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64화>
164. 평화의 끝 (3)
짧은 회의가 끝나고.
카시안은 회의실 안에서 나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빠르게 적의 동향을 알려 줘서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그게 제 역할인걸요.”
“하하하! 여태까지는 아주 완벽했지.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를 치켜세우던 카시안은 갑자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100만에 가까운 목숨이 뒤섞이는 싸움이 시작될 터.
여기서 패배한다면 판게아는 획득한 영토를 잃는 것도 모자라, 정말로 마족의 노예가 될지도 모를 테니까.
“루카 의장,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
카시안은 지도를 살펴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씀하시죠.”
“발라크와 그 마족들. 전쟁의 승자가 우리가 되면 그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발라크가 과연 어디까지 함께할 수 있을지.
전쟁이 부쩍 다가오자 카시안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아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가시는 발라크의 처분일 터였다.
“최소한, 푸르카스를 처치하기 전까지는 우리와 함께하겠죠.”
“그다음은? 그 근원이라는 초월자의 힘. 그걸 차지하려고 하지 않겠나.”
“아무래도 그러겠죠. 발라크는 분명 근원을 가지려고 할 겁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지. 그 근원이라는 걸 노리는 건 발라크가 전부인가?”
한숨을 쉰 진짜 이유는 이거였나?
나는 근원과 초월자에 대하여 총사령관에게 말해 준 적이 있다.
푸르카스가 부리는 특수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해 주지 않았는데. 카시안은 제한된 정보를 짜 맞춰서 나름의 결론을 내린 듯 보였다.
“혹시 한번 찔러보시는 겁니까?”
“절반은. 하지만 지금은 확신하게 되었네. 과연 자네의 초월자도 근원을 노리고 있는 건가.”
나의 초월자?
카시안은 계속 내가 어떤 신을 모시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떠올려 보니, 예전에 마계를 침공하면서 신탁을 받았다고 했었지.
‘뭐, 내가 직접 근원을 취할 거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시안은 굳이 진실에 목을 매는 사람이 아니다.
본인의 이익이 된다면 힘을 보탤 사람.
나는 상대의 생각과 희망에 맞춰 대답을 내놓았다.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카시안은 내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사기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게 근원이다.
그걸 가지겠다고 당당히 말하는데, 웃음이 안 나올 수 있겠나.
하지만 그 뒤에 튀어나온 카시안의 표정에는 권력가의 야망이 엿보였다.
“나는 그 근원이란 걸 자네가 가졌으면 좋겠네.”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 이 전쟁에 참여한 종교 세력은 엘프와 판게아 신성회, 그리고 자유 무역 연합의 리버티 교단까지. 세 곳이 아닌가.”
“그들도 근원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겠나?”
살짝 잘못 짚은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카시안은 부족한 정보를 이용해서 그럴듯한 추론을 펼쳤다.
푸르카스가 가지고 있다는 근원, 판게아가 마계로 진격한 진짜 목적은 그것에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판게아 신성회와 세계수. 그 둘은 나에게 직접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곳이지. 그러니 그들이 더 큰 힘을 가져서는 절대로 안 되네.”
“굉장히 이기적인 생각이시군요.”
“그러면 안 되나? 나는 여태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는 걸 참을 수가 없네.”
드드드.
탁자 위에 올린 카시안의 주먹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권력가였다.
“어차피 신성회 놈들은 나를 황제로 추대한 적이 없었네. 자네의 계략으로 어쩔 수 없이 나를 지지한 거지.”
“그래서 제가 근원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거군요.”
“내가 황제에 오르도록 도와준 사람은 자네가 아닌가?”
내 앞에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의 선택을 기다리는 카시안이 있었다.
두려움, 그를 지배하는 감정은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총사령관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래도 사리사욕 때문에 그릇된 선택을 하지는 않길 바랍니다.”
“당연한 말이네. 이번 원정이 성공하지 않는다면, 어렵게 얻은 황제의 자리는 물거품이 되지 않겠나.”
“그렇군요. 솔직하게 말씀하시니 더욱 믿음이 갑니다.”
나는 빤히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군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폐하, 저는 언제나 폐하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대의 초월자께서도 그리 생각하신다면, 정말 감사할 따름이네.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맡겨두게.”
젊은 황제는 탁자에 팔을 올리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회의실에서 나가도 좋다는 의사 표현에 나는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폐하, 제가 발라크에게 직접 대동맹의 소집령을 전하면 안 되겠습니까?”
카시안은 내가 직접 니플헤임으로 가겠다는 말에 의아함을 내비쳤다.
“굳이 그 춥고 위험한 땅으로 가겠다니. 이유가 뭔가?”
“소집령을 전하는 건 핑계고.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전쟁 이후에 발라크의 처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발라크에게 확인할 것이 있다.
나는 카시안을 안심시키며 허락 아닌 허락을 받아 냈다.
“자네의 뜻을 말릴 수는 없겠지. 그럼, 니플헤임에 갈 더 좋은 핑계는 내가 만들어 주겠네.”
카시안은 본인의 압축 주머니에서 통신구 꺼내 건넸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금방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 * *
니플헤임.
로시난테와 나는 다시 한나절을 날아와서 혹한의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말이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마계를 돌아다니느라 오늘 하루는 아주 바빴다.
‘날을 꼬박 세어 버렸네.’
분명 저녁에 출발했는데, 다시 저녁이 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신체 덕분에 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워낙 다급하게 여러 문제를 신경 쓴 탓에 정신적인 피로감은 살짝 느껴졌다.
두두두두.
주변을 둘러보며 잠깐 대기하니.
저 멀리서 키메라를 타고 다가오는 마족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한번 영지를 방문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마중 나온 마족이 누구인지는 바로 알았다.
“대종족 의회에서 오신 루카 의장님. 정식으로 뵙는 건 처음이군요. 번영의 악마, 오키라입니다.”
오키라.
일전에 나에게 당해서 설원에 쓰러졌던 악마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발라크는 같이 오지 않았나 보네.”
“발라크 님께서는 전쟁 준비로 한창 바쁘신지라.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도 물품만 전달하고 바로 돌아갈 거야. 잠깐이면 되니까 직접 만났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키라는 저번과 다르게 상당히 예절이 주입된 상태였다.
그녀는 곧바로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발라크가 있다는 장소로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오키라의 말에 나는 은밀하게 주위로 기감을 퍼트렸다.
저런 말만 들으면 왠지 뒤통수가 얼얼하단 말이야.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돌아온 그녀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발라크 님께서 들어오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오키라는 정중하게 얼음 동굴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여기가 발라크의 숙소쯤 되는 건가.
쭉 뻗은 얼음 통로를 따라 걸으니 넓은 공동이 나왔고, 발라크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가면과 망토로 온몸을 가린 채로.
“나에게 전해 줄 물건이 있다고?”
“그래. 저번에 줬던 통신구보다 더 개선된 물품이 나왔거든.”
카시안이 만들어 준 명분.
그건 새로 나온 통신구를 발라크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조금 궁색할지도 모르나, 단순히 만나길 바란다고 해서 요청에 응해 줄 위인은 아니니까.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직접 와 주다니. 아주 고맙군.”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겸사겸사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오키라에게 통신구를 건네주고 다시 발라크를 보았다.
진짜 목적은 발라크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강아지남에게 여러 정보를 물어보았다.
발라크와 누더기 드래곤.
이 둘의 정보도 당연히 빼놓을 수는 없었다.
푸르카스와의 싸움이 끝나면 다음 상대는 발라크가 될 확률이 높다.
속을 감추고 있는 상대에 맞서려면 어떻게든 정보를 모으는 수밖에.
‘머리가 3개 달려 있던 누더기 드래곤은 차원 대전쟁 시절에 발라크가 수집한 드래곤의 시체였지.’
발라크는 유독 집요하게 드래곤의 시체를 노렸다.
그가 수집한 드래곤의 시체는 총 여섯 구, 그중에서 내가 확인한 드래곤 하트는 여태까지 총 다섯이다.
분명 나머지 하나도 어딘 가에 가지고 있을 터.
“우선 들어보고 답하도록 하지.”
“별거 아니기는 해. 어째서 나에게 그 귀한 드래곤 하트를 준 건지. 그 이유를 듣고 싶어서.”
“아, 그거 말인가? 남아 있어서 하나를 주었을 뿐. 다른 뜻은 없다.”
“그래서 궁금하다는 거야.”
드래곤 하트.
이제 그 물건을 구할 방법은 없다.
인류를 위해 희생했던 라그나를 끝으로 드래곤은 멸족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째서 발라크는 영원히 구할 수 없는 물건을 나에게 주었는가?
‘누더기 드래곤을 하나 더 만드는 게 더 이득일 텐데 말이야.’
발라크는 대답에 불만족스러워하는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러다가 쓸데 없는 논쟁에 휘말리기 싫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굳이 비밀로 할 이유는 아니니 말해 주도록 하지. 드래곤은 흉포하다. 그게 이유다.”
“앞과 뒤를 다 잘라먹은 답변은 되려 의심을 사더라고.”
“집요하군.”
“의심을 덜어 준다면 이렇게 집요하게 굴 필요도 없지.”
“드래곤 하트는 단번에 여러 개를 다루기 힘들다. 그놈들은 육신이 사라진 다음에도 끊임없이 반항하기 마련이니.”
오호라, 그렇다는 말이지.
강아지남에게 정보를 받으면서 생긴 의문점이 단숨에 해소된 순간이었다.
발라크가 던진 무의미한 말들은, 최소한 나에게는 결정적인 증명 수단이 되었다.
드래곤 하트는 주인에게 저항하며, 여러 개를 다루기 힘들다.
나는 이 정보를 머리에 새기며 미소를 지었다.
발라크에게 찾아온 목적은 해결, 이제는 영지로 돌아가서 전쟁을 준비하는 일만 남았다.
“뭐, 필요 없어서 준 물건이라니. 어쨌든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어.”
“……알아주었다면 다행이다. 이제 곧 공격을 시작할 거라는데, 들었던 대로 움직이면 되겠는가?”
“공세를 시작하는 건 일주일 뒤야. 잊지 말고 잘 준비하라고.”
“알겠다. 기억하지.”
나는 대화를 끝내고 얼음 동굴을 빠져나왔다.
큰 키로 나를 내려다보던 발라크는 그대로 꼿꼿이 땅 위에 서 있을 뿐.
영지로 돌아가는 동맹을 배웅해 주지 않았다.
동굴을 빠져나온 뒤, 나는 뒤에 선 오키라를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항상 동맹에 매정하게 구네. 이래서 등을 맞대고 싸울 수나 있겠어?”
“그건 오해이십니다. 발라크 님은 항상 동맹과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노력 중이십니다.”
“그러길 바라야지. 로시난테!”
나는 피식 웃으며 백설처럼 하얀 말을 불렀다.
푸르르, 녀석은 이 추운 공간에 더는 있기 싫다는 듯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녀석의 목을 두어 번 쓸어 주고 오키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음번에는 전장에서 보자고.”
소집령이 내려진 대종족 의회.
나는 고삐를 쥐며 내가 떠났던 영지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