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68화 (168/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68화>

168. 영광의 깃발 (1)

동부 전선군의 인페르노 점령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특수 기동군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사상자는 적었고, 림보의 마족군은 예상보다 더 큰 피해를 보아야만 했다.

빛나는 승전을 뒤로하고, 동부 전선에서 상륙전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북부 전선.

발라크와 프린지가 이끄는 마족군은 림보 영지의 북부 외곽을 공격하고 있었다.

기이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 성벽.

대동맹군이 겪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림보 영지의 성벽은 종잡을 수 없는 위협이 되어 북부 전선군을 덮쳤다.

“서, 성벽의 높이가 갑자기 높아졌어!”

“모두 당황하지 마라. 단순한 착시 현상일 뿐이다!”

“큰일입니다! 갑자기 성벽을 기어오르던 병사들의 움직임이 멈췄습니다!”

“뭐라?!”

일선 지휘관들은 저마다 의문이 함축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도 그럴 게, 성벽의 높이가 갑자기 길어지거나 시간이 멈추는 등의 기현상이 계속 발생했으니.

전장에서 뒹굴고 있는 마족들은 분쇄기에 들어간 고기와 다를 게 없었다.

“주군, 사상자가 벌써 3만이 넘었습니다.”

하늘 위.

드래곤 키메라에 올라타 전장을 살피던 프린지는 발라크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리 아군의 병력이 많다지만, 초전부터 너무 심하게 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순간에 직접 발라크가 나서 준다면.

‘병력의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을 텐데.’

그런 프린지의 바람과는 달리.

발라크는 무심하게 전장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아직이다. 조금 더, 조금 더 성벽으로 병력을 투입해라.”

계속해서 병력을 밀어 넣으라는 명령만 보낼 뿐.

발라크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성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프린지는 그 모습이 못마땅했으나 본인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그는 뒤에서 대기하던 전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키라의 부대도 투입하라.”

“예, 알겠습니다.”

핏빛으로 물든 성벽.

육편이 되어 바스러진 부하들의 시체를 보던 프린지는 슬쩍 발라크를 흘겨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 건가.

“프린지.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이냐?”

흐읍.

발라크는 시선을 그대로 아래에 두고서 프린지를 불렀다. 마치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과 불만을 꿰뚫고 있다는 듯이.

프린지는 잔뜩 긴장한 채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게…….”

“지금은 전투 중이다. 전장에서 눈을 떼지 말도록.”

다행히도 프린지에게 날아온 건 일반적인 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것일지도.

“죄송합니다. 주군.”

“되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불안이 뭔지는 나도 안다.”

발라크는 미증유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성벽을 가리켰다.

아마도 초월자의 힘이라 불리는 근원의 영향 때문일 터.

프린지도 100년이 넘는 세월을 바신의 밑에서 살아왔기에 그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이제 성벽의 힘은 곧 사라진다.”

그런데 발라크가 뱉어낸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초월자의 힘이 사라지다니. 하물며 이곳은 푸르카스가 지배하는 영역.

지금 당장만 해도 부하들은 성벽 위로 기어 올라가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주군이시여.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지…….”

“감이다.”

“예?”

경험이나 능력도 아니고.

그저 감으로 찍은 거라니? 프린지는 진심으로 놀라며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전부터 푸르카스를 향한 증오가 남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아무런 계산도 없이 덜컥 인간들과 손을 잡아 버린 건가.’

프린지의 정신이 혼란스러워질 무렵.

아래에 있는 전장의 양상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고전을 면치 못하던 부하들이 하나둘씩 위로 올라가 성벽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린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밀리고만 있었는데, 정말로 주군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당연한 일이다.”

끌끌끌.

발라크는 소름 끼치도록 즐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놈은 지고 있어도 이기는 척을 하고. 이기고 있어도 지는 척을 한다. 조금 전의 성벽의 뒤편을 보았느냐?”

“그게. 죄송합니다.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괜찮다. 저길 보아라. 이미 푸르카스는 아까부터 병력을 조금씩 빼고 있었다.”

시커먼 빛을 뿜어내는 장막.

공중 침투를 막기 위해 설치된 보호막 너머에는 등을 보이며 뛰어가는 마족의 모습이 보였다.

림보 영지의 마족들은 성벽에서 떨어져 영지 깊숙한 곳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초월자에게 대항하다 보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는 법이지. 하지만 상대의 위세에 짓눌려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건 옳지 못하다.”

“명심하겠습니다.”

“알았으면 되었다. 자, 이제 가자.”

크롸롸롸!

발라크의 의지에 따라 드래곤 키메라가 포효하며 성벽을 향해 날아갔다.

닿는 것만으로도 몸이 재로 변하는 푸르카스의 보호막.

이미 근원의 힘이 소실된 상황에서 저 거무스름한 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쿵! 쩌저적.

키메라의 가운데 머리가 부딪치기 무섭게.

보호막은 유리 조각처럼 잘게 부서지더니, 물에 떨어트린 설탕처럼 녹아 없어졌다.

발라크와 프린지는 상쾌한 맞바람을 맞으며 림보 영지로 발을 들이밀었다.

“대동맹과 약속한 지역까지는 얼마나 걸리느냐?”

“예, 이대로만 간다면 며칠 안에 림보 영지의 내부 사막에 당도할 수 있을 겁니다.”

림보 영지는 크게 둘로 나뉜다.

늪지대와 숲, 평원 등으로 이루어진 외곽 지역, 그리고 주요 시설이 밀집된 내부 지역.

외부와 내부는 ‘네크베르 사막’이라고 불리는 사막을 기준으로 나뉘어 있다.

“노예의 땅이라. 아마 두 번째 격전지는 그곳이 되겠지.”

네크베르 사막은 와제트 종족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

발라크는 기이한 웃음소리를 내며 군대를 진격시켰다.

* * *

비슷한 시각.

대종족 의회는 늪지대를 건너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병사와 가벼운 보급품은 선착장과 창고에 있던 작은 배들을 이용하고, 무거운 물건들은 스칼렛의 능력을 빌리려고 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거대한 변수가 생겼다.

대동맹에서 파견한 사람들.

대략 수십 명의 인원이 등장하며 우리의 보급 계획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물론, 좋은 쪽으로.

“공작 전하.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로빈 공작은 왕실 근위대 5개 분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그 숫자가 대략 50여 명. 최하가 4위계 마법사고 분대장은 5위계, 다섯 분대를 이끄는 소대장은 무려 6위계 마법사였다.

머릿수는 작다고 하더라도 웬만한 병사 수천 명보다 더 값진 인력이리라.

“누님. 아니, 여왕 폐하께서 대종족 의회에 대한 걱정이 크셨네.”

로빈 공작은 늪지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마법사들이 있다면 여러 면에서 유용하겠지.

그뿐만 아니라, 로빈 공작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스칼렛의 짐을 덜어 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의심스러운 건 로빈이 합류한 시점이었다.

“일단 다들 휴식을 취하고 일은 내일부터 하시죠. 어차피 대동맹군과 진군 속도를 맞춰야 하니까요.”

“그렇게 해 준다니 고맙군.”

“별말씀을요. 일단 제가 숙소로 쓰실 장소로 안내해 드리죠.”

빈 거주용 건물에 근위대의 숙소를 배정해 준 뒤.

나는 로빈과 함께 기지의 서쪽 문과 연결된 선착장으로 나왔다.

로빈을 이곳으로 보낸 여왕의 의중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도 상태가 말이 아니군.”

“예, 늪지대라 그런지 수위가 낮은 곳이 많더라고요. 리자드맨이 공격할지도 모를 일이고요.”

“사전에 위협을 제거하는 수밖에는 없겠지.”

로빈은 식물과 흙탕물이 섞인 늪지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의례적인 대화.

나는 살짝 뜸을 들인 다음에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제 슬슬 말씀하시죠.”

“무엇을 말인가.”

“여왕 폐하께서는 실리에 밝으신 편이시죠. 약자를 돕고 정의를 실현하면서도 항상 그 부분을 빠트리지 않으시고요.”

끄응.

로빈 공작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사실 누님이 최근에 총사령관과 대화를 나누었네. 남부 수송기지를 점령한 직후였지.”

로빈의 설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카시안과의 대화에서 여왕이 무언가를 감지했다는 것이었다.

루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대화를 회피하니, 무슨 일인지 조사해 보라는 뜻이었다.

나는 설명을 듣고 간단하게 평을 내렸다.

“제대로 알아보고 오신 건 아니었군요.”

“신랄하군.”

“하지만 단순한 낌새만으로 여기에 오신 건 맞지 않습니까?”

워낙 눈치 빠른 종자들이 모여서 그런가.

카시안에게 근원에 대해 말했더니, 시타델 왕국이 스스로 낚여서 날아왔다.

그렇다고 어물쩍 넘어가기는 싫다.

‘이제 림보 영지로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이왕이면 지금 진실을 말해 두는 편이 좋겠지.’

로빈 공작은 내 눈치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군. 그게 뭔지 알려 줄 수 있겠나?”

“제가 줄 수 있는 건 끔찍한 진실밖에 없는데. 그래도 좋으시다면요.”

“……왠지 듣기 싫어지는데.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가면 누님이 나를 받아 주시지 않을 테니. 들어보도록 하겠네.”

로빈은 결국 진실과 마주하기로 했다.

무역 연합, 신성 제국에 이어서 시타델까지.

평의회 연방을 제외하면, 판게아에서 관계를 맺은 거의 모든 세력과 진실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명 더, 이 일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통신구를 꺼내며 로빈에게 말했다.

“그럼, 준비가 필요하니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응? 여기서 누군가가 더 있어야 하나?”

“예, 말로만 하면 설득력이 떨어지잖아요.”

카시안에게 말할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다른 이의 기억까지 보여 주는 명품 프로젝터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곧바로 통신구를 사용해 스칼렛과 펠리스를 불렀다.

“루카, 무슨 일이야?”

가장 먼저 스칼렛이 선착장으로 돌아왔고.

“급한 일이라니. 어디 적이라도 나타난 거냐?”

뒤이어 선착장에 나타난 펠리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족을 찾았다.

나는 우선 넷을 한자리에 모은 다음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다들 진정하고 제 이야기를 들으세요. 스칼렛, 그때 클리프와 했던 거 기억하지?”

“아, 정신을 연결하는 거?”

“응, 그거. 한 번 더 부탁할게.”

무시무시한 말이 오가자, 로빈의 발끈하며 따지고 물었다.

“잠시만, 정신을 어떻게 하겠다고?”

“진실을 알고 싶으시다면서요.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합니다.”

“흐음. 알겠네.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야.”

로빈의 동의를 구하고, 나는 시선을 펠리스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뭔가 결심한 듯한 눈빛을 자아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말하고 싶다던 진실이. 검성과 검귀가 친우가 아니라는 사실이라던가. 그런 것이냐?”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전해줬다. 혹시 내가 데모니움 영지로 처음 오던 날을 기억하느냐?”

나는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펠리스는 그날 나에게 안기며 혼자 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해 줬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는데.

“나는 마계에 오기 직전에 알 수 없는 편지를 받았다. 그 안에는 네가 나에게 했던 거짓말이 적혀있더구나.”

검귀와 검성은 루카가 말한 것처럼 친우 사이가 아니다.

원래 펠리스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둘은 원수였고 검성이 결사단을 짓밟은 것도 사실이었다.

결사단주는 그런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떠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런 행동도 안 하셨던 겁니까?”

“나는 그까짓 편지 한 장보다 내 눈을 더 믿었으니까.”

펠리스는 그동안 숨겨온 사실을 말해서 후련했는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엇보다 발송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선뜻 나서기도 힘들었다.”

“단주님께 괜한 짐을 지워드렸네요. 제가 조금 더 빨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아니, 네 잘못이 아니다. 너는 여기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움직이며 증명하지 않았느냐? 게다가 우리는 너에게 빚을 졌고 나는 그걸 잊지 않았다.”

너는 우리의 족쇄를 벗겨 준 은인이다

펠리스는 그리 말하면서 나머지 진실도 들어보겠다고 동의했다.

누군가의 편지라. 분명 나와 결사단의 사이를 틀어지게 만들려던 수작일 터.

이렇게 되면 더욱 숨길 수가 없다.

“스칼렛, 이제 시작해 줘. 이 두 분도 진실을 알 권리는 있으니까.”

“응, 알겠어.”

곧이어 4명의 정신이 이어지고, 나의 기억이 둘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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