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69화 (169/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69화>

169. 영광의 깃발 (2)

“……네가 어째서 여태까지 말하지 않은 건지. 잘 알겠다.”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펠리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옆에 있던 로빈 공작도 충격을 받은 건 마찬가지.

지구에는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이 있다.

지금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그 격언과 비슷하지 않을까.

“잠시만, 이거 큰일이군.”

내 기억을 접하고 사색에 잠겨 있던 로빈은 무언가를 떠올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대동맹의 회의에서도 푸르카스가 지닌 힘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네.”

“그거야, 늘 있던 일이 아닌가요?”

“그렇긴 하네만. 저번에는 처음으로 세계수의 제사장이 회의에 참석했었네.”

근원에 대항할 수단.

대동맹은 그런 힘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세력이나 개인이 없었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그랬다.

로빈은 회의에 참석했던 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거기서 유리엘 제사장은 근원에 대항할 방법이 본인에게 있다고 말했네.”

“회의에 참석했다고 하셨는데. 그게 언제입니까?”

“아주 최근이지. 인페르노를 공격하기 하루 전이었으니.”

애당초 대동맹으로 돌아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나.

유리엘은 의도적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엘프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시기가 미묘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전쟁 하루 전에 말을 꺼낸 거라면 다분히 의도적이군요.”

“아마도 네가 손을 쓰지 못하도록 선수를 친 거겠지.”

펠리스는 흑요석 같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세계수는 내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지금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근원에 대항할 수 있다는 건. 대동맹 내에 영향력을 높일 최고의 방법이니까.’

물론, 유리엘이 대동맹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입김이 강해질 가능성은 작다.

총사령관 카시안이 세계수를 경계하고 있으니까.

신성 제국과 한자 동맹의 국경이 붙어있어 언제든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카시안이 적당히 잘 견제하겠지. 근데 시게탑주는 왜 이렇게 조용하지?’

나는 여기서 살짝 의문을 느꼈다.

랭커셔 후작은 이제 8위계 대마법사.

그만한 경지라면 근원의 힘을 느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시계탑주인 랭커셔 후작은 근원을 보지 못한다고 하던가요?”

“음, 8위계에 들어서면서 시야가 넓어졌다는 말은 늘 했지만. 아직은 익숙하지 못한 모양이더군.”

“그런가요.”

아직 경지에 익숙해지기에는 시간이 조금 필요한가.

하긴 제대로 깨달음을 갈무리할 시간도 부족했을 테니까.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 의견을 내놓았다.

“세계수는 일단 그냥 둬도 큰 상관은 없을 겁니다.”

“자네는 저대로 세계수가 활동하도록 두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은 전쟁 중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푸르카스를 처치하는 게 먼저입니다.”

여기서 분열되면 정말 아무런 방도가 없다.

일단 내가 근원을 손에 넣어야 무슨 일이라도 해 볼 수 있을 터.

그건 그렇고, 나는 진실을 알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로빈에게 시선을 옮겼다.

“전하. 그런데 정말 괜찮습니까?”

“응? 왜 그러는가.”

“아뇨, 단주님도 이렇게 놀라셨는데. 공작 전하는 별 반응이 없으신 게 신기해서요.”

“나야, 딱히 자네에게 실망할 건 없네만.”

오히려 단주가 실망한다면 모를까.

로빈은 옆에 있는 흑발의 여인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결사단에 했던 말들은 대부분 거짓이었다.

나는 그 모든 기억을 공유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굳이 정보를 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치만, 루카는 판게아를 구하기 위해서 그랬는걸요.”

히히히.

스칼렛은 특유의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눈알을 굴렸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 여인에게로 쏠렸다.

펠리스는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를 눈치채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편지를 받아서 읽었을 때부터 각오하던 일이다. 그보다, 너의 기억 속에 있던 나에 관한 내용은 정말 사실이더냐?”

“시뮬레이션 속에 있었던 걸 물으시는 거라면. 네, 그렇습니다.”

펠리스는 나의 거짓말보다 본인의 운명에 더 주목했다.

사실, 로빈의 경우에는 미래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클리프가 로빈을 왕실의 보고에서 구하고, 그 뒤에는 동료가 된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딱히 배신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을 터.

‘하지만 단주님의 미래는 많이 변했지.’

게임에서 펠리스는 클리프에게 죽는다.

수많은 살육을 자행하고, 그림자와 부하들을 모두 잃은 뒤에 아주 처절한 죽음을 맞는다.

그런 운명과 현재를 감히 비교할 수나 있을까.

“네가 나타나지 않은 세계의 나. 그게 아마 원래의 운명이었겠지. 나는 정했다. 네가 연장해 준 결사단의 운명을 너에게 맡기겠다.”

펠리스가 그리 말하며 싸늘하던 분위기를 따스하게 녹였다.

우리는 그 뒤로 초월자와 관리자에 관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프레스턴 단장도 미리 알고 있었군.”

“따지자면 단장님이 먼저 말씀해 달라고 하셔서 다른 사람들과도 비밀을 공유하기 시작한 겁니다.”

“음, 그러면 평의회 연방이나 한자 동맹에도 정보를 공개하는 게 어떻겠나?”

로빈은 차라리 이 사안을 모두에게 공개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정보를 공개하면 나에게는 이득이다. 나의 기억만 놓고 보면 누가 악당처럼 보일지는 뻔할 테니.

하지만 그래서는 대동맹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곤란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내 의견에 펠리스와 스칼렛이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건 혼란과 분열로 가는 길일 뿐. 지금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맞아요. 여기서 분열되면 정말 끝이에요. 저도 아버지에게조차 초월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는걸요.”

스칼렛이 편지에 엘프들의 내용을 적어서 보내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엘프들을 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

데이브에게 정확한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도 큰 분열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로빈은 턱을 문지르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하긴 초월자와 관련된 일은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이럴 거면 그냥 비밀로 하지 그랬나?”

“알려 달라고 하셨잖습니까. 원래 궁금증이 많은 사람은 단명하는 법입니다.”

“뭐라, 반박할 수가 없군.”

결국, 로빈은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사실을 함구하기로 했다.

여왕이 들으면 펄쩍 뛰고 화낼 일이겠지만.

나는 얼추 대화를 마치고 석양빛이 감도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부터 늪지대를 공략해야 하니, 오늘은 이쯤 해두죠.”

* * *

시타델의 최정예 마법사 집단.

왕실 근위대, 혹은 마법 병단으로 불리는 자들이 선착장에 늘어섰다.

로빈 공작은 그들 앞에 서서 작전을 하달했다.

“제군들, 들었던 대로 우리는 어떠한 통제도 되지 않는 늪지대로 간다. 오늘은 늪지대의 주변을 정찰하고 위협 요소를…….”

이제는 제법 왕족의 위엄이 느껴지는데?

로빈은 차분하게 오늘의 임무를 주르륵 늘어놓고 있었다.

늪지대의 수심을 관측해서 이동 경로를 짜고, 주변의 위협을 파악해서 미리 차단하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의장님, 출격 준비를 끝냈습니다.”

이런 위험한 임무를 근위대에게만 맡길 생각은 없었다.

비행대의 대장인 루카스는 큰 덩치들을 대동하고 선착장으로 왔다.

전사들을 태우고 직접 싸우는 강습부대.

이제는 강습병에게도 마공학 리볼버가 지급되었으니, 공중에서도 제법 자유롭게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부대의 숫자가 얼마나 되지?”

“예전보다 훨씬 늘어서 이제 1000명 정도는 됩니다.”

“좋아, 너희는 마법사들과 이동하며 숨어 있는 적들을 섬멸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루카스는 자신감을 내보이며 날개를 퍼덕거렸다.

시간이 조금 촉박하다. 최소 며칠 이내에는 늪지대를 건너서 네크베르 사막에 도착해야 하니까.

적어도 오늘 안에 정찰을 끝내야 내일부터 수송 작전을 시작할 수 있을 터.

물론, 시간에 쫓긴다고 병사들을 무턱대고 사지로 내몰 생각은 없었다.

“클리프와 스칼렛도 참가할 테니, 다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나는 선착장 한쪽에서 몸을 풀고 있는 둘을 가리켰다.

스칼렛과 클리프, 이 둘은 판게아 출신임에도 비마족들이 마음을 여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둘은 이쪽으로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루카,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응, 뭔데?”

“작전에 루카의 역할은 없길래. 나랑 클리프만 가는 건가 싶어서.”

“나는 늪지대 너머에 갔다 오려고.”

“뭐? 그런 위험한 곳에 왜 혼자서만 가려고 그래?”

클리프는 본인도 가겠다며 나를 잡고 흔들었다.

하늘에서 바라본 바에 의하면 늪지대 너머에는 선착장과 요새가 있다.

이곳처럼 커다란 곳은 아니고, 일반적인 요새와 비슷한 편이었다.

“너는 미끼 역할을 잘 수행해야지. 자, 너를 위해서 준비했다고?”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은 나룻배 한 척.

나는 선착장에 있는 낡은 조각배를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클리프의 인상은 단번에 확 구겨졌다.

“이왕이면 좋은 거로 줄 것이지.”

“야, 너는 늪에 빠져도 안 죽잖아. 좋은 배는 병사들에게 줘야지.”

“너 말이야. 이번에 공작 전하랑 단주님의 일도 그렇고. 은근히 나만 소외시키는 거 같다?”

“아니, 갑자기 오셔서 물어보는데 어떻게 하냐.”

클리프는 조금 뒤늦게 로빈과 펠리스의 일을 들었다.

화내는 거야 이해는 하는데, 거기에 있어 봤자 분위기만 묘해지잖아?

검성과 검귀의 제자가 만나면 해야 할 일은 하나다.

“그리고 거기에 있었으면 그냥은 안 넘어갔을걸.”

“에이 설마. 널 이해한다고 하셨다면서?”

“날 이해하는 거와 네 스승님을 이해하는 건 별개지.”

“……그런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중에 실전 같은 훈련 몇 번으로 잘 끝내면 되지. 일단 미끼는 나룻배에 타시고.”

나는 클리프의 어깨를 툭툭치고서 선착장 끝으로 걸어갔다.

이제 근위대와 강습부대의 준비도 끝났으니.

“공작 전하, 지금 바로 시작하죠. 오늘 안에 수송 루트를 정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하세.”

“저희도 문제없습니다.”

“미끼도 무사히 나룻배에 탔습니다.”

루카스의 대답에 이어, 불만 섞인 미끼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작전이 시작되었다.

강습부대와 스칼렛, 근위대가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클리프는 홀로 나룻배에 타서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럼, 가 볼까.’

휘익.

나는 한 마리 새처럼 날아올라 늪지대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시간이 부족하니 이동에 방해되는 것들은 최대한 치워야 할 터.

나는 마공학 리볼버를 들고 리자드맨의 거주지로 보이는 곳에 오러탄을 날렸다.

팡! 팡!

바람을 꿰뚫은 오러탄은 여러 개로 나뉘며 지면을 강타했다.

감각을 넓혀 살펴보니 리자드맨의 개체 수는 몇천 정도.

이외에도 마수들로 짐작되는 기운들이 늪 속에 숨어 있었다.

‘이 정도는 마법사들이 알아서 정리해 주겠지. 이제 요새로 가볼까.’

늪지대는 근원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자연의 상태에 가까웠다.

각자 할 수 있는 영역에 따라서 일을 나눠야 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나는 즉시 근원의 힘이 느껴지는 반대편 요새로 향했다.

인페르노에서 보았던 성벽.

선착장이 딸린 요새의 성벽은 강력한 흑마법으로 무장된 상태였다.

차이점은 근원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

내가 늪지대를 뛰어넘어 림보 영지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 환영한다. 인간.

푸르카스의 중후한 목소리가 사념이 되어 뇌리에 꽂혔다.

‘놀이 공원도 아니고 인사는.’

그와 동시에 푸르카스의 방해 공작이 시작됐다.

성벽에서 근원의 힘이 흘러나와 주위를 포위하듯 감싸며 몸을 짓눌렀다.

어떻게든 내 움직임을 방해하려는 수작이었다.

허튼 수를 쓰고 있어. 나는 무명을 꺼내 서로 다른 기운을 칼날에 주입했다.

우우웅.

오류가 덧씌워지며 무명의 칼날이 조금씩 진동했다.

성벽에서 흘러나오는 기분 나쁜 기류.

나는 무명을 휘둘러 주변을 포위한 기운의 흐름을 잘라냈다.

“단순한 인사치고는 조금 격한데.”

근원의 힘이 사라지며 중압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지, 근원의 흐름이 촉수처럼 흐느적거리며 재차 나를 덮쳤다.

‘게다가 끈질기기까지 하고.’

샤악.

바람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흑도.

나는 근원의 흐름을 잘라 버린 뒤, 허공을 박차며 요새를 향해 추락하듯 낙하했다.

콰앙! 땅에 떨어지며 베어낸 성벽 한 귀퉁이가 무너졌고, 돌조각과 마족의 사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근원의 힘이 약해졌다.’

근원의 힘은 성벽 안에 깃들어 있다.

그러니 굳이 오류를 사용하지 않아도, 대악마급의 실력을 가졌다면 충분히 파괴할 수 있으리라.

“인간! 죽어라!”

밑에서 전투에 대비하던 리자드맨이 작살을 휘둘렀다.

상대의 기운은 중급 수준.

무장 상태나 치장품을 보면 적어도 소규모 부대의 대장 정도는 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완력은 가뿐히 그 수준을 뛰어넘었다.

후우웅!

상급에는 못 미쳐도 일반적인 중급과는 다르다.

이 모든 현상은 근원으로 강화된 덕분일 터.

나는 무명으로 상대의 가슴팍을 베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그래도 어렵지는 않겠어.’

그날, 내가 습격한 요새의 성벽은 모두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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