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51화>
151. 고통과 영광 (5)
핑거톤 탐정단의 단장.
프레스턴은 불편한 얼굴로 회의장에 앉아 있었다.
듣기로는 루카가 나서서 휴전 협정을 맺었다던데, 프레스턴은 신출귀몰한 그의 행동력에 순수히 감탄했다.
‘하여간 언제나 휙휙 날아다니는 녀석이야. 그건 그렇고.’
회의장의 분위기.
각 세력의 간부들이 모인 이곳의 공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혹독하다는 니플헤임의 냉기도 이것보다는 따스하지 않을까.
프레스턴은 이 어색하고 어수선한 공간에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단장님, 명예 핑거톤과는 대화하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프레스턴의 뒤에 앉아 있던 바티스타.
그는 두꺼운 손가락으로 회의장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상당히 화가 난 표정의 갈색 머리 청년이 있었다.
루카.
평소에는 싱글벙글 잘만 웃는 녀석이 왜 저러고 있는 거지.
프레스턴은 부하의 의견대로 슬쩍 말을 걸어보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됐어. 표정만 봐서는 사람 하나 잡아먹을 모양새인데.”
심지어 문제는 루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었다.
회의장의 반대편. 시타델의 권력자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루카의 눈빛이 꽂혀 있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여왕의 뒷자리인 로빈 공작.
그는 이번에 여러 세력의 요새를 구하고 다니면서 많은 존경을 받는 중이었다.
‘둘이 사이가 안 좋아질 일이 있나?’
로빈이 루카에게 원한을 가질 일은 많을지도.
프레스턴은 과거를 회상하며 몇 가지 일을 기억해 냈다.
단델리온을 처단했을 때, 평의회 연방을 부에르로부터 구했을 때.
단번에 여러 개가 튀어나오니 프레스턴 본인도 민망해질 정도였다.
“총사령관님 들어오십니다!”
어수선할 분위기를 휘어잡아 줄 존재.
프레스턴은 카시안의 등장에 귀를 기울였다.
대화 소리로 부산스러웠던 회의장이 순식간에 도서관처럼 엄숙해졌다.
절그럭, 절그럭.
휘황찬란한 금빛 갑옷을 입은 카시안이 회의장의 중앙으로 나왔다.
그는 가볍게 회의장을 빙 둘러보더니, 선뜻 허리를 숙이며 회의장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 후방에서 지원하지 못했던 걸 사과하는 거로군.’
신성 제국의 황제가 인간이 허리를 숙인다?
프레스턴은 살면서 그것과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프레스턴은 어느 정도 이해했다. 적의 악마급 전력이 나오기 전에는 부대를 움직이기 힘들었겠지.
“모두 부덕한 총사령관의 명령에 응해 주어서 정말 고맙소. 이번에 일어난 비극은 모두 나의 잘못이오.”
크흠. 흠.
회의장의 이곳저곳에서 연달아 헛기침이 터졌다.
누군가는 불쾌감을, 어떤 이는 단순히 놀라워서. 또 다른 자는 감격을.
여러 세력의 책임자들이 모였기에 반응도 천차만별이었다.
“이 일로 책임을 지고 총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지만. 우선 급한 사안에 대해 의논할 필요가 있소. 그보다 먼저.”
카시안이 손바닥을 펼쳐 어딘가를 가리켰다.
모두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움직였고, 시타델의 권력자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로빈 공작. 3개의 요새를 돌아다니며 마족을 처치한 그의 일화는 제법 유명했다.
“이번 전쟁의 영웅. 로빈 공작은 앞으로 나와 주시오.”
총사령관의 손에 들린 황금색 상자.
프레스턴은 그 안에든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뭐든지 공로를 세운 사람은 마땅한 보상을 받아야 하는 법.
여러 부상과 함께 수여되는 훈장은 그런 의미에서 제일 무난한 보상이었다.
“그대의 공로가 대동맹 내의 귀감이 되었소. 부디 사양하지 말고 받아 주시오.”
총사령관의 말에 항의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다른 세력의 사람들을 구해 준 거니 당연한 일이지.
대부분 훈장을 수여하는 데에는 긍정적인 편이었다.
그렇지만 상자 안에서 튀어나온 훈장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대동맹 명예 훈장.
대동맹이 결성되던 당시.
단 3명에게만 주기로 약속되었던 훈장의 하나가 로빈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조건을 세밀하게 달지는 않았지만, 다들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 수여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저 훈장은 전쟁이 끝날 때 주는 거 아니었나?”
“무슨 의도로 저러는 건지 모르겠군.”
“저럴 필요까지야 있나? 금성 무공 훈장도 있는데.”
다들 무공 훈장의 최고 격인 ‘금성’ 훈장으로 마무리될 줄 알았건만.
난데없는 명예 훈장의 출현에 회의장의 지방 방송이 제법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서 이런 의견도 튀어나왔다.
“과하긴 해도 영웅 훈장은 아니니까.”
“뭐, 대부분 자기 살자고 요새에 틀어박혀 있긴 했었잖아.”
“지금의 분위기를 다독이려면 저런 파격적인 행동도 필요하지.”
단 한 사람에게 수여된다는 대동맹 영웅 훈장.
최고 훈장이 나오진 않았으니 괜찮다거나. 저 정도는 받을 만하지 않냐는 말도 많았다.
물론, 조금 급하게 수여되는 감이 있다는 건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저걸로 이 균열을 막겠다는 건가.’
대동맹에 생긴 실금.
물론, 몸을 사리며 다른 집단의 희생을 강요하는 상황은 프레스턴도 불만이 많았다.
다만 저런 메달 하나로 대동맹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힘들 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시안은 주변의 말들을 무시하며 찬사를 쏟아 냈다.
그리고 로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로빈 공작께서도 할 말이 있다면 하셔도 좋소.”
“흠흠,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한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로빈 공작은 상기된 얼굴로 한 발짝 걸어 나왔다.
적당히 덕담이나 던지면서 잘해 보자고 말하겠지.
프레스턴이나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튀어나올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순간.
로빈 공작은 회의장의 누군가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은 중차대한 시기입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도 시원치 않은데. 개인적인 행동으로 동맹에 누를 끼친다면 더더욱 안 되겠지요!”
개인적인 행동.
잔뜩 날이 선 로빈의 발언은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겨냥했다.
프레스턴은 회의장 구석진 곳에 있는 루카를 보았다.
“자, 잠시만. 단장님. 지금 이건?”
“조용히 하게. 일단은 지켜보자고.”
바티스타를 침묵시킨 프레스턴은 귀를 활짝 열었다.
아니, 훈장 수취자가 누군가를 도발하는 일이 있었나?
긴장을 풀고 있던 회의장의 사람들이 일제히 신경을 곤두세웠다.
“혼란한 틈을 타. 개인의 세력을 일구고 심지어 대동맹의 부름조차 거역한 인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파렴치한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로빈의 표현은 수위가 제법 높았다.
욕은 섞이지 않았지만, 공식 석상에서 특정 인물을 지목하며 말하기에는 선을 넘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저격당한 자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마치 누가 들으라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로빈 공작 전하.”
루카.
그가 정적을 깨고 나서자, 카시안이 올려놓았던 회의장의 온기가 확 내려갔다.
비아냥거리는 말투.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른 얼굴.
척 보아도 검을 뽑고 달려들 기세의 루카가 회의장 중앙으로 나왔다.
“맞네. 그대의 대종족 의회인지 뭐인지는 대동맹의 편이 맞나? 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하! 차원의 틈에 끼여서 죽어 가던 주제에. 보고에서 나올 때 혀는 잘라서 데리고 나올 걸 그랬군요.”
“무엄하다! 네놈의 그 패악질을 더 이상 묵과할 수가 없다! 대동맹의 등에 업혀 무엇을 하려는 게냐!”
뭔지 모르겠지만 말려야겠는데.
주변에서 그런 내용의 말이 오갔다.
로빈은 계속 루카를 향해 음모론을 떠들어댔고, 루카는 그럴 때마다 더욱 살기 어린 눈빛으로 상대를 보았다.
‘뭔가 이상하군.’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 프레스턴은 자신의 육감에 집중했다.
둘의 사이는 상당히 막역하다고 소문이 났다.
게다가 카시안은 말로만 둘을 뜯어말렸으며, 루카와 같이 왔던 스칼렛은 회의장에 보이지도 않았으니.
이거 뭔가 계략이 꾸며져 있는…….
쾅!
프레스턴이 하나씩 진실을 파악해 나가던 무렵.
갑자기 회의장 중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마나가 증폭되는 것이 느껴졌으니 분명 마법사의 소행일 터.
다급히 고개를 돌린 프레스턴의 눈에는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는 루카가 보였다.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죠?”
루카의 흑도가 뽑혀 나왔고.
그 직후에 회의장의 벽에 무수히 많은 검강이 새겨졌다.
* * *
콰르르르.
무너지는 회의장의 벽 사이로 두 신형이 튀어나왔다.
나와 로빈 공작. 우리 둘은 공격을 주고받으며 많은 사람이 모인 외성 광장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 자네, 일부러 피하지 않은 것 같은데. 괜찮은가?
로빈의 사념이 머릿속을 울렸다.
괜찮을 리가 있나. 마음껏 마법을 난사해 주신 덕분에 몸은 만신창이였다.
나는 굳이 답하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
“대종족 의회는 마족들 밑에서 신음하던 자들입니다! 그자들을 품는 게 어찌 잘못된 일입니까?”
“그 자체는 잘못이 없지! 하지만 대동맹이 위태로울 때, 네놈은 무엇을 했느냐?”
“대종족 의회와 함께 마족들을 죽였습니다! 눈앞에 안 보였다고 여태 놀고만 있었는 줄 아십니까!”
극한의 티키타카.
나와 로빈은 마나와 오러로 목소리를 높여가며 떠들어댔다.
간혹가다가 할 말을 잃으면 상대에게 덤벼들어 시간을 끌기도 하면서 말이다.
쾅! 콰앙! 쾅!
높은 수준의 화염 마법이 내 발밑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그때마다 로빈의 대사를 같이 고민해 주며 공격을 피해 냈다.
- 이제 뭐라고 말하지? 자네가 벌인 판이니 머리 좀 짜 보게!
- 잠시만요. 저에게도 시간을 주셔야 생각을 하죠! 아, 이렇게 말하는 게 어떨까요?
그렇다.
우리는 지금 쇼를 벌이고 있다.
그것도 대동맹의 수많은 병사와 지휘관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로빈은 공격을 멈추고, 내가 일러준 대로 대사를 치며 슬그머니 광장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이 뭔가? 마족을 처단하고 판게아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닌가!”
“그래서 뭐가 어쨌습니까? 인간 이외에는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우리끼리도 벅차네! 우리는 많은 피를 흘렸고, 또 흘리게 될 걸세. 더는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을 끌어들일 수 없네!”
“대종족 의회는 그 피를 같이 흘려 줄 동맹입니다. 절대 못 믿을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은근슬쩍 대종족 의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에 로빈은 판게아 대동맹 내부의 협력 강화가 필요하다며 성토했다.
이게 바로 꿩 먹고 알 먹는 거지.
‘좋아, 근처에 사람이 많이 모였어.’
대종족 의회. 발라크와의 동맹. 나에 대한 루머.
판게아 대동맹에는 나를 둘러싼 갖가지 안 좋은 소문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하나, 내가 대종족 의회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그 논란을 다 털어내야지.’
제일 재밌는 건 싸움 구경이라고 하던가.
우리가 현란하게 합을 주고받으며 싸우자, 우리를 포위하듯 많은 인원이 몰렸다.
그들은 결투에 몰입한 채로 우리의 의견을 들었다.
“대종족 의회라는 게. 마족들의 밑에서 고생하던 비마족 마계인이지?”
“이제 막 세력의 틀을 잡았다던데. 우리와 같이 싸워 줄 모양이야.”
“하지만 저기 대마법사님은 반대하잖아. 애당초 우리끼리도 합심이 안 되는데.”
“그거야, 다들 몸을 사리면서 도와주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렇지.”
병사들은 우리가 떠드는 대화를 토대로 이야기를 나눴다.
갑론을박을 이어가며 누구의 말이 옳은지 판가름하려는 듯 보였다.
‘그래, 열심히 생각해라. 어차피 우리가 살아나갈 길은 하나니까.’
우리는 그저 주장할 뿐이다.
어떻게 마계에서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갈지, 병사들과 지휘관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귀에 쏙쏙 들어가도록.
“게다가 네놈은 발라크라는 대악마와 손을 잡았다! 그게 정녕 대동맹을 위한 일이냐!”
오오오.
가장 민감한 부분. 대악마와의 동맹 썰이 로빈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자 관중석에서 나에게 따끔한 눈총이 쏟아졌다.
“공작 전하는 푸르카스를 앞에 두고. 다른 마족과도 전쟁을 벌여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흐으음.
내 말에 관중 일동이 숙연해졌다.
마족은 모두 잡아 죽여도 시원치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러는 건 불가능하다.
마족들과 싸워 본 병사들과 지휘관은 모두 내 말을 쉽게 넘기지 못했다.
- 이제 됐어요.
- 정말인가? 조금 더 필요할 거 같은데.
- 너무 과하면 병사들도 연극인 걸 알아차릴지도 몰라요.
이건 오로지 병사들을 설득하기 위한 연극.
회의장 안의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연극으로 속아 넘어갈 양반들도 아니다.
적당히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때마침 우리가 관객을 모으는 동안, 기회를 엿보던 자가 도착하기도 했으니.
“그만! 둘 다 그만하시오!”
총사령관 카시안.
연설과 설득과 관련된 특성과 텔런트로 무장한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제 싸움을 끝낼 시간.
나와 로빈은 약속한 대로 서로를 흘겨보며 싸움을 멈췄다.
“아주 실망스럽소! 지금도 적들이 우리의 생명과 영토를 노리고 있는데, 우리끼리 싸우고 분란을 일으켜야 하겠소?”
카시안의 따끔한 외침을 시작으로.
우리가 불러모은 관객은 모두 총사령관의 연설을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