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52화>
152. 전쟁을 준비하라! (1)
4일 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불그스름한 빛.
마계는 대낮에도 늦은 오후처럼 항상 노을이 져 있다.
때문에 판게아와는 달리, 자고 일어나면 시간 감각이 조금 복잡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으으으.”
침대에서 일어나며 관절을 쭉쭉 늘려보았다.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한동안 밖에서 자는 일이 많다 보니 푹신한 침대가 오히려 낯설어졌다.
“스칼렛. 단주님.”
같은 집을 쓰고 있는 두 사람.
그들을 부르며 방에서 나오는데 대답이 없었다.
우리는 카시안이 내어 준 외성 거주지의 한 저택에서 지냈다.
웬만하면 집에 붙어 있더니, 웬일로 오늘은 둘 다 밖으로 나갔네.
“하긴 애도 아니고. 일단 밥이나 먹어야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열쇠로 저택의 문을 잠그고 나오니,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세력 지도자들의 협상은 어제부로 완전히 끝났다.
발라크와의 불가침.
대종족 의회와 완전한 동맹 관계 구축.
각 세력끼리의 공조와 협력 재확인.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닌 일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뭐든 정해 놓아야 나중에 뒤탈이 없는 법.
거기에 더해서, 나도 카시안의 도움을 받아 드워프들과 여러 기술 협약을 맺을 수 있었다.
‘맡겨 두었던 무명을 되찾으면,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네.’
저번 바신과의 전투로 무명에 무리가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신기하게도 무명의 내구도는 자연스럽게 회복되었지만, 더 무리했다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게임에서야 시타델 왕실의 보고에서만 존재하던 무기이니.
‘제대로 조사해 볼 가치는 있지.’
“여어, 어딜 그렇게 가나?”
나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핑거톤의 탐정단 단장. 프레스턴가 씨익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설마 또 깽판이나 치려고 가는 건 아니겠지?”
“다 아는 사람이 왜 그러세요. 결국, 제 방법이 잘 먹혔잖습니까.”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으니까. 자네와 공작이 싸우면 병사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나.”
뭐긴 뭐야. 위쪽도 역시 개판이라고 받아들이겠지.
자신들을 이끌고 나아가야 할 지휘관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운다?
그런 사람의 부하들은 소위 ‘현자의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역효과가 나지 않도록 공작 전하를 고른 겁니다.”
“호오. 무슨 이유에서지?”
나는 식당 쪽으로 걷기 시작했고.
프레스턴은 옆에 따라붙으며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글픈 말이지만. 공작 전하와 저는 대동맹 내에 따로 세력을 소유하고 있진 않죠.”
“믿고 따르는 부하가 없다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공작 전하께서는 이번에 명예 훈장도 받으셨잖아요? 대동맹을 위해 한마디 할 권리는 있죠.”
“그래도, 위험하기는 했네. 자칫 대동맹에 더 큰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었어.”
프레스턴의 말은 정론이었다.
그렇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 작전은 무모했으나 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무엇보다 병사들의 사기 저하를 우려해서 카시안에게 마지막에 연설을 부탁하기도 했으니까.
“근데, 저 지금 밥 먹으러 가는 겁니다. 왜 따라오세요?”
“아니, 자네는 총사령관이 전담 요리사 같은 거 안 붙여줬나?”
“거절했습니다. 어차피 오랫동안 머물 것도 아닌데요. 뭘.”
“그러면 나도 오늘은 식당에서 해결하겠군.”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프레스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걸었다.
그렇게 둘이서 식당으로 향하던 중. 문득 판게아 대동맹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이 떠올랐다.
“아,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아니, 둘이네요.”
“말하게.”
“그 커다란 폭격기랑 인류의 철퇴인가 뭔가 하는. 그 둘은 어째서 이번 분쟁에 사용하지 않은 겁니까?”
대동맹이 보유한 대표적인 대량 살상용 무기.
그것들만 적절히 사용했어도 이번 분쟁에서 많은 사상자를 줄였을 터.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두 무기가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인류의 철퇴는 재고량이 많지 않네. 많이 만들기도 힘들고. 상부에서는 방어선이 뚫렸을 때 사용할 계획이었다더군.”
“뭐, 결국에는 잘 막아 냈고요.”
“그래, 그게 문제지. 큰일이 일어나야만 사용할 수 있는 무기라는 게 참 안타깝다네.”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리고 슈퍼포트리스는 엄밀히 따지자면 무역 연합의 무기라네. 이번 전투에 제한적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프레스턴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다만 아직 개량이 더 필요해. 날개를 가진 마족들의 공격에 취약하더군.”
“보강이 더 필요하긴 하겠네요.”
“그렇긴 하겠지. 근데 그런 걸 왜 물어보나?”
“흠흠. 저희 대종족 의회에는 광산도 여러 개가 있고. 생산 거점도 만들고 있거든요.”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겠군.”
대종족 의회는 아무런 발판도 없이 만들어지고 생존해 왔다.
여태까지야 내 개인적인 힘으로 버텨왔지만, 푸르카스와 전쟁을 하면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프레스턴은 내 말을 잘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슈퍼포트리스의 생산 공장을 만드는 건 힘들 걸세.”
“그럼, 무역 연합의 군대 일부를 우리 쪽에 주둔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저희가 무기도 좀 사겠습니다.”
“흠, 그건 내 선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네. 무엇보다 공짜로는 안 되고.”
당연히 공짜로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지.
카시안이 약속한 지원은 드워프들의 기술에 한해서다.
애당초 현재의 대종족 의회는 무역 연합의 기술을 습득할 최소 조건도 달성하지 못했으니까.
‘드워프들의 야금술과 제련술부터 차근차근 배워 나가야지.’
기술의 기반을 닦아야 그다음이 있는 법.
무엇보다 무역 연합이라면 내 능력으로도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피며 조건을 내걸었다.
“저희 영지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광물을 연합군에게 드리겠습니다. 현지에서 조달하는 게 비용은 더 저렴할 테니까요.”
“그런 조건이라면 내가 판게아에 잘 말해 보겠네.”
“분명 좋은 거래가 될 겁니다.”
단기간에 폭격기 같은 정밀한 무기를 운용하고 제조할 방법은 없다.
특히 기계 공학이나 마공학에 전혀 지식이 없는 대종족 의회라면 더더욱.
굳이 무리해서 고급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우선은 빌려 쓰는 게 좋으리라.
‘무기든 뭐든. 일단은 사서 쓰다가 자연스럽게 기술도 받고 하는 거지.’
이참에 스칼렛에게도 편지 한 통 써달라고 부탁해야지.
최근에 록펠스 그룹은 무역 연합의 일인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 안되면 개인적으로 록펠스와 계약하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려나.’
푸르카스는 수비자의 입장.
수비를 위한 공격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한동안 각 세력의 국경은 조용할 터.
시간이 허락한 선에서 최대한 준비를 끝내 놓아야 할 것이다.
* * *
이튿날.
나는 인페르노 본성에 있는 대장간을 찾았다.
이 지역의 뜨거운 용암을 이용하도록 제작된 용광로.
그런 탓에 대장간은 사시사철 피부가 익을 정도로 후끈한 열기를 내뿜었다.
땡! 땡!
대장간의 커다란 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자.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는 근육질 난쟁이들이 열심히 물품을 옮기는 중이었다.
“어이, 형씨. 지금은 바쁘니 수리를 맡기려거든 나중에……. 응?”
숙취 때문인지 코가 빨개진 드워프가 나를 막아서려다가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화들짝 놀라며 가까이 다가왔다.
오랜 노동으로 굳은살이 뒤덮은 손바닥. 드워프는 나에게 크고 딱딱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이야, 누구인가 했더니, 며칠 전에 광장에서 칼춤을 춘 그 사람이구먼! 루카라고 들었는데 맞소?”
“예, 맞습니다. 고드릭 장군님을 찾아왔습니다.”
나는 우선 드워프의 손을 맞잡았다.
이 사람들은 한자 동맹의 험준한 산맥 안에서 살아온지라 성격이 하나 같이 거칠다.
쉽게 말하면 싸가지가 없다.
뭐, 그 대신에 가식이 없다는 건 장점이지.
“아아, 그러셨군. 내가 안내해 주겠소. 그보다 총사령관 주제 회의에서 깽판을 치다니. 담이 엄청 큰가 보오?”
드워프는 흑맥주를 마시며 재밌게 구경했다며 그때의 일을 말했다.
그의 말대로 회의를 박살 낸 이후로 나는 엄청나게 유명해졌다.
과거에는 각 세력의 지도자들에게나 유명했지만, 지금은 일반 병사들도 내 얼굴과 이름을 기억할 정도니.
‘옛날에는 귀찮아서 뒤에 숨었지.’
이전에는 빨리 마족들을 몰아내고 게임을 끝내야겠다고만 생각했다.
굳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는 싫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무조건 나의 편을 만들어야 한다.
언젠가 초월자들이 근원과 신도들의 힘으로 나를 압박할지도 모르니, 나도 그에 대항하는 세력을 기를 필요가 있었다.
“참, 장군님에게는 뭐라고 소개해야 하오?”
“대종족 의회의 의장이라고 말하면 알 겁니다.”
“이야! 그 젊은 나이에 한 세력의 수장이라니 정말 부럽구만. 하하하!”
드워프는 살갑게 말을 걸며 대장간 내부로 안내해 주었다.
여러 대장장이가 나를 알아보며 말을 걸었고, 나는 그때마다 인사를 건네며 그들과 친목을 다졌다.
이 사람들이 전부 우리 영지로 올지도 모를 기술자인데, 어떻게 막 대할 수 있겠는가.
“장군님! 대종족 의회의 대표께서 오셨소이다!”
대장간의 깊숙한 곳에 도착한 뒤.
드워프는 함성에 가까운 소리를 냈고, 얼마 있지 않아서 익숙한 얼굴의 드워프가 나왔다.
깐깐하고 다혈질적인 얼굴에 무릎까지 자란 풍성한 수염.
고드릭. 그는 하이킹 드로그만의 친척이자, 저번에 본성에 도착했을 때 연방의 장교와 싸우고 있던 난쟁이였다.
“시끄럽다 이 녀석아. 아! 루카, 자네로군! 안으로 들어오게. 혹시 차 같은 거 좋아하나?”
“아뇨, 차는 그다지 몸에 받지 않아서요. 혹시 흑맥주는 없습니까?”
나는 일부러 예의에 맡지 않게 차를 싫어한다고 답했다.
게임에서 나오는 드워프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렇게 답하는 게 맞거든.
역시나 고드릭은 흥미가 생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뭘, 아는 젊은이군! 마침 잘 숙성된 놈이 있네. 오늘은 그놈의 뚜껑을 따야겠군.”
“좋죠.”
쾌활하고 숨기는 것 없고.
드워프들은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항상 화염 옆에서 일하다 보니 성격도 불같은 걸지도.
고드릭은 커다란 통에서 맥주를 따라 나에게 건넸다.
“자, 쭉 들이키세나.”
“대종족 의회와 무쇠 뿔 산맥의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하하하! 그거참 좋은 말이군. 위하여!”
크으.
커다란 잔에 담긴 맥주를 비운 고드릭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수염을 닦았다.
“역시 맥주는 아침에 마시는 게 최고란 말이야. 아, 우선 검부터 돌려줘야지.”
“뭔가 성과가 있었습니까?”
“음, 그게 말이지.”
고드릭은 곤란한 얼굴로 뒤쪽 상자에서 무명을 가져왔다.
3일 전, 나는 본성의 회의에서 고드릭에게 무명을 맡기며 조사를 의뢰했었다.
검귀의 기억에도 제대로 된 설명이 없는 검.
무명은 모든 부분이 의문에 싸인 무기였다.
‘뭐, 그리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고드릭에게서 무명을 건네받으며 답을 기다렸다.
다혈질적인 평소의 성격과는 다르게, 그는 한참이나 고민하고서 답을 내놓았다.
“우선, 많은 정보를 알아내지는 못했다네.”
“그렇군요.”
“하지만 이 검은 금속으로 만든 게 아니야. 그건 확신할 수 있겠더군.”
“금속이, 아니라고요?”
“그렇다네. 다른 동료 장인들과도 의견을 나누며 낸 결론일세.”
금속이 아니라니?
철 같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아예 금속이 아니라는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고드릭이 괜한 말을 할 가능성도 그리 크지는 않았다.
‘고드릭은 전사이기 이전에 존경받는 대장장이니까.’
그런 사람이 저렇게 확신하는 걸 보면 뭐가 더 있는 거겠지.
스릉, 나는 검집에서 무명을 꺼내며 검을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암만 보아도 금속으로 보이는데. 나의 반응을 본 고드릭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지금은 금속이 아니라는 말이네. 금속이었지만 금속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렇다는 말은 연금술이나 다른 무언가로 변화를 일으켰다는 말입니까?”
내 추측에 고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정한 마법 같은 게 내장된 무구. 저 흑도도 일종의 마법 무구라네.”
“거기까지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럼, 어떤 방법으로 만들어졌는지도 아나?”
고드릭은 무명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마치 대단한 보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탐욕마저 일렁거리는 눈빛으로.
“지금은 사라진 방법이라고 들었지만. 주술을 이용해도 마법 부여를 할 수 있다고 하더군.”
“주술이라면…….”
“일단 아는 대로 설명해 주겠네.”
고드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정보를 풀어냈다.
결사단은 주술에 능통하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대로 무명을 만든 주체는 결사단일 터.
나는 드워프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이야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