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45화 (145/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45화>

145. 처단자 (4)

일을 마무리한 뒤.

나는 재빨리 데모니움 본성으로 복귀했다.

수많은 일을 처리하고 복귀한 대종족 의회의 의장.

본성을 지키고 있던 수비 병력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를 반겼다.

“이상한 말을 타고 하늘에서 나타났다. 전원 포위하라!”

“누구냐? 어디서 온 마족이냐?”

“순순히 말에서 내리고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음, 환영 인사가 좀 괴팍하네.

하긴 갑자기 빛이 번쩍이며 서쪽에서 나타났으면 경계할 만하지.

오히려 나는 주위를 포위한 수비병들의 태도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진정해. 나야 나.”

“어? 루카 의장님!”

다행히도 고참으로 보이는 병사가 나를 알아보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하얀색 말은…….”

“원래 바신이 타고 다니던 키메라야. 지금은, 내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백마의 등에서 내려서 목을 쓰다듬자.

푸르릉. 하얀색 말은 콧소리를 내며 이빨을 보였다.

얼핏 보아도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애를 어디에 두지. 성에 마구간 같은 게 있어?”

“그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희가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나중에 총관에게 시키지 뭐.”

모든 일은 토끼녀에게로.

나는 수비병들과 잠깐 대화를 나누고 곧바로 내성으로 들어갔다.

바신의 키메라는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처음에는 푸르카스나 바신의 함정인 줄 알았지.’

아무리 살펴봐도 근원이나 흑마법의 영향은 없었다.

바신의 각인을 지워 준 은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토끼나 나무처럼 기본적인 양심도 없는 개노답은 아니네.

“엇! 여태까지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신 거예요?”

마침 개노답 자매의 첫째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토끼녀의 새하얀 손을 노려보며 말했다.

“알 필요 없고. 너는 일도 안 하면서 내성에서 돌아다니는 이유가 뭐야?”

“저만 보면 늘 같은 말이시네요. 저 진짜 힘들어요.”

“오, 다행이야. 제발 더 힘들게 살아 줘.”

“칫, 그런 소리는 이제 그만하시고. 어딜 다녀오신 건데요?”

“그건 차차 설명할게. 일단 다른 사람들을 좀 불러 줘.”

각 종족의 대표와 클리프, 스칼렛, 펠리스까지.

내가 대종족 의회의 모든 전력을 거론하자, 토끼녀가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아니, 그 사람들을 전부요?”

“이제 연극은 그만하려고. 바신과 말파스도 죽였겠다. 준비되는 대로 에레보스 영지를 칠 거야.”

“예에에?”

토끼는 두 손을 뺨에 갖다 댔다.

이건 뭐 대놓고 놀리는 건지. 되지도 않는 시치미를 떼고 앉았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뭘 아닌 척이야.”

“저, 요즘 정말로 바빠서 몰랐거든요! 그 나무 년도 없어서 얼마나 바빴는데요.”

“그럼, 다시 불러올까? 일이 힘들면 직위를 뒤바꿔 줄 수도 있는데.”

“지금 당장 소집령을 내리겠습니다!”

역시 내 입에서 세계수가 튀어나와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구먼.

나는 갑자기 눈빛이 맑아진 토끼녀를 보며 혀를 찼다.

“그보다 이 하얀 말은 뭐죠?”

“바신의 키메라. 걔를 죽이고 각인에서 해방되니까 나를 따라오더라고.”

“음, 그렇군요. 옳지, 옳지. 네 이름은 뭐니.”

푸르릉.

토끼녀가 가까이 가자 백마가 콧김을 내쉬었다.

무슨 대화를 하는 건가? 나는 잠자코 토끼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음, 이름은 로시난테고. 흐음, 앞으로 이 사람을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고 싶다고? 에이, 그러면 안 돼. 굳이 마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쫑알쫑알 시끄럽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는 하는 거야?”

“그럼요. 제가 이래 봬도 토끼라고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 날 따라온 이유도 한번 물어봐.”

두 짐승은 진지한 태도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뭔가 대단한 이유로 나를 따라온 건 아닌 것 같았는데 말이야.

몇 분간의 대화를 끝낸 토끼녀는 근엄한 표정으로 이유를 말해 주었다.

“밥을 잘 줄 것 같아서 왔다는데요? 딱 봐도 대악마 같은데 이왕이면 용 꼬리에 붙고 싶대요.”

“……굉장히 현실적인 이유기는 하네. 이제 됐으니까 가서 사람들 불러와.”

“넵.”

토끼녀가 자리를 떠난 뒤.

나는 로시난테를 끌고 내성의 중앙 정원으로 향했다.

비를 피할 천장도 있고, 환기도 잘되는 터라 임시로 머물기 좋았다.

“일단 거처가 정해질 때까지 여기에 있어라.”

히힝.

알겠다는 표현인지 로시난테는 긴 목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토끼녀가 부른 대종족 의회의 대표들이 하나씩 회의실로 찾아왔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오는 데 시간이 걸릴 터.

나는 본성 근처에 있던 에버딘과 깨비, 그리고 루카스가 도착하자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군, 갑자기 사라지셔서 다들 걱정이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깨비였다.

“맞아요. 인페르노 영지로 혼자 돌격하신 줄 알았어요.”

“저는 서류를 어지럽혀서 마음에 상처를 받으셨나…….”

에버딘도 진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걱정해 주었고, 루카스는 엄한 소리를 하다가 부리를 닫았다.

셋의 걱정은 전부 이해가 갔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그거랑 맞먹는 일이긴 해. 바신이랑 말파스를 죽였거든.”

쾅!

너무 놀란 나머지 깨비가 테이블을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셋의 얼굴은 모두 한결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니, 이렇게 놀랄 일이야?”

“당연하죠! 이제 대악마가 넷 밖에 안 남았는데. 그중 둘이 더 죽었다면.”

“엄청난 성과네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에버딘과 깨비는 번갈아 가며 말을 이었다.

루카스는? 얼굴과 몸이 완전히 굳은 채로 눈동자만 끔뻑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잘 감이 안 오는데.

나는 차분히 말을 골랐다.

“음, 일단 이 일은 인페르노의 분쟁과 관련이 있어. 푸르카스는 내가 정체를 드러내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을 거야.”

결과적으로, 푸르카스의 계획은 성공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겪은 손실은 보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푸르카스가 가진 가장 쓸모 있는 전력, 대악마 바신의 목숨을 너무나도 쉽게 내주었으니.

여기까지 들은 깨비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말파스를 죽인 이유입니까?”

“맞아. 이렇게 해야 발라크와 푸르카스의 전력이 비슷해지거든. 그렇게 되면 대악마급 실력자가 하나 더 있는 우리에게 주도권이 넘어오지.”

“그거야 주군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만. 과연 발라크가 이 일을 그냥 넘어갈지…….”

문제는 이거다.

같은 동맹인 말파스를 죽여 버린 것.

만약 발라크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겠는가.

그리 생각하는 셋에게 나는 미소를 흘리며 물었다.

“넘어가지 않으면. 그러면 어쩔 건데?”

“예?”

“어쩐다니요. 그야 당연히 동맹을 파기…….”

에버딘은 조심스럽게 답을 하려다가 말을 멈췄다.

동맹의 파기. 그리된다면 발라크에게는 우군이 사라진다.

모든 대악마가 사라진 상황에서 누구와 동맹을 맺을까?

“푸르카스와 힘을 합치지 않는다면 답은 정해져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우리의 일을 해야지.”

우리는 에레보스 동부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다.

이제는 동부 전체를 넘어서 그 이상을 넘볼 차례.

나는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에서 에레보스 영지의 본성을 가리켰다.

* * *

“그래서, 남은 자들은 이게 다인가?”

니플헤임의 넓은 얼음 동굴.

마계의 이인자. 발라크의 목소리가 냉랭한 공간을 울렸다.

“예, 반역자를 추종하던 세력은 저희 손으로 제거하였으니. 스티지아 영지는 모두 주군의 것입니다.”

스티지아 영지에서 찾아온 악마와 고위 마족.

그들의 가장 앞에 선 프린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수고 많았다. 앞으로 스티지아 영지의 관리는 너에게 맡기마.”

스르르.

발라크가 망토를 얼음에 끌며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프린지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그의 기운에 어깨를 떨며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반드시! 마음에 드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란다. 다음으로, 루카가 나에게 전한 말이 있다고 했는가?”

발라크의 가면이 프린지의 우측 뒤편으로 향했다.

에레보스에서 볼모로 잡혀있다가 풀려난 단결의 악마, 카시아가 부복하며 입을 열었다.

“예, 주군! 그 배은망덕한 자가 우군인 말파스 님을 참살하였습니다.”

“아니, 그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자가 전한 말이 무엇인가?”

“예? 아. 분명 균형을 위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균형이라.

발라크가 혼잣말을 하며 넓은 공동을 빙글빙글 돌았다.

얼음 동굴에는 스티지아의 마족들 말고도 니플헤임의 마족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발라크의 이상한 행동을 지적하지 못했다.

망토를 끌며 돌아다니던 대악마의 행동이 멈췄을 때.

“프린지는 들어라.”

발라크가 입을 열어 새로운 스티지아의 주인을 불렀다.

“예, 주군!”

“스티지아의 정리가 끝나는 대로 모든 비마족 노예를 이끌고 데모니움으로 가라.”

“주군, 그게 무슨…….”

“참! 이것도 잊을 뻔했군. 이른 시일 내에 스티지아로 물건들을 보낼 테니 그것도 함께 대종족 의회에 전하거라.”

의도를 알 수 없는 발라크의 지시.

정적에 가까웠던 얼음 동굴이 마족들의 대화 소리로 채워졌다.

스티지아의 마족들뿐만이 아니라, 니플헤임의 악마와 고위 마족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번영의 악마.

니플헤임의 악마인 오키라가 앞으로 나서며 무릎을 꿇었다.

발라크의 몸이 제자리에서 돌아가며 그녀와 마주 섰다.

섬뜩하리만치 냉엄한 시선에 그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하라.”

“주군이시여, 카시아가 말하길. 루카는 동맹을 죽인 것도 모자라, 자신의 정체도 숨겼습니다.”

루카는 인간이다.

충격적인 사실이었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단결의 악마의 말을 믿었다.

그가 인간이 아니고 푸르카스의 편이 아니라면, 동맹을 배신할 이유가 없으니까.

오히려 여태까지의 기이한 행동들이 하나둘 설명되는 셈이었다.

“주군이시여, 어찌 인간들과 동맹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오키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마족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말파스를 죽인 시점에서 이미 동맹은 깨진 거와 같지 않은가?

대놓고 발라크에게 맞서지는 못하더라도 오키라의 의견 자체는 찬성하는 눈치였다.

그녀가 불을 지핀 여론이 무럭무럭 자라나던 무렵.

“그렇다면 누구와 힘을 합쳐야 하는가?”

발라크의 물음이 그들의 대화를 멈췄다.

누군가는 푸르카스의 이름을 떠올렸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아무리 적의 적은 친우라지만.

애초에 이 오랜 분쟁의 시작은 푸르카스와 발라크의 사이에서 비롯되었다.

“푸르카스는 마신을 죽이고 그 힘을 훔쳤다. 이건 거스를 수 없는 싸움이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발라크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사실상 선전포고와도 같은 말.

마신의 힘과 관련된 내용은 아는 자보다 모르는 자가 많았지만, 그 누구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푸르카스의 바람은 마계의 통일이다. 그놈의 이름으로 하나가 된 마계에 우리가 설 자리가 있겠는가?”

발라크는 판게아와 연결되기 전부터 푸르카스와 대척점에 있었다.

원한의 역사를 따지자면, 판게아의 종족보다도 더 깊고 오래된 악연.

그 말을 이해한 마족들의 머리에는 이제 한 가지 의문만이 남았다.

루카의 학살을 직접 겪은 자, 카시아는 앞으로 나와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주군, 루카라는 자는 동맹의 한 축을 죽였습니다. 이미 동맹은 깨진 것이 아닙니까?”

“동맹은 깨지지 않았다. 그가 균형을 맞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균형이라 말씀하심은?”

“동맹의 주도권을 가져가겠다는 말이다. 루카, 그놈의 편에는 대악마에 필적하는 인간 마법사가 있으니까. 말파스의 일은 안타깝지만, 지금은 우리의 생존을 걱정할 때다.”

설득을 마친 발라크는 다시 그가 서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푸르카스가 인간들을 물리친다면 다음 목표는 발라크가 될 터.

인간들과 함께 승리한다고 해도 결판을 내야겠지만, 잘만 한다면 마계의 한 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확실히. 이번 부에르의 판게아 침략에 우리는 가담하지 않았으니. 인간들과 협상의 여지는 있을지도 모르겠군.”

“과거에는 마족이 마계를 평정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지. 일단 힘을 비축할 수만 있다면야.”

“역시 목표는 생존이야. 푸르카스가 이기면 그런 기회조차 없을걸?”

마족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자 결론은 금방 나 버렸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깨달았다.

고고하게 서 있는 발라크의 눈빛에는 오로지 푸르카스를 향한 집념밖에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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