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65화 (165/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65화>

165. 전장 (1)

데모니움 본성.

나는 우선 소집령을 내렸던 본성으로 되돌아왔다.

하늘 높이 떠서 내려다보니, 성에는 아직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여기 있는 물건들만 다 옮기면 끝인 건가?”

“예, 나머지는 이미 집결지에 비축해 두었습니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대화를 나누는 클리프와 깨비.

그들의 곁에는 군수품을 싣고서 성을 떠나는 마차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에버딘과 트리어도 둘처럼 열심히 사람들을 통솔했고, 이바나와 아누스는 각자가 준비한 소모품을 확인하느라 바빴다.

‘루카스는 이미 집결지 근처를 정찰하고 있을 거고. 고드릭 장군의 부대는 도착하려면 좀 걸리겠지.’

사실상 군대 전체가 이사하는 수준.

나는 조금 더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을 살폈다.

스칼렛도 [염동]을 통해 열심히 물자를 날랐고, 저 멀리 지평선 쪽에서는 집결지로 향하는 페도르의 부대가 보였다.

이렇게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사이, 유독 잉여롭게 퍼질러져 있는 존재가 하나 보였다.

“으어, 하얗게 불태웠어.”

으적, 으적.

토끼녀는 구석에 찌그러져 한가롭게 당근을 씹어댔다.

누가 보면 열정적으로 일해서 본인의 일을 끝낸 사람인 줄 알겠네.

‘음, 맞는 이야긴가.’

뭐, 토끼녀는 분명 열심히 일했다.

다만 그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였을 뿐.

나는 로시난테에게 말해서 토끼녀가 있는 구석진 곳으로 내려갔다.

“뭘 잘했다고 여기서 한가롭게 앉아 있어?”

썩은 동태 같은 눈깔.

몸에는 힘이 쭉 빠져 있으며, 입은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당근을 씹었다.

토끼녀는 나를 보았음에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데 그쳤다.

“오늘은 칭찬 좀 해 주세요. 저 여태까지 정말로 열심히 일했잖아요?”

“아니, 절대로.”

“치사하시긴. 그래도 오늘만큼은 용서해 주세요.”

“아직 저렇게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쯔즈쯧. 물자 운송 계획은 다 짜놨거든요.”

토끼녀는 짧은 앞발을 좌우로 까닥거리며 혀를 차며 설명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군수품은 집결지에 창고를 건설해서 모아 두었다.

지금 옮기고 있는 건 거기까지 가면서 먹을 식량과 각지에 퍼져 있던 소량의 물품이었다.

“어떤 물건부터 수레에 올려야 하는지. 가용 가능한 수레는 몇 대인지. 어떤 부대가 어떤 물품을 수송할지.”

“그런 계획을 전부 짜 놨다는 이야기였냐.”

“게다가 도로의 수송량도 일정하니, 마구잡이로 부대를 출발시켜도 곤란하죠. 시간대별로 수송 부대의 움직임을 계산해서 세부 사항도 다 만들어 놨다고요.”

토끼녀는 침을 튀기기며 본인이 이룩한 업적들을 늘어놓았다.

오우, 정말로 열심히 일했는데?

나는 손뼉을 치며 그녀의 노고를 인정해 주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칭찬이 필요하겠네. 그동안 수고 많았어.”

“후후후, 어쩐 일인지 순순히 인정하시는군요. 뭔가 무섭게.”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잘 부탁해.”

“예?”

“그 표정과 태도는 뭐야. 당연한 일이잖아?”

토끼녀는 제대하는 날 훈련소 첫날밤 꿈을 꾼 말년 병장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고 보급로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제는 총을 주 무기로 사용하고 있으니 보급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할 터.

토끼녀는 아직 행복해질 수 없다.

“안 해! 못해! 배 째!”

팍!

토끼녀가 집어던진 당근이 바닥에 닿아 부서졌다.

어차피 본인이 먹을 식량이 사라지는 건데.

나는 씩씩거리는 토끼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서 안 할 거야? 근원은 어떻게 하고? 세계수는?”

“……해야죠. 당연히 해야죠.”

토끼녀는 두 귀를 축 내리며 체념하듯 대답했다.

이게 전부 이 생물체가 유능하기 때문이다.

무능했으면 보급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길 이유도 없다고?

“루카! 다시 돌아왔구나. 그런데 왜 여기에 있어?”

차원 밖에서 온 외노자를 회유하는 사이.

열심히 물자를 나르던 스칼렛은 어느샌가 나를 발견하고 단숨에 날아왔다.

얘는 클리프보다도 더 빠르게 내 위치를 찾아내네.

나는 토끼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스칼렛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들 열심히 일하길래. 지금은 오히려 내가 있는 게 방해가 되잖아.”

의회의 사람들은 계획에 맞춰 열심히 일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짠하고 나타난다면 자연스럽게 이목이 쏠릴 터.

그러면 안 그래도 복잡한 외성의 도로가 막히고 막혀서 난리가 날 것이다.

“으응, 하긴 그렇겠구나. 그래서 다른 일들도 잘 해결됐어?”

“잘 해결하기는 했지. 그 결과가 전쟁이라는 게 유감스럽지만.”

“어차피 일어날 전쟁인데 뭘. 넌 언제나 남들보다 대응이 빠르잖아, 그래서 항상 전쟁의 최선봉에 있는 거고.”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 근데 단주님은?”

펠리스와 그림자들.

데모니움 본성에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남들 눈에는 잘 띄지 않긴 하지만.

“단주님은 본성으로 도착하지도 않고서 곧바로 집결지로 가셨어.”

스칼렛은 [염동]으로 멀리 떨어진 짐을 옮겨 주며 말했다.

대종족 의회의 방첩 부대. 그들은 결사단의 기술을 배운 비마족 마계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빨리 싸우고 싶어서 가신 건가.”

어차피 지금은 기다려야 할 텐데.

뭐,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대규모 전쟁이 임박했으니.

특히 강한 상대와의 싸움을 즐기는 펠리스라면 이만한 이벤트도 없을 것이다.

“단주님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거 아니야?”

“그렇기는 하지만, 항상 행동 원리가 똑같잖아.”

“음, 차마 부정은 못 하겠어.”

스칼렛은 반박을 하려다가 포기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근데, 이제 진짜로 전쟁이 시작되는구나. 뭔가 무섭네.”

“무섭다는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회장님께서 계속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다며. 정말로 안 가도 되겠어?”

회장의 부탁을 받은 페도르는 스칼렛이 판게아로 돌아가기를 거듭 종용했다.

내가 그 부분을 묻자, 붉은빛이 도는 긴 머리를 쓸어서 정리한 스칼렛은 장난기가 섞인 미소를 지었다.

“너하고 클리프가 있는데, 내가 어딜 가겠어.”

스칼렛의 답변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다 컸네.”

* * *

며칠이 지났다.

나와 대종족 의회의 군대는 동부에서 도착한 고드릭의 부대와 함께 집결지로 남하했다.

미리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페도르의 부대와 합류한 뒤.

우리는 더 남쪽으로 이동해 약속된 시간을 엄수하며 영지 경계에 도달한 참이었다.

궁, 구웅, 궁.

멀리서 들리는 폭음.

총을 든 신병에서부터 이전부터 싸워온 정예병과 그들을 이끄는 대표에 이르기까지.

대종족 의회의 군대는 살육과 폭력의 입구로 향하는 길목에 섰다.

나는 로시난테의 등에 올라타 최선봉에서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일단 동요하는 사람은 없네.’

지휘관들은 일전에 내가 말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실천했다.

적을 앞에 두고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

그 밑에 있는 병사와 하급 지휘관들은, 고위 마족을 꺾은 깨비의 영웅담을 마음에 새기며 공포를 밀어냈다.

최소한 그 누구도 무섭다고 도망칠 기세는 아니었다.

우우우웅.

때마침 찾아온 대동맹의 부름.

나는 옷 안에서 진동하고 있는 통신구를 꺼냈다.

판게아 대동맹은 몇 시간 전부터 전선을 서쪽으로 밀어내며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통신이 왔다면 이유는 둘이겠지.’

압도적인 승리로 계획이 앞당겨졌거나. 혹은 벌써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전쟁은 언제나 계획대로 돌아가는 법이 없으니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나는 대동맹 사령부에서 온 통신 요청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대종족 의회의 루카 의장입니다.”

“여기는 판게아 대동맹 사령부입니다. 현 시각 전선의 북쪽으로 향하는 대규모 병력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지원군은 여러 지역에 산개된 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 때에 도착하지만 않게 해 주신다면 수월하게 적의 전선을 붕괴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뚝.

뭐, 내가 유려했던 최악의 상황은 아니네.

대군을 이끌고 도와달라는 말도 아니었으니, 이만하면 예상 범주 안에 있는 셈이다.

“지원군 차단이면 시간이 생명일 텐데. 하필 산개해서 오는 건 뭐람.”

내 옆에 있던 클리프는 커다란 대검을 꺼내면서 말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기병대만 데리고 가려고.”

“뭐? 네가 가면 군대는 어떻게 해.”

“일단 너에게 맡길게. 깨비야, 들었지?”

“예! 지금 당장 기병대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깨비는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기 위해 후방으로 향했다.

흑랑족과 뿔족으로 이루어진 기병대의 숫자는 이제 엄청나게 늘어났다.

늑대에 올라탄 상태에서는 수가 3000기에 달했고, 흑랑족이 수인으로 변하면 그 2배가 되었다.

나는 이어서 작은 지도를 꺼냈다.

“클리프, 너는 군대를 이끌고 여기에 진을 치고 기다려 줘.”

“에레보스와 림보, 그리고 인페르노의 경계가 맞닿은 곳이잖아.”

“아마 전선이 돌파되면 마족들이 후퇴하려고 할 거야. 그때를 위해 먼저 선수를 치자는 거지.”

“림보 영지로 들어가기 전에 마족의 숫자를 줄여 놔야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클리프의 속에는 폰허부가 있다.

검성은 오랫동안 지휘관으로 전장에서 살아 왔기에 병법에도 능했다.

그러니 병력을 맡겨 두어도 괜찮았다.

“주군, 진군할 준비가 끝났습니다.”

두두두두.

깨비가 집결시킨 기병대가 대열에 맞춰 군대에서 떨어져 나왔다.

단순히 마족의 지원을 끊는 거라면 혼자서 가도 충분할 터.

하지만 전투란 군대와 군대가 맞붙는 싸움이다.

‘제대로 어그로를 끌려면 여기도 군대가 나서 줘야지.’

나는 지시를 끝내고 기병대의 선봉으로 나아갔다.

대종족 의회의 대표 부대라는 이름값 덕분인지, 지나가며 보이는 병사들의 얼굴은 진정한 전사의 그것처럼 보였다.

내가 기병대의 선두에 다다른 순간.

“기병대는 진군하라!”

깨비의 지시에 맞춰 부대의 기수가 깃발을 흔들며 명령을 내렸다.

늑대 머리에 난 기다란 뿔, 기병대의 공식적인 부대기로 지정된 ‘각랑기’를 보며 기병대 전원이 진군을 시작했다.

스르응.

나는 무명을 대신해서 파멸의 송곳니를 꺼내 들었다.

절대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에는 이거만큼 적합한 무기도 없으니.

무엇보다 겉으로 보기에 무명보다 거대하고 듬직해서 사기를 높이기 좋았다.

“주군, 이 방향이면 금방 적의 요새가 나올 겁니다.”

깨비는 진격로의 지평선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점.

우리가 요새를 건설한 것처럼, 작은 점처럼 보이는 저 물체는 이번에 마족이 새로 세운 요새였다.

“너희는 이대로 계속 달려. 요새의 수비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예? 주군. 저희…….”

번쩍.

로시난테는 깨비의 말을 듣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 줄기 빛이 되어 쏟아진 로시난테는 단 몇 초 만에 적의 요새까지 데려다주었다.

반면에 요새의 수비군은 이제야 먼지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기병대를 발견한 참이었다.

“너는 여기서 기다려.”

“히힝!”

좋아하는 대답을 들은 로시난테가 흥겹게 소리를 냈다.

후우웅. 말의 등에서 내리자 중력이 나를 지면으로 잡아당겼다.

오러를 갈구하는 거대한 이빨.

나는 송곳니에 마음껏 기운을 불어넣어 주며 빙그르르 돌았다.

푸화아악!

수평으로 돌며 휘두른 대검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단순한 베기 동작이었지만, 요새 하나를 침묵시키는 데에는 충분했다.

장대비처럼 쏟아진 파멸의 불, 송곳니가 토해 낸 불길은 뚜껑처럼 요새의 상부를 덮었다.

“끄아아!”

“흐어엇!”

요새 내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족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들이 준비한 무기와 함정, 마법진이나 키메라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으스러졌다.

그렇게 10분이 흘렀을까.

“정지!”

부리나케 달려온 깨비는 불길을 눈앞에 두고 부대를 정지시켰다.

그러고서 나를 바라보며 경외심이 가득 찬 눈빛을 보냈다.

이제 적의 전선을 뚫었으니 이제는 마음껏 활개 치며 돌아다닐 차례였다.

“뭘 그렇게 멍하니 쳐다보고 있어. 이제 시작이라고?”

나는 로시난테에 올라탄 채로 땅에 내려와 적진의 내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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