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59화>
159. 적과의 동침 (3)
데모니움 내성.
건물로 사방이 둘러싸인 넓은 정원의 중심에 두 사내가 섰다.
하나는 마른 체형의 인마족, 반대쪽은 이전에 쓰던 롱소드와는 다른 형태의 곡도를 든 깨비가 있었다.
- 깨비야, 명령이다. 반드시 이겨.
나는 사념을 보내며 일부러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깨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본인의 오른손에 든 시미터와 왼손에 찬 팔찌를 의식하며 의지를 다잡았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는 이번 기회에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깨비에게 물려주었다.
자린고비의 은총과 바크의 시미터.
이 둘은 이제 나에게는 쓸모없는 물건, 차라리 깨비에게 주는 편이 더 실용적이기 때문이었다.
찰칵, 찰칵!
둘의 주위로 섬광이 마구 튀었다.
정원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기자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겠지.
비마족 마계인과 마족의 결투.
심지어 둘은 아주 긴 역사 동안 원한을 쌓아 온 원수지간이니, 세부적인 스토리 텔링도 필요가 없다.
“둘의 모습이 더 잘 담기게 찍어. 좌우에서 서로를 노려보게. 그렇지!”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상기된 얼굴로 셔터를 눌러댔다.
기사의 제목은 굳이 말해 줄 필요도 없지.
무조건 대종족 의회에 유리하도록 기사를 써 줄 것이다.
‘겸사겸사, 우리 세력이 홍보가 되기도 하고.’
판게아의 일반인이 마계의 일을 듣는 방법은 신문이 거의 유일하다.
대종족 의회는 아직 안개 건너편에 있는 미지의 세력.
이번 기회에 좋은 인상을 남기면 판게아 측에서 여러 지원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
“모두 주목해 주시오!”
어수선한 분위기를 단번에 휘어잡은 존재감.
판게아 대동맹의 수장, 총사령관 카시안의 등장에 청중의 소음이 일거에 사라졌다.
그가 가진 연설과 관련된 특성과 텔런트의 효과였다.
“종족 간의 합의가 이뤄질 이 자리에,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고 친목을 다지기 위해 용감한 두 전사가 나섰소.”
카시안은 이 급작스러운 싸움을 최대한 좋게 포장해 주었다.
말 그대로 친선 대련이니까.
그 때문에 깨비와 고위 마족은 근접 무기만 가진 채로 결투에 임해야 했다.
“친선 대련은 둘 중 하나가 항복하거나 큰 부상이 염려될 때 끝날 것이오. 다들 동의하오?”
통역관들은 카시안의 말을 두 결투자에게 전달했다.
“동의합니다.”
“동의하겠소.”
두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깨비의 경우에는 본인이 의도한 결투였고, 조련사도 딱히 물러설 이유는 없었다.
마족들로서도 기세등등한 인간과 비마족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기회일 터.
절대로 쉽게 지거나 물러설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 정말로, 저희가 이겨도 되는 겁니까?
마족 중에서 유일하게 긴장한 자는 다름 아닌 프린지였다.
저 녀석은 계속 나에게 사념을 보내며 승부 조작을 제의했다.
- 아,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최선을 다해서 박살 내라고 전해.
- ……알겠습니다.
만약 프린지가 부하를 갈궈서 의도적으로 져 준다면?
그건 깨비가 다진 각오에 대한 배신이다. 이 결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챙겨 준 게 아닌 스스로 쟁취한 자신감 말이다.
“대전사님이 이길 수 있을까.”
“저 마족. 굉장히 강해 보이는데.”
“의장님이 아니라면, 저런 마족을 어떻게 이기겠어.”
주변에는 대종족 의회의 구성원들도 많았다.
여태껏 비마족들은 숱한 전투에서 마족들을 이기고 또 죽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나서서 이길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항상 만만한 상대하고만 싸울 수는 없는 법이지.’
힘든 싸움이 될 건 불 보듯 뻔하다.
그래도 결투의 승리는 깨비가 직접 거머쥐어야 했다.
“주위의 안전을 위해 원거리 무기는 제외하도록 하고, 자신의 힘과 몸에 걸친 아티팩트로만 사용할 수 있소. 다들 동의하시오?”
두 남자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였다.
카시안은 깨비와 조련사를 번갈아 본 이후에 엄중하게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이 친선 대련의 결과를, 판게아 대동맹의 총사령관인 카시안 폰 스부르크의 이름으로 보증하겠소. 모두 무운을 비오.”
스릉.
그가 발을 뺌과 동시에 조련사와 깨비가 무기를 꺼냈다.
깨비는 내가 준 시미터를 뽑았고, 조련사는 작은 방패와 칼날이 60cm쯤 되는 소검을 꺼냈다.
“제 이름은 깨비입니다. 제 주군께서 친히 지어 주셨죠. 그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알 필요 없……. 슈라드라고 한다. 그러니 잔말 말고 덤비기나 해라.”
슈라드.
이름을 밝힌 고위 마족은 주변의 인간들을 의식하며 방패와 검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짜증과 분노, 그리고 약간의 억울함.
그런 복잡한 감정이 얽힌 슈라드에게 깨비가 검을 늘어트리고 달려들었다.
캉! 카강!
손바닥 크기의 작은 방패.
흔히 버클러라고 불리는 방패를 든 슈라드는 시미터를 가볍게 받아쳤다.
첫 합을 주고받은 뒤, 둘의 기세는 극명하게 갈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슈라드는 조롱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소검을 휘둘렀다.
후우웅, 거의 50cm에 육박하는 칠흑빛 검강.
마기를 압축해 만든 칼날이 깨비의 사지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카시안과 그 기사들은 몸을 움찔거리며 당장 튀어 나갈 준비를 했지만.
나는 가만히 깨비가 뒷걸음치는 장면을 구경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검강을 다루는 자와 싸우는 건 익숙할 테니까.
휭, 후웅.
슈라드의 검강이 연달아 허공에 휘둘러졌다.
살갗은커녕, 깨비의 옷자락조차 베지 못하자 슈라드는 더욱 신경질적으로 검을 움직였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검강을 받아내며 수련을 받았는데. 상대적으로 느려터진 공격에 가만히 당하겠는가.
“도망만 가지 말고. 맞서 싸…….”
까앙!
깨비는 안정적으로 숨을 고르며 검을 피해 냈다.
그러면서도 가끔 상대의 허점을 발견하면 지금처럼 곧바로 검을 내질렀다.
실전에서 본인보다 강한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던 거지, 나와 훈련하며 강자와의 싸움은 수없이 겪어 왔다.
‘이길 확률이 4할은 되려나.’
변수가 있다면 상대가 가진 아티펙트.
슈라드의 검과 옷은 평범했지만, 방패는 마법 부여가 된 물건이었다.
“읏! 비겁한 놈.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같은 동료인데, 이제 그런 말은 하지 마시죠. 슈라드 씨.”
“뭐라?”
슈라드 씨.
무심하게 뱉어낸 깨비의 말에 고위 마족의 힘줄이 꿈틀거렸다.
‘저거, 발작 버튼을 제대로 눌렀는데?’
슈라드를 포함해.
여기 있는 마족들은 아직 비마족을 동급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깨비는 그런 부분을 제대로 포착해서 상대를 도발해 버렸다.
아직 심화 부분은 가르치지도 않았건만, 스스로 학습해서 도발을 사용하다니.
“노에 새끼 주제에!”
“슈라드 씨,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결국, 슈라드는 해서는 안 되는 단어를 꺼내 버렸고.
깨비는 정중하게 타이르며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칼날을 피해 냈다.
둘은 상황의 심각성을 모른 채로 ‘친선 대련’을 이어 나갔다.
- 저, 저기. 이제 말릴까요?
오히려 청중 속에 있던 프린지가 더 놀랐을 정도.
나는 건너편에 있는 프린지를 노려보며 사념을 날렸다.
- 그걸 알았으면 진즉에 부하 교육을 똑바로 하던가.
- 죄, 죄송합니다. 제가 최근에 영지 관리에 힘쓰느라 다른 쪽으로는 신경을…….
- 됐고, 대련을 멈추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저렇게 끓는 기름에 물을 부은 것처럼 나서 준다면 대환영이지.
악역을 자처하는 슈라드에게 경의를 표하며, 나는 주변 기자들을 쓱 훑었다.
그들은 통역관이 전해준 말을 듣더니, 손에 들린 메모장에 기사에 쓸 말들을 빠르게 적어 나갔다.
그 순간.
채채챙!
깨비와 슈라드의 검이 부딪치며 마기와 오러가 튀었다.
시미터에 솟아오른 희미한 검강.
분명 피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막아 낸 것이겠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둘의 대결에 집중했다.
“흐하하,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고작 거기가 한계다. 버러지로 태어났다면 버러지로 죽어라!”
이미 선을 넘어 버린 슈라드.
검강으로 휩싸인 그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두 번째 벽을 넘지 못한 깨비의 움직임으로는 절대로 피하지 못할 속도였다.
“응?”
검강이 닿기 직전, 슈라드는 당혹감을 토해냈다.
깨비의 몸에서 오러의 존재감이 커지더니, 그의 신형이 휙 하고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촤아앙!
목표를 잃은 검은 그대로 지면을 할퀴었다.
속도에서 밀렸다. 처음으로 깨비의 움직임을 놓친 슈라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미 검을 휘두르고 있는 깨비가 있었다.
“다시는 우리를 무시하지 마십쇼!”
작은 방패로는 검을 막아 내지 못할 터.
깨비의 검은 수평으로 움직이며 적의 복부를 노렸다.
물론, 슈라드에게도 회심의 한 방은 있었다.
우우웅.
슈라드의 버클러에서 진동이 울리며 검은빛이 도는 방어막이 펼쳐졌다.
그 위로 깨비의 검강이 떨어졌다.
파앙! 검강은 방어막에 거대한 균열을 냈으나 완전히 파훼하지는 못했다.
슈라드는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비릿하게 웃었다.
‘깨비의 검강이 오래가지 못할 걸 알고서 버티려는 수작이군.’
바크의 시미터는 오러의 효율을 높여 준다.
때문에 깨비는 검강을 조금 더 길게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끽해봐야 1~2초 정도 더 지속할 뿐. 이제 깨비에게는 시간이 없으리란 판단일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래? 이쯤에서 싹싹 빈다면…….”
“웃기지 마십쇼. 저의 승리입니다.”
무덤덤하게 말한 깨비의 손목에서 빛이 뿜어졌다.
자린고비의 은총, 그곳에 저장되어 있던 오러가 새로운 주인의 지시에 이끌려 나왔다.
꺼져 가던 검강은 다시금 화려하게 불타올랐고, 멈춰 있던 시미터도 조금씩 움직였다.
스거엉.
그 직후, 슈라드의 방패가 잘려 나가며 친선 대련의 승자가 정해졌다.
* * *
이튿날 아침.
데모니움 본성의 치료소,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깨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살 만하냐.”
“예, 현기증이 조금 심하기는 하지만요.”
깨비는 몸을 살피다가 손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상처는 자잘한 것들이 전부, 단순히 너무 많은 힘을 써버린 탓에 휴식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그래도 작전은 잘 먹혀서 다행입니다. 주군께서 기술을 잘 알려 주신 덕분입니다.”
“안 그래도 도발은 잘하더라. 딱히 가르친 것도 없는데.”
“예? 저는 ‘오버 클럭’을 말한 겁니다만.”
“뭐?”
아니, 그러면 슈라드에게 했던 말이 도발이 아니었다는 거야?
돌이켜보면 딱히 비꼬는 태도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나는 갑자기 피어오른 의문을 밀어 넣고서 웃어주었다.
“그래, 그동안 열심히 수련한 보람이 있었지?”
“예, 그게 없었다면 저는 무조건 졌을 테니까요.”
결전의 순간.
깨비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진 건 순전히 ‘오버 클럭’의 효과였다.
내가 아는 스킬 중에서 깨비와 비마족이 사용할 수 있는 건 오버 클럭뿐이었다.
해서 나는 이전부터 꾸준히 수련을 시켰고, 이번에 그 수련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슈라드라는 놈이 근접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게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국물도 없었어.”
“그래도 제가 이겼습니다.”
“좋겠다. 이겨서 병석에 누워 있기나 하고.”
어련하겠어. 지금껏 올려다보지도 못했던 상대를 이긴 건데.
드르륵. 나는 의자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동맹끼리 향후의 일을 논의하기로 되어있다.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른 거야. 이제 가 봐야 해. 에버딘에게는 잘 이야기해 두고.”
“예, 알겠습니다. 에?”
“뭘 아닌 척을 하고 그래.”
나는 어쩔 줄 모르는 깨비를 두고 병실에서 나왔다.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토끼녀는 내가 방에서 나오자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성내의 분위기는 어때.”
“미묘하게 더 활기가 느껴지고 있어요. 어제의 승리 덕분이겠죠.”
“그러겠지. 회의 준비는 다 끝났고?”
“네, 준비한 문서는 미리 회의실에 가져다 두었어요.”
전야제는 끝났고.
이제는 진짜 이번 만남의 목적을 달성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