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57화 (157/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57화>

157. 적과의 동침 (1)

타타탕, 타타타탕!

반자동소총 수십 정이 연달아 불을 뿜어댔다.

8발을 모두 쏜 병사들이 물러난 뒤, 새로운 병사들이 과녁을 노리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데모니움 본성 인근, 최근에 건설된 훈련소는 화약과 병사들의 피와 땀 냄새로 가득 찬 상태였다.

“아직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다들 열의로 가득 차 있어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습니다.”

이 훈련장을 총괄하는 중년의 남자.

록펠스 PMC의 사장인 페도르가 이전과는 다른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살핀 다음, 내 손에 들린 기다란 소총으로 눈길을 돌렸다.

“열의는 예전부터 엄청 났습니다. 우리를 괴롭힌 건 항상 이거였죠.”

내 손에 들린 소총은 새것이 아니었다.

이 소총은 자유 무역 연합의 허름한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이다.

보통 판타지 세계에서 오래된 무기는 엄청난 위력이나 효력을 가지고 있겠지만.

‘총은, 그냥 구닥다리일 뿐이지.’

8발 장전이 가능한 반자동소총.

지구에 있을 때, 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M1 개런드 소총과 외형도, 성능도 아주 흡사한 물건이었다.

자동소총이 제식 무기로 지정된 무역 연합군에 비하면 초라할 따름이다.

그래도 총알이 박히면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많이 아쉬우신 모양입니다.”

“뭐, 공짜로 받았는데 이만하면 운이 좋았죠. 무엇보다 다른 무기들도 많이 주셨으니까요.”

나는 훈련소 한쪽에 놓여 있는 중화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스칼렛이 마음의 편지를 쓴 이후. 데이브 회장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꾸려서 보내 주었다.

대부분 각 회사나, 무역 연합군의 무기고에 쌓여 있던 재고들.

‘대부분 나이가 40년 이상은 먹은 것들이라는 게 흠이지만.’

예전에 개척지에서 받은 산탄총보다는 낫나?

나는 피식 웃으며 반자동소총을 내려놓고 훈련병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무기가 어색하고 낯설어 보였지만, 열심히 훈련을 받는 모습이 아주 기특했다.

“그래서 무역 연합은 앞으로 무기를 얼마나 공급해 주실 계획입니까?”

“우선 그룹 차원에서 열심히 찾아보고 있으니, 지금 도착한 것에 10배가 순차적으로 도착할 겁니다.”

“10배라. 적은 숫자는 아니군요.”

중화기를 제외하고, 1차로 데모니움 본성에 도착한 소총은 5000정 남짓.

그 10배라 친다면 여분을 빼두어도 4만에 가까운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다.

물론, 그에 맞춰서 보급품을 준비해야 하겠지만.

‘피복류나 식량이라면 크게 문제는 없어.’

데모니움과 에레보스.

이 두 영지는 마계의 다른 영지들처럼 특이한 점이 없다.

대신에 땅은 대체로 기름지고, 평야가 많아서 무엇이든 잘 자라나는 편이다.

그 덕분에 무역 연합에 식량 보급을 책임지기로 약속한 것이니.

“중요한 건 휴전 기간 안에 병력을 훈련시킬 수 있냐는 것이겠죠.”

내가 군인의 수를 고민하는 사이.

페도르는 악을 지르며 달려 나가는 뿔족 전사의 모습을 보며 그런 소리를 했다.

무기만 있다고 뚝딱 군인이 만들어지겠는가.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보급과 훈련. 특히 높은 수준의 무기를 사용할수록 그 둘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탄약 보급 좀 빵빵하게 밀어 주시죠. 이번에 도착한 소총탄은 겨우 500만 발이더군요.”

“이해해 주십시오. 무역 연합의 군수 공장을 모두 가동해도 이게 한계입니다.”

“탄약에 쓰이는 재료는 여유가 있다는 말이군요.”

“그, 그렇습니다만.”

“이참에 잘 됐습니다. 탄약을 수입하는 대신에 그 재료를 수입하도록 하죠.”

자유 무역 연합의 기술을 어떻게든 받아 내고 말리라.

나의 야심을 빠르게 인지한 페도르가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이해는 한다. 제아무리 동맹이고 전시상황이라지만, 기술 유출은 분명 예민한 문제겠지.

나는 곤란하다는 듯이 데모니움 본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것 참. 스칼렛이 싸울 때, 대종족 의회의 총알이 바닥나면 어떻게 될지.”

“크흠, 흠.”

“데이브 회장님을 닮은 스칼렛이라면, 탄약이 떨어진 동료를 나 몰라라 하지 못하고 끝까지 싸우겠죠.”

“건의는……. 드려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차피 공장을 지어도 기술자는 무역 연합의 사람을 써야 할 테니까요.”

지금 당장은 말이지.

나는 뒷말을 삼키고서 페도르를 보며 웃었다.

대종족 의회가 살아남으려면 힘을 가져야 한다. 힘은 무기에서 나오고, 무기는 기술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탄약 공장부터 조금씩 여기로 가져오면 되지.’

물론, 전문 기술자들은 판게아 사람이겠지만.

단순 노동자까지 모두 이곳으로 데려올 수는 없을 터.

기술자 이외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모두 대종족 의회의 사람으로 채우면 될 일이다.

지금은 어떻게든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우는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총사령관님과 마족이 이곳으로 오지 않습니까? 회의와 연회 준비로 바쁘실 텐데 슬슬 본성으로 돌아가시죠.”

페도르는 갑자기 화제를 휙 바꿔 버렸다.

무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더 말려들겠다고 생각했으리라.

이 이상은 힘들겠지. 나는 그의 말을 받아 주며 훈련소 밖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마족과의 회의라. 전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군요.”

페도르는 나를 따라 걸으며 혼잣말을 하듯이 물었다.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자들은 카시안과 프린지, 그리고 나를 포함한 극소수.

무역 연합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 회의에 초대받지 못했다.

“별 이야기는 없습니다. 세부적인 사항은 다음에 의논할 거니까요.”

“그래도 무역 연합이나 다른 세력들은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위험한 곳으로 본인들이 가는 게 아닐지. 그게 궁금하시겠죠?”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일.

다만 정보는 먼저 아는 쪽이 무조건 이익을 얻게 되어 있다.

페도르가 대종족 의회에 파견 온 이유도, 단순히 우리를 지원하러 온 것만은 아니겠지.

“연합 쪽에서 저희에게 보급을 원활하게 해 주신다면야. 우리 모두가 손해 볼 일은 없겠죠.”

“하하하! 이참에 무기 정비창 건설도 회장님께 건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애초부터 카드를 준비하고 온 거였네.

탄약 공장은 몰라도 무기 정비창은 내어 줄 각오를 하고 왔을 것이다.

뭐, 공짜로 무기도 받았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특별히 알려 드리죠. 이번에는 각자의 공격로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겁니다.”

“공격로요?”

“예, 공격 방향이 많을수록 푸르카스의 대응이 어려워질 테니까요.”

림보 영지.

그곳은 푸르카스의 땅이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그곳에서만큼은 푸르카스가 초월자에 비견되는 능력을 발휘할 터.

우리도 그에 맞는 대비를 갖춰야 한다. 내 설명을 들은 페도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부적인 부대의 움직임도 어느 정도는 정해지겠군요.”

“예, 록펠스 그룹의 부대는 저희랑 움직이겠지만요.”

“그래도 무역 연합에 정보는 알려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돕고 사는 건 좋은 일이죠. 회의가 끝나면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와 페도르는 훈련소에서 나와 모처럼 길을 걷기 시작했다.

데모니움 본성으로 향하는 길.

나와 페도르의 앞으로 석재로 포장된 도로가 죽 이어져 있었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완전 동물의 왕국에서나 나올 법한 동내였는데.

‘지금은 시골길 같은 느낌으로 변했네.’

대종족 의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노예들을 해방하고, 영토를 확보하고, 주변 세력들의 배려(?)를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이제는 완전한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은 느낌.

‘마족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도 하게 되었으니까.’

나는 뒤쪽에서 들리는 훈련병들의 함성을 들으며 본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 뿌듯함 마음이 더럽혀지는 데에는 채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 * *

마족과 인간의 만남.

그건 여태까지 주로 전장에서나 일어나던 일이었다.

두 종족이 만나면 항상 둘 중 하나가 죽고, 승자와 패자가 나뉘기를 쭉 반복해 왔다.

“만나서 반갑소.”

“힘을 합치게 되어서 기쁘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프린지와 카시안, 두 남자가 넓은 단상 위에서 악수하며 웃었다.

둘의 뒤쪽에는 그들의 수행원이 나란히 서서 판게아에서 온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찰칵, 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며 화합의 장면이 사진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각국의 기자들은 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경쟁하듯 분주히 돌아다녔다.

나 또한 회의의 당사자, 카시안과 프린지 사이에서 손을 맞잡으며 화목한 장면을 연출해 주었다.

“기념 촬영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참석자분들은 대연회장으로 이동하시고, 기자분들은 내성 안뜰의 정원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회의 참석자들은 진행자의 안내를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오늘은 가볍게 서로의 친목을 다지고, 본격적인 회의는 내일부터 당사자들끼리 비공개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슬쩍 빠져나와 깨비를 찾았다.

나의 오른팔.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진 뿔족의 대표는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아마 저 녀석이 바라보는 내 얼굴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

우우웅, 나는 주위로 기막을 펼치고 깨비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거. 맞아?”

“예? 예, 그렇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저렇게 대놓고 무시하고 있는데.”

나는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마족들을 가리켰다.

프린지를 뒤따라 들어가는 고위 마족급의 부관들.

그들은 판게아의 인간들이 잘 모르는 마족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마족들은 아주 잘 알아듣는다는 게 문제지만.

“광대놀이가 따로 없군.”

“노예들이랑 섞여서 이런 시시껄렁한 짓이나 하고 있으니. 원.”

“빨리 끝내고 숙소로 들어가는 게 현명하겠어.”

저렇게 대놓고 비마족들을 조롱하고 있다.

따지자면 저건 조롱이라고 말하기도 모호하다. 비마족들이 듣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물론, 마족 중에도 제정신이 박힌 놈이 있었다.

“조용히 하지 못하겠나. 이건 모두 발라크 님의 뜻이다.”

프린지.

그나마 마족의 대표만이 유일하게 대종족 의회의 눈치를 봤다.

다만 프린지는 비마족들이 아닌, 그저 나를 신경 쓰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도 난동을 피우지 못하게 통제만 하고 있지. 부하들의 무례한 언행에는 큰 신경을 쏟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었어?”

내가 재차 물어보니 깨비는 그제야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면목이 없습니다. 사실 본성으로 귀환하며 저런 말들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알아, 딱 봐도 그래 보이는걸. 근데 왜 말하려고 하지 않은 거야?”

“바쁜 시기라 신경을 쓰지 않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깨비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루카스, 아누스, 깨비, 에버딘. 나는 프린지와 마족들의 안내역으로 그 넷을 보냈다.

내가 지시한 일은 아니었다. 나중에 합류한 둘을 제외하고, 루카스와 아누스는 본인들이 자처해서 마족들의 안내역을 맡았다.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마족들과 만나고 싶다는 의견이었지.’

사실만 놓고 보자면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린지는 종족 대표들을 정중하게 대했고, 그의 부관들도 딱히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저 무시와 냉대는 몸에 밴 습관과도 같은 거니까.

‘내가 나선다면 해결이야 쉽겠지만.’

나는 저번에 비마족을 막 대하는 프린지에게 교육을 해 주었다.

하지만 그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마음마저 바꿔 놓을 수 있을까?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은 비마족들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 주는 방법밖에는 없다.

내가 그 사실을 깨비에게 말해 주려던 순간.

“주군,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기회라니. 무슨 기회?”

설마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 건가.

고개를 슬며시 든 깨비의 눈에서는 싸움을 열망하는 불꽃이 타올랐다.

“주군께서는 마족들에게 주눅 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상황을 분별하지 않고 무작정 싸우란 말은 아니었어.”

“아뇨, 다짜고짜 싸우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영리하게 싸우고 싶습니다.”

깨비는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마족의 등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저에게 대종족 의회의 위상을 세울 기회를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판을 깔아 달라.

나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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