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49화 (149/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49화>

149. 고통과 영광 (3)

“아쿠!”

스칼렛이 지면에 코를 박으며 엎어졌다.

히힝, 그녀의 뒤에는 무언가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로시난테가 뒷발을 땅에 긁고 있었다.

“네가 고생이 많다.”

나는 로시난테의 매끈하고 하얀 목을 쓰다듬어 주었다.

성인 3명을 등에 태우고 여기까지 단숨에 달려왔으니 어련할까.

로시난테를 위로해 주고 시선을 한 바퀴 돌리니, 주위가 마족으로 우글거렸다.

“와우, 몇만은 가뿐히 넘겠네.”

좀비, 스켈레톤, 구울, 임프, 놀.

무슨 대마족 백과사전도 아니고. 단순히 사방을 살피기만 해도 수많은 종류의 마족들이 시야에 담겼다.

펠리스는 입맛을 다시며 사복검을 꺼내 들었다.

“휘두를 맛이 나겠구나.”

그 말과 동시에 사복검에서 튀어 나간 검붉은 기운이 마족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뭐, 내가 할 일을 대신 해 주면 나야 좋지.

나는 펠리스에게서 눈을 떼고 사방으로 검강을 날려댔다.

콰과과과!

워낙 밀집도가 높았던 탓에 수백의 마족이 단숨에 사라졌다.

주위를 깔끔하게 청소한 뒤, 나는 진흙을 털어내고 있던 스칼렛을 일으켜 세웠다.

“히잉, 로시난테는 내가 싫은가 봐.”

“그냥 네가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거지. 나랑 단주님은 안전하게 착지했잖아?”

“칫.”

볼을 잔뜩 부풀리는 스칼렛에게 각종 흑마법이 날아왔다.

아무래도 강대한 기운을 내뿜는 나를 대신해서, 아주 만만해 보이는 스칼렛을 겨냥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상급 마족 이하의 공격.

그것들은 스칼렛의 신체 근처에 작용하고 있는 힘을 꿰뚫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에너지 분해] [염동]

이 두 힘은 스칼렛은 완벽하게 보호해 주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공격을 막아 내는 능력.

한동안 느끼지 못한 거지만, 저 철통같은 방어 능력은 정말 개사기란 말이야.

“스칼렛, 너는 요새에 가서 사람들을 도와줘.”

“응, 그편이 더 도움이 되겠지? 그럼, 조금 이따가 봐!”

스칼렛은 천진난만하게 [공간 이동]을 펼쳐서 성벽 위로 올라갔다.

좋아, 이제 배치는 끝냈고. 나는 스칼렛을 일으키며 손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요새를 둘러싼 마족의 수는 최소 4만 이상.

이 모두를 쓰러트리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니.

“제일 간단한 방법은.”

지휘관을 노리는 거지.

나는 흑도를 몇 번 휘둘렀다.

그러자 천천히 진군하던 마족군의 한 귀퉁이가 쓸려나갔다.

계속 몰려드는 마족을 수숫단처럼 베어 넘기며, 비교적 강력한 마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빛기둥 속에서 말이랑 사람이 튀어나왔다고?”

전투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

마족의 지휘부는 이제야 우리와 관련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인기척을 지우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마족들은 죽어 가는 부하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휘웅.

산들을 쓸고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처럼.

몸을 날리며 흑도를 움직이자, 부대장으로 짐작되는 고위 마족의 머리가 육신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을 굴렀다.

[세계의 그림자]라는 특성. 생각보다 성능이 더 좋다.

‘고위 마족을 상대로 사용한 거라 정확한 측정은 불가능하지만.’

그야말로 그림자.

내 존재감이 자연에 녹아들어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바로 옆에서 상관의 목이 잘렸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마족들은 분주히 자기 일을 처리할 정도니까.

나는 무명으로 그들의 목숨을 거두고 지휘 본부를 빠져나왔다.

다음은 네크로맨서.

나는 [통달한 자]의 시선으로 스켈레톤과 이어진 줄을 따라갔다.

마족군의 병력 구성은 상당수가 언데드.

우선 지휘 계통을 먹통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저 해골들을 잠재우면 병력이 대폭 줄어들 것이다.

그림자 검술 5번, [암적뢰]

파직.

검붉은 전류가 튀자, 저 멀리 있던 네크로맨서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가볍게 상대를 세로로 양분한 다음, 다른 목표물을 찾아서 이동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 몇만에 달했던 병력의 절반이 우수수 허물어졌다.

“가, 갑자기 구울이랑 좀비들이 재가 되어 사라지다니? 무슨 일인지 알아보거라!”

“지휘 본부에서는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일단 퇴각하시죠!”

“몇 주가 넘도록 공격한 요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

쉬익.

나는 혼란에 빠진 마족군을 들쑤시며 일선 지휘관들의 목을 벴다.

그것도 잠시. 성벽으로 올라가던 하급 마족들도 상황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슬슬 물러나기 시작했다.

딱 봐도 등 뒤가 훤하니 생존 본능이 꿈틀거리겠지.

‘굳이 더 잡을 의미는 없고.’

지면을 발로 차며 날아올라 요새의 성벽 위로 갔다.

전장 한복판에 두었던 로시난테는 어느새 요새 안으로 들어와 숨어 있었다.

펠리스는 밖에서 여전히 칼춤을 췄고, 스칼렛은 병사들을 치유하며 전투 수습을 도왔다.

나는 인기척을 다시 내뿜으며 근처에 있던 마틸다에게 다가갔다.

“씨발, 진짜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다니까!”

갑자기 웬 사랑 고백.

마틸다는 나를 알아보더니 활짝 웃으며 달려들었다.

나는 몸을 살짝 돌려서 교황 후보의 출셋길을 지켜 주었다.

“아무리 반가워도 체면은 지켜야지.”

“아! 흠흠. 정리를 끝내고 갈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렇게 할게. 아무 방에나 들어가서 기다리면 되지?”

“예. 상황을 수습하고 찾아갈게요.”

마틸다는 엉겨 붙은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내뿜는 조엘의 한숨에 요새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솔직히 이 정도 업적이라면 교황 자리는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

‘뭐, 교단의 일은 내가 간섭할 입장이 안 되니까.’

몇 분 뒤.

마틸다는 아주 빠르게 전장을 정리하고 나를 찾아왔다.

얼굴은 피곤함에 찌들었고, 긴 시간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다크서클이 아래까지 내려왔다.

만약 요새 밖에서 봤다면 언데드로 착각했을지도.

“아, 뒤져. 다 뒈져 버려. 진짜 존나 피곤하네.”

풀썩.

마틸다는 의자에 몸을 떨어트리며 세상에 저주를 퍼트렸다.

성녀의 진짜 모습을 보니 리버티 교단의 장래가 참으로 밝았다.

“온갖 고난을 뚫고 교황 후보가 됐으면서 엄살이야.”

“그걸 말이라고 해? 진짜 뒤질 뻔했어. 다 끝장날 뻔했다고. 대동맹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안 해줘서 말이야.”

“그렇긴 하네. 여길 오면서 보니까 다른 요새 중에는 여력이 남아 있는 곳도 있던데.”

“상황이 어려우니까, 다들 본인이 살아남을 생각만 하는 거지.”

나는 조용히 마틸다의 푸념을 들어주었다.

최근 들어서 세력 간의 협동심이 무너졌고, 아무리 주변 요새에 도움을 요청해도 무시하는 경향이 커졌다.

리버티 교단은 대동맹 내에서 중간 규모의 세력.

악마급 전력도 없는데 여러 요새를 맡다 보니, 같은 세력 안에서도 지원을 주고받기 힘들었다.

“게다가 우리만 최전방이야. 그것도 방어선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에.”

“거부하지 그랬어?”

“다른 교황 후보를 지지하는 원로들이 찬성했어. 잘만하면 교황 후보에서 탈락시킬 기회잖아.”

“너희가 가장 위태로웠던 이유가 다 나왔네.”

“암튼 다 개새끼들이야. 게다가 진짜 문제는 성기사단 사람들이랑 사제들이지.”

“무슨 말이야?”

“에휴,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고 불만들이 많아.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마틸다는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우선 마틸다의 부대는 구해 냈으나 전투는 방어선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대로 요새를 하나씩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총체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산맥을 넘어서 마족의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 전쟁을 끝내야지.”

“근데 전쟁이 끝난다고 정말 끝은 아니잖아.”

“맞아, 휴전이지.”

“시발, 진짜 돌아가고 싶어지네. 죽으면 교황이고 뭐고 다 끝인데.”

“표정은 딱히 후회하는 느낌이 아닌데?”

마틸다의 얼굴은 오히려 담담했다.

여기 사람들을 두고 어디로 가.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이런 말을 흘렸다.

의외로 정이 많은 아이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창밖으로 보이는 산맥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차피 제대로 이야기를 하려면 전쟁을 끝내는 게 먼저니까. 빠르게 다녀올게.”

* * *

인페르노 영지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산맥.

나는 허공을 발로 차며 높이 솟아오른 산봉우리를 넘었다.

로시난테를 타고 왔다면 더욱 빨랐겠지만, 유사시에 몸을 빼기에는 혼자가 더 편하니.

‘여기는 마틸다가 지키던 요새에서 도망쳐 온 마족들이고.’

산속에서 숨을 고르며 쉬고 있던 마족들.

나는 그들을 무시한 채, [초감각]과 [통달한 자]가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대악마는 아니고, 무난한 악마 정도의 실력.

넓게 펼친 기감에 적의 지휘관으로 추측되는 자가 있었다.

“적을 두고 도망치다니! 네놈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쿠와아아!

한 악마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친 부하들을 참살했다.

불에 휩싸인 2개의 검. 클리프의 것처럼 육중한 대검 2개가 불길을 일으키며 마족들을 집어삼켰다.

“성격 참 지랄 맞네.”

나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악마의 앞에 섰다.

상대는 엄청난 괴력에 화염까지 다룬다는 ‘발록’ 종족.

머리 옆에 달린 2개의 뿔과 거대한 날개를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너는 누구냐!”

“목소리도 우렁차고. 성격도 그 모양인데 왜 전쟁에 직접 나서지 않았지?”

“크르르, 대답을 듣고 싶다면 먼저 정체부터 밝혀라.”

“루카.”

“뭔 들어본 적도 없는…….”

화를 내려던 상대의 동공이 팽창했다.

악마는 서둘러 양손에 들린 검에서 불꽃을 거둬들였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경계의 눈길을 보냈다.

호전적인 생김새와 다르게 의외로 분노 조절을 잘하는 편이네.

“열정의 악마로 불리는 살비스다. 네놈은 무슨 낯짝으로 이곳에 여기에 온 거냐.”

“휴전. 이런 식의 소모전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발라크, 대종족 의회, 판게아 대동맹.

이 3개의 세력을 응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푸르카스의 입장에서도 바신을 잃었으니 전력을 메꿀 여유가 필요하겠지.

“반응이 없네.”

긴장한 채로 나를 내려다보는 살비스.

당장이라도 푸르카스가 답을 내어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슬슬 실망감이 올라오던 순간.

- 나를 상대하기에는 그 부족함이 절절하게 느껴지더냐?

살비스의 머리에서부터 희미한 에너지 줄기가 튀어나왔다.

근원과 연결된 선,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잘라 버리고 싶지만.

‘어차피 수단이 있으니까 조급해할 필요는 없지.’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당장 너희 영지로 쳐들어가 줄까?”

- 허세 부리기는. 그 알량한 잔재주로 정녕 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니. 참으로 오…….

“됐고.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애당초 저렇게 말이 많다는 건 많이 쫄린다는 뜻.

나는 푸르카스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팔짱을 끼며 거들먹거렸다.

- 알아서 해라. 후회하지 않게 준비를 많이 해야 할 것이야.

“그쪽이나 나중에 질질 짜지 말라고. 네 비밀친구인 바신처럼 비명횡사하고 싶어?”

그렇게 형식적인 말다툼이 끝난 뒤.

빼앗겼던 몸을 되찾은 살비스는 주변에 명령을 내렸다.

완전한 퇴각 명령. 산맥 전체를 점령하고 있던 마족들이 짐을 싸고 후방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진즉에 퇴각하든가. 시간을 끌어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살비스가 이끄는 부대는 끽 해 봤자 2선급.

애당초 악마 본인의 실력도 이전에 만났던 라일라크와 비교하면 처참한 수준이다.

이런 상태로는 절대 대동맹의 방어선을 뚫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을 푸르카스가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문뜩 떠오른 의문을 곱씹으며 마틸다의 요새로 복귀했다.

여기저기 부서진 성벽.

시체를 정리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교단원들.

마틸다는 자신의 요새에 유독 공격이 집중되었다고 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큰 피해를 본 곳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다른 세력 중에도 유독 마족이 몰려든 곳이 있었다.

설마 배신자를 이용한 계략인가?

순간 그런 추측이 들었지만.

딱히 중요한 타이밍도 아닌데, 첩자가 발각될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이건 분명 배신과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배신자가 아니라면……. 이유는 하나지.”

나는 엉망이 된 요새에 가까이 다가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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