에서 일어날 걸세.”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네크베르 사막은 폭이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다.

즉, 여기도 전선이 한번 무너지면 끝이라는 뜻.

어떤 방식으로든 사막을 방패 삼아 버티려 할 것이다.

“준비도 끝났으니 이제 다시 움직이죠.”

우리는 다시 네크베르 사막을 향해 움직였다.

대동맹은 사막의 동쪽을, 발라크의 북부 전선군은 북쪽을 맡기로 되어 있다.

우리는 그 가운데. 전선의 중간에 해당하는 네크베르 사막의 북동부가 우리가 맡은 지역이었다.

“의장님! 의장님!”

하늘에 떠서 주변을 정찰하던 루카스.

그는 나를 다급하게 부르며 급속도로 하강했다.

후우웅! 크게 바람을 날리며 착륙한 루카스는 부리를 마구 벌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저 멀리에 사막이 보입니다. 아무래도 도착한 것 같습니다.”

“그래? 지금 당장 가 보자.”

“예!”

나는 곧바로 로시난테의 배를 차며 하늘로 솟구쳤다.

뒤따라온 루카스는 부리를 이용해 어느 방향을 콕 짚었고, 나는 곧바로 새로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거무스름한 모래.

내 동공에 비친 건 황량한 죽음의 땅이었다.

네크베르 사막, 림보 본성으로 가는 마지막 시험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멀리서 불고 있는 거무스름한 모래바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도착이네.”

벌써 입안이 까끌까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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