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58화>
158. 적과의 동침 (2)
영리하게 싸우고 싶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깨비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배웠다. 여태까지는 싸움과 전투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에서 굉장히 실용적인 수업이 되겠어.’
마침 클리프와 스칼렛, 그리고 펠리스는 여기에 없다.
그 셋은 파티와 회의는 지겹다며 다른 지역에서 대종족 의회의 일을 돕고 있었다.
‘마음껏 달리기에는 최적의 상황이지.’
나는 깨비의 옆에 서서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판게아에서 온 기자들, 마족, 비마족, 카시안의 수하들.
우리를 둘러싼 요소는 대략 이러했다.
“깨비야, 주위를 봐봐. 뭐가 보여?”
“사람들이랑. 마족들이랑.”
“아니, 그런 것들 말고.”
깨비는 아주 순수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래, 처음에는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여기는 사실 전쟁터야.”
“전쟁터요?”
“그래,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고 있지.”
“그렇군요.”
깨비는 눈빛을 반짝이며 사방을 살폈다.
“일단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니까 연회장으로 들어가자.”
“예, 주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전쟁터.
말 그대로 이곳은 마족과 인간이 목숨을 대신해서 자존심을 걸고 싸우는 곳이다.
나와 깨비가 연회장 안으로 발을 들이밀자, 두 종족 대표가 솜씨를 발휘한 내부 장식이 이목을 끌었다.
트리어가 만들어 낸 나무 넝쿨이 신비한 느낌을 주었고, 이바나의 연금술로 만들어진 장식들이 스스로 은은한 빛을 발산했다.
‘어떻게든 잘 꾸며 내긴 했지.’
쉽지는 않았다.
본성의 실내장식을 모조리 뒤엎어 버리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노예 출신들이 파티나 행사를 준비해 본 경험이 있겠는가.
그나마 이렇게 연회장 흉내라도 낼 수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다.
“깨비야,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연회장 밖을 봐봐.”
“네, 판게아에서 온 기자라는 분들이시군요.”
“저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낼 수 있는 일을 좋아해.”
“오호. 제가 지금 하려는 일이 저들에게는 호재겠군요?”
이해가 빨라서 좋네.
나는 깨비의 말에 동의하면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카시안과 그의 수하들이 술을 주고받고 있었다.
“다음으로 넘어가서, 저 무리는 너의 일을 어떻게 생각할 거 같아?”
“그, 싫어하지 않을까요. 이 자리는 동맹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고 만든 거잖아요.”
“싸움을 우리 쪽에서 건다면 그렇겠지.”
“아하, 마족이 저에게 시비를 걸어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다.
깨비가 가서 아무 마족에게 침을 뱉는 방식은 곤란하다.
어떻게든 마족이 먼저 팔이나 발을 휘둘러야 할 터.
나는 간단하게 판게아 대동맹의 입장을 말해 주었다.
“판게아는 굳이 분란이 생기지 않길 원하고 있어. 하지만 뭔가 건수가 있길 바라기도 해.”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엇갈리겠군요.”
“정확해. 그리고 판게아에서는 비마족 마계인을 아인종과 같은 범주에 두고 있거든. 판이 만들어지면 너에게 유리하게 여론을 형성할 거야.”
마족과의 동맹 따위.
판게아에 그런 일을 반길 사람은 절대로 없다.
지금은 아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힘을 합칠 뿐.
나는 상황을 설명하고서 마족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네, 저쪽이 먼저 싸움을 걸게 만들고. 그걸 영웅적으로 포장하는 거죠. 최대한 불화가 커지지 않으면서요.”
“좋아! 제대로 이해했어.”
이거 뭔가 신나는데?
순수한 깨비를 서서히 물들이는 작업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이제 다음 단계, 우리의 상황을 이해했으니 상세한 작전을 구상할 차례였다.
깨비는 마족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근데 어떻게 싸움을 걸죠?”
“너무 마족들을 째려보지는 말고. 자, 여기 있는 술잔을 들어.”
“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기막을 유지하면서 근처 테이블에 놓여있던 술잔을 들어 깨비에게 주었다.
너무 티 나게 작전을 구상하는 것처럼 보이면 곤란하니까.
덧붙여 싸움을 거는데 술이 빠지면 섭섭하기도 하다.
“제일 중요한 건 누구와 싸우느냐는 거야.”
“저는 누구든 자신 있습니다.”
“무슨 소릴. 현실적으로 생각해. 현실적으로. 저기서 누구와 싸우는 게 가장 좋을 거 같아?”
프린지는 여러 수하를 데려왔다.
대부분 상급 마족 이상, 악마급은 없었고 고위 마족이 3명 정도였다.
깨비는 곁눈질로 상대를 보더니 호리호리한 몸집의 마족을 선택했다.
“저기 저 마족이요. 여기에 오면서 노예라는 말을 가장 많이 썼거든요.”
“이유야 뭐가 됐든 잘 선택했어. 저 중에서는 가장 약하거든.”
“정말입니까?”
“그래, 나머지는 조금 까다로워 보이거든. 상대적으로.”
깨비는 두 번째 벽을 코앞에 두고 있다.
무리하면 검강을 발현할 수 있으나 그것도 몇 초가 한계.
그렇다고 상급 마족과 싸운다면 판게아의 기자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 터.
정치적으로는 고위 마족과 한판 붙는 편이 좋다.
‘그러면 가장 만만한 상대가 좋지.’
하나는 최강의 육체를 지녔다는 발록, 다른 하나는 발이 빠른 다크 엘프.
두 고위 마족은 깨비가 이길 가능성이 너무 낮다.
반면에 남은 하나는 별 특징이 없는 인마족, 게다가 앞선 두 놈에 비해서 더 미약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
“네가 고른 놈은 마수 조련사야.”
“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상체와 하체 근육이 별로 발달해 있지 않아. 그렇다고 마법이나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는 것 같지도 않고. 대신에 팔뚝에는 발톱 자국이 유난히 많지.”
“그렇군요. 눈썰미가 정말 좋으십니다.”
“원래 누구든 치밀하게 벗겨 먹……. 상황에 맞게 대응하려면 관찰력이 뛰어나야지.”
오오,
깨비는 그리 말하며 순수하게 감탄을 내질렀다.
그러다가 연회장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대종족 의회의 일원들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주군께서 이전에 하셨던 말씀. 이제는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거 같습니다.”
세상일에 정해진 답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이의 조언도 스스로 결정한 생각과 신념만큼 값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무어라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힘을 기르겠습니다. 오늘은 뒤에서 제가 이길 수 있는 상대를 정했지만. 내일은 그 누구와도 싸워서 지지 않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근데 뭔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예?”
“저 마수 조련사도 쉬운 상대는 아니야. 오히려 너보다 실력은 더 좋을걸?”
연회장의 비마족들을 아니꼽게 보고 있는 마수 조련사.
다른 건 몰라도 그가 지닌 마기의 밀도는 깨비를 상회한다. 정정당당하게 붙으면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하겠지.
나는 깨비에게 내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건네며, 천천히 상대의 공략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승률을 올려야지.”
* * *
흥겨운 연회의 시간.
데모니움 본성의 연회장에는 동맹을 맺은 여러 종족이 모여 즐겁게 술판을 벌였다.
최소한 겉에서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마족 놈들 아주 기고만장이군.”
“저놈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알아?”
“몰라, 우리와 비슷한 말이나 하고 있겠지.”
카시안과 동행한 기사들은 은근슬쩍 마족들을 훔쳐보며 씹어댔고.
“나약한 인간 놈들이 계속 우리를 쳐다보는군.”
“내버려 둬. 어차피 여기서 싸울 것도 아니잖아.”
“우리 할 일은 가만히 있다가 가는 것뿐이야. 굳이 휘말릴 필요 없어. 어이! 여기 술이나 더 가져와.”
마족들은 인간들의 눈치를 살피며 연거푸 술을 찾았다.
그 살벌한 분위기 안에서 비마족들은 열심히 음식과 술을 날랐다.
확실히 안내역으로 마족들을 인솔하면서도 분노를 참았던 깨비가 결단을 내린 이유가 있었네.
‘여기는 우리 구역이니까.’
손님들이 주인을 내버려 두고 저들끼리 논다고?
그런 건 절대로 못 참지. 나는 시선을 옮겨서 호리호리한 체형의 마족에게 가고 있는 깨비를 보았다.
- 내가 알려 준 대로 말하면 돼. 그러면 무조건 화낼 거야.
나는 술잔에 든 내용물을 호로록 삼키며 상황을 주시했다.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응? 너는 뭐냐.”
깨비가 마수 조련사에게 말을 걸자, 남자 인마족은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대충 어디서 상전에게 함부로 말을 거냐는 의미.
우리의 순수 청년은 그런 혐오성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술잔을 내밀었다.
“뭘 그리 험한 말씀을. 이제는 같이 어깨를 맞대고 목숨을 지켜 줄 사이 아닙니까?”
“누가? 네가?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지. 지금 간신히 참고 있는 거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저희는 이제 동등한 동맹이 아닙니까.”
툭.
깨비가 상대의 팔뚝에 살포시 손을 올려놓았다.
저 정도면 충분하겠지. 굳이 이후의 상황은 더 볼 것도 없었다.
마수 조련사는 소리를 꽥 지르며 술잔을 집어 던졌다.
나는 그와 동시에 프린지에게 사념을 보냈다.
- 부하 관리 좀 하지?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프린지는 몸을 날려 깨비에게 주먹을 날리려던 마수 조련사를 걷어찼다.
콰앙!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마족 하나가 테이블에 나가떨어졌다.
‘적당히 힘 조절을 했네.’
마수 조련사는 약간의 타박상을 입었다.
심지어 트리어가 특수 제조한 테이블도 멀쩡할 정도.
나를 의식해서 부하의 행동을 멈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갑자기 저 고위 마족이 뿔족 대표란 자를 때리려 했고. 그걸 마족 대표가 걷어찼습니다.”
커다란 호통과 그 뒤에 이어진 폭력.
그에 반응한 카시안과 기사들이 걱정 섞인 얼굴로 대화를 나눴다.
이쯤에서 내가 나서 줘야지. 나는 재빨리 사건이 일어난 장소로 달려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런 자리에서 폭력을 일삼을 정도로 무례한 것이오?”
테이블에 나자빠진 마수 조련사.
나는 그를 쳐다보며 나무라듯 몰아붙였다.
프린지는 그저 나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할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아니, 이건. 이, 노예. 아니, 이 녀석이.”
마수 조련사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겸상도 못 할 천한 놈이 제 몸에 손을 댔으니 어련하겠어?
그래도 이제는 1000년의 노예는 사라지고 없다.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서 잘 행동하지 못했다면,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할 터.
“루카 의장. 무슨 일이오?”
이미 분위기를 휘어잡았을 때.
카시안이 뛰어오며 나에게 물었다.
그와 동시에 신성제국의 기사들이 나와 마족의 사이를 갈랐다.
‘자, 이제 판은 만들어졌다.’
먼저 폭력을 쓴 쪽은 명백히 마족이다.
게다가 노예라는 말도 어렴풋하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는가.
나는 한 치의 거짓도 포함하지 않고, 지금 일어난 모든 일을 카시안에게 말해 주었다.
“그게, 사실인가?”
카시안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깨비는 어눌하지만 확실한 어투로 본인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
마족들은? 여기서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마족은 하나였다.
프린지.
그는 내 안면을 살피고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내 부하의 잘못이오.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처벌하도록 하겠소.”
이러면 되겠죠?
대충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내며, 프린지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수 조련사의 처우를 우리에게 맡기겠다는 뜻.
“깨비, 너는 어떻게 하길 바라지?”
“저는 조금 전에 대종족 의회의 대표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겪었습니다. 그러니 정정당당한 결투로 치욕을 갚고 싶습니다.”
깨비는 정의로움이 줄줄 흘러내리는 근엄한 얼굴로 뜻을 밝혔다.
“이렇게 결론을 내고 싶다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욕을 당했다면 정당한 승부로 결정하는 게 옳습니다.”
“저도 강철과 피의 결투로 명예를 지키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성 제국의 기사들은 깨비의 용기를 높이 사는 모양새였다.
반면에 카시안은 결투라는 말에 살짝 미묘한 감정을 내비쳤다.
역시나, 총사령관이라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굳이 결투라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친선 대련으로 하죠. 친선 대련.”
“음, 친선 대련이라. 서로 크게 다치지 않는 선에서 싸우는 편이 좋긴 하겠지.”
카시안의 동의까지.
이제 습관을 잘못들인 마족을 혼내 줄 준비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