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46화>
146. 처단자 (5)
에레보스 영지 이곳저곳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대종족 의회의 정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비마족을 해방하겠다는 의회의 군대, 그 속에는 마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종족도 있었다.
“루카! 북쪽은 모두 정리했어.”
통신구를 통해 스칼렛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북쪽에서의 승전보, 며칠 전에 동부를 전부 집어삼킨 뒤에 군대는 4개로 쪼개졌다.
후방의 치안 관리를 맡은 펠리스, 남쪽으로는 클리프, 북쪽으로는 스칼렛.
마지막으로 중앙 진격로는 내가 맡았다.
“수고 많았어. 요새 점령은 후방 부대에게 맡기고 너는 주변 지역을 정리해 줘.”
“알겠어. 아! 다른 비마족들은 잘 모아서 후방으로 보낼게.”
“그래. 다들 힘들지 않게 잘 신경 써 주고.”
“응!”
툭.
통신이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북쪽도 끝. 남쪽으로 떠났던 클리프는 하루 전에 점령을 마쳤다고 소식을 보냈다.
“생각보다 전쟁이 순조롭네요.”
“뭐, 내가 고위 마족들은 대부분 죽여 놨으니까.”
물론, 그걸 고려해도 진격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군대를 준비하고 출정한 지 거의 2주. 우리는 에레보스의 거의 모든 지역을 손에 얻었다.
‘이런 속도면. 걸어서 쭉 직진한 수준이네.’
내가 박살 냈었던 본성도 이미 접수했으니.
이제 남은 지역은 서부가 전부. 사실 진격할 준비는 사흘 전부터 끝낸 상태였다.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서 급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뿐이다.
“에버딘. 부대 상태는 어때?”
“예, 준비는 끝났어요. 어젯밤에 푹 자고 잘 먹은 덕분에 다들 사기도 높아요.”
에레보스 서부의 첫 번째 요새.
나와 에버딘의 부대는 그 정면에 자리를 잡고 하룻밤을 지냈다.
항복하면 요새만 빼앗을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저들은 싸움을 각오한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백기가 안 올라왔으니. 좋아, 공격해.”
“이번에는 직접 나서지 않으시나요?”
“고위 마족은 없으니까. 이런 안정적인 상황은 앞으로 오지 않을지도 몰라. 지금 열심히 합을 맞춰 봐야지.”
“예, 그럼 저도 이만 가 볼게요.”
“무운을 빌게.”
거대한 늑대로 변신한 에버딘.
여러 종족으로 편성된 부대가 그녀의 명령을 기다렸다.
언제까지고 종족별로 부대를 가를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일부러 종족 대표들에게 군대를 맡기고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도 큰 반발은 없네. 다른 두 곳도 괜찮겠지?’
괜찮으니까 남부와 북부를 점령했겠지.
당연히 두 녀석에게도 종족 대표가 이끄는 붙여서 함께 보냈다.
클리프의 경우에는 판게아의 말을 배운 깨비가, 스칼렛은 정신을 파고들어 대화할 수 있기에 와제트족의 수장인 아누스를 붙였다.
“비행대 폭격이다! 모두 전투 준비!”
생각을 정리하던 사이.
에버딘의 외침과 함께, 우리 진영의 후방 상공에서 가람족 비행대가 날아왔다.
바람을 가르며 나타난 거대한 새들이 전투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폭격.
그 공포를 맛보았던 놈들이 있었는지.
눈앞의 요새에서 날개가 달린 마족들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물론, 폭격에 나서면서 호위도 없이 보냈을 리는 없다.
“저기 봐봐, 강습 부대다!”
“석궁으로 다 쏴 죽여 버려라!”
“저 덩치 좀 봐. 그냥 부딪치기만 해도 나가떨어지겠어.”
압도적인 신체 조건을 가진 가람족과 뿔족 전사들.
그들이 나서자 도열 된 부대의 전사들이 응원을 보냈다.
1차로 벌어진 하늘에서의 육박전은 얼핏 보아도 우리의 압승이었다.
“우와아아!”
하늘을 올려다본 부대원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강습 부대의 무용은 대종족 의회 내에서도 유명했다.
석궁으로 날개를 꿰뚫고, 가람족이 몸으로 들이받고, 창으로 마족을 찔러 버렸다.
하긴 저 높은 곳에서 싸워야 하니 어중간한 담력으로는 힘들겠지.
‘공중 병력이 전멸했으니 저쪽에서는 대응할 수단이 사라졌네.’
퍼퍼퍼펑!
강습 부대의 보호를 받은 1차 폭격대가 요새를 난타했다.
마족들은 여러 방법으로 요격을 시도했지만, 1km가 넘는 고도에 그런 게 닿겠는가.
순조롭게 2차 폭격도 끝이 나고 마지막으로 3차 폭격이 이뤄질 무렵.
슈와아아.
미라처럼 생긴 주술사들이 주문을 외우자 황금색 물결이 일어났다.
버프와 디버프에 특화된 주술.
와제트 족의 주술은 뿔족과 흑랑족으로 이루어진 선봉대를 휘감았다.
“아우우우!”
“가자!”
주술이 모두 걸린 뒤.
하나로 뭉쳐진 선봉대가 저마다의 의지를 다잡으며 돌격을 강행했다.
시기를 맞춰 가람족의 폭격이 마무리되었고, 뒤이어 아자크 족이 거대한 나무 투창을 들고 나타났다.
적들의 대비를 늦출 포격. 그들이 든 거대한 투창이 공중을 날아 성벽에 꽂혔다.
쾅! 콰직! 콰과곽!
요새의 벽 일부가 무너졌고.
그 안으로 흑랑족 기병대가 파고들었다.
몇몇은 갈고리를 던져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화살을 쏘며 성벽 위를 견제하기도 했다.
‘이제 다들 베테랑이 다 되었네.’
나는 선봉대의 뒤를 따르는 에버딘과 병사들을 보며 생각했다.
비마족들을 구원하겠다는 결의. 하나의 목표를 둔 각각의 종족이 서로를 보조하며 싸웠다.
물론, 앞으로의 전투에서 승패는 악마나 대악마의 결투로 결정 날 것이다.
“그렇다고 저들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
결국, 전쟁의 승리는 점령으로 완성된다.
아무리 많은 적을 죽이고 다녀도 군대가 깃발을 꽂지 않으면 모두 허사다.
그런 의미에서 계속 발전하고 있는 군대를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주군, 요새 점령을 끝냈어요.”
3시간쯤 뒤.
피가 잔뜩 묻은 에버딘이 수인의 형상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요새 하나가 수중에 떨어진 셈이다.
“수고 많았어. 병력 피해는?”
“성문이 열리자, 적들이 수성을 포기하고 도망쳐서 피해는 거의 없었어요. 이미 추격대도 출발시켰고요.”
“처음에는 죽을 때까지 싸울 것 같더니만……. 일단 오늘은 여기서 휴식하고 아침이 밝는 대로 떠나자.”
“예, 저는 후방 부대에 연락해 둘게요.”
오늘따라 지나치게 사무적이네.
깨비랑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서 그런가.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로시난테에 올라타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푸르릉, 나를 태운 백마는 부서진 정문을 통과하며 일부러 존재감을 마구 뿜어냈다.
‘또 또, 이런다. 얼굴값은 하겠다는 거냐?’
꼴에 대악마의 키메라여서 그런지. 일부러 말총도 살랑살랑 흔드는 게 요망하기 짝이 없었다.
“의장님이시다.”
“와, 의장님이야!”
“의장님! 잘 보셨습니까? 이제 저희도 스스로 요새를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푸릉!
찬사는 내가 받는데 왜 네가 자신감을 얻는 거냐.
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조용히 로시난테의 배를 찰싹찰싹 때렸다.
그렇게 요새의 반대편으로 나와 에레보스 서부의 풍경을 보았다.
“여기부터는 슬슬 날씨가 추워지긴 하네.”
니플헤임 영지의 영향을 짙게 받는 지역.
내가 서부로의 원정을 서두르지 않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영지의 서부는 스티지아와 니플헤임에 닿아 있으니까.
“너한테는 좀 익숙한 편인가?”
로시난테는 목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긍정을 표했다.
발라크는 여태까지 에레보스 영지로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만약 대종족 의회와 척을 지려 했다면, 진즉에 군대를 움직였을 터.
그렇다면 발라크의 결단은 뻔했다.
‘시간이 생겼을 때 한 번 더 움직임을 확인해 볼까.’
스티지아와 니플헤임.
눈을 감고 기감을 넓혀 서쪽 끝에 있을 두 경계에 감각을 집중시켰다.
어제만 해도 두 세력은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에레보스에서 도망친 마족들을 받아 주기만 할 뿐. 굉장히 수동적으로 움직였다.
‘응?’
갑자기 내 기감에 대규모 인원의 이동이 느껴졌다.
몇천을 넘어서 몇만. 그들은 스티지아 국경에서 이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다만 군대의 움직임과는 느낌이 달랐다. 구성원의 대부분은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 비마족이었으니.
‘굳이 여기에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지.’
나는 로시난테의 고삐를 쥐며 배를 찼다.
번쩍! 눈부신 섬광과 함께 나와 로시난테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스티지아와 에레보스의 경계.
거대하고 긴 숲으로 차단된 국경으로 많은 인원이 움직였다.
그 대열을 이끄는 프린지는 수갑과 족쇄에 묶인 채로 걸어 다니는 비마족을 보며 혀를 찼다.
“이놈들이 자유가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것도 우리 손으로 직접 자유를 주다니요.”
옆에 있던 부관도 고개를 저었다.
데모니움 본성에 가서 물건과 비마족을 전하는 게 이들의 임무였다.
아마 그전에 대종족 의회의 군대를 만나겠지만.
“한 일주일 정도 가면 에레보스 본성에 다다를 겁니다.”
부관의 말에 프린지가 무심히 동의했다.
“소문으로는 에레보스의 북부와 남부를 공격하고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예, 남부는 거의 점령이 끝났다니. 차라리 그쪽으로 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아니, 루카라는 자를 만나서 직접 전할 말이 있다. 우리는 그대로 에레보스 본성으로 간…….”
프린지는 말을 멈추고 동쪽의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강렬한 빛과 함께 질주하는 하얀 말. 그 위에 올라탄 존재가 내뿜는 거대한 기운에 화들짝 놀란 것이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보며 눈을 사납게 떴다.
‘저 새끼들이.’
두두두.
속도를 줄인 로시난테가 땅에 착지했다.
부드럽게 발을 구르며 멈춰 선 백마. 나는 그 위에서 내려 가장 강한 기운을 가진 악마에게 다가갔다.
“멈춰라!”
어느 용기 있는 마족이 앞길을 막아섰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붉은색 오러를 일으켰다.
투웅! 강기를 펼쳐 살짝 밀어 내자 마족의 몸이 저 멀리까지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상당히 강해 보이는 악마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대가 루카인가?”
“그래.”
“이게 무슨 짓인가! 우리는 그대에게 협조를 요청하러 가던 중이었다.”
“협조? 어이가 없네. 그쪽에서는 동맹 세력의 구성원들을 저렇게 대하나 봐?”
저벅.
나는 걸음을 앞으로 디디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수갑과 족쇄에 묶인 비마족.
내 손가락 끝을 좇은 상대는 변명하듯 손사래를 쳤다.
“이건 통제를 위한 일이었다.”
“꼴을 보니까, 설명도 안 해 주고 그냥 데려온 것 같은데?”
“……알겠다. 구속을 풀고 편히 걷게 시키겠다. 그보다 내 이름은 프린지고 새로운 스티지아 영지의 대악마다. 그러니 일단 진정…….”
“말이 짧아.”
“그게 무슨. 윽! 으으으.”
드드드드.
본인을 프린지라고 소개한 악마.
그의 주변 공간이 내가 펼친 마기에 의해 일그러지며 일대가 통째로 흔들렸다.
결국, 프린지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다시 말해 봐.”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했으니 부디 용서를.”
“정말로 본인이 대악마와 동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다, 다시는 주제넘게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후우우.
프린지를 압박하던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조금 과하더라도 기선 제압을 해 두는 편이 좋겠지.
나는 무심하게 그를 지나쳐 비마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들 기합이 필요해 보이네.’
절망감과 무기력감.
그리고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오러를 목청에 집중시키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 잘 들어라! 너희들은 이제 노예가 아니다! 자랑스러운 대종족 의회의 일원이다! 그러니 어디서든 주눅 들지 말아라!”
우선 여기까지만.
태어나면서 여태까지 노예로만 살아온 자들이다.
굳이 이 이상의 바람을 넣어 줄 필요는 없을 터.
데모니움으로 가서 동족들과 어울리다 보면 자연히 이 말의 뜻을 알아차릴 것이다.
내가 열정을 주입하는 동안, 마족들은 허겁지겁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저, 저기. 발라크 님께서 우애의 상징이라며 특별히 건네드리라 한 선물이 있습니다. 우선 이걸 보시고 마음을 푸시지요.”
프린지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제 예의라는 걸 좀 갖췄네.
딱 봐도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한 아첨이었지만, 원하는 걸 얻었으니 더 고압적으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
“마음에 안 들면?”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자신 있게 외친 프린지는 상당히 거대한 상자를 내밀었다.
외형은 꼭 보물 상자처럼 화려했고, 안에서는 농도가 짙은 마나가 흘러나왔다.
“잠시만, 이건.”
“열어 보시지요!”
끼릭.
자물쇠를 열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찬란한 빛이 주변을 밝혔다.
나는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정말로 마음이 녹아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거 드래곤 하트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