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44화>
144. 처단자 (3)
말파스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고맙소. 루카 공.”
“자, 잠시만! 말파스, 저 녀석은 인간이라니까!”
죽을 위기에 처한 바신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 말을 무시한 말파스의 손에 마기가 모였다.
이후의 일은 안 봐도 비디오. 이미 나와 싸우며 많은 힘을 소진한 바신이 흠씬 얻어맞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쉬고 있어야지.’
무명에 깃든 기운을 회수하고 근처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문득 바신이 끌고 온 백마가 눈에 띄었다.
저 말이 마계에서 가장 빠른 생명체라고 했었나.
히히힝!
바신이 만든 키메라.
백마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울음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통달한 자]의 시야로 바라보니, 바신과 줄처럼 연결된 선이 보였다.
‘충분히 벨 수 있겠는데.’
검귀의 말처럼.
그는 무엇이든 베겠다는 각오로 검술을 펼쳤다.
그 검술이 오류를 불러일으켰고, 내가 푸르카스의 힘을 오류로 소멸시키며 가능성을 사실로 증명했다.
심지어 상태창에도 표시되지 않는 힘이다.
‘아무렴, 근원도 끊었는데 이걸 못할까.’
다시금 4가지 기운을 무명에 집중하고 눈에 보이는 선을 겨눴다.
호흡을 정돈하고 선명하게 드러난 흐름에 집중했다.
쉬익, 둘 사이에 연결된 선을 자르는 순간,
“젠장! 이 모욕은 언젠가 다시 갚아 주마!”
바신이 말파스의 공격을 피하며 이곳으로 뛰어왔다.
그의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핵을 크게 다치며 가공할 재생력도 다소 빛이 바랬다.
덜렁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바신이 펄쩍 뛰어 백마의 등에 올라탔다.
“무슨 짓인지는 몰라도, 다음에는 안 통할 거다.”
으득, 바신이 이빨을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삼류 악당의 퇴장 대사는 덤으로.
그러고선 말의 기수를 돌리기 위해 고삐를 잡아당겼다.
“이럇! 스티지아로 다시 돌……. 어, 어?”
히히힝!
말에 올라탄 바신의 몸이 마구 흔들렸다.
바신이 서둘러 고삐를 세게 틀어쥐었지만, 백마는 빛을 뿜어내며 더욱 격렬하게 등을 흔들었다.
“대단하구려. 키메라와 주인의 종속 관계를 끊어 내다니.”
말파스가 내 검을 힐긋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로 뭐든 베어낼 수 있잖아?
오류의 위력에 감탄하는 사이, 바신의 몸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바, 발라크! 크아아아!”
잠자코 있던 발라크의 표식.
살짝 닿기만 해도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등 뒤의 표식에서 피어올랐다.
이제 푸르카스의 도움이 사라졌으니, 발라크가 새겨 넣은 힘이 기지개를 켜는 것이었다.
“끝은 발라크가 내려는 모양이오.”
“직접 처리하지 않아도 되겠어? 저놈을 죽이는 게 소원이었잖아.”
“되었소. 저 꼴로 죽는 모습을 보는 게 더 통쾌하오.”
말파스의 의견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몸 전체가 서서히 얼어붙으며 죽어 가는 기분이라.
확실히 배신자에게 잘 어울리는 최후라는 생각이 들었다.
쩌저적.
이내 꽁꽁 언 육신이 허물어지며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말파스는 코웃음을 치며 바신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꼴에 걸맞은 죽음이군.”
“원래 각인이 사라진 키메라는 주인에게 적대적이었나?”
“마냥 그렇지는 않소. 저 녀석도 바신에게 쌓인 일이 많았나 보오.”
참, 대단한 녀석일세.
주인과 부하, 동료에 이어서 키메라에게도 원한을 샀다니.
오늘 죽지 않았더라도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팔자는 아니었다.
‘이제 바신은 끝났고.’
내 눈동자가 말파스를 향했다.
복수를 완료한 까마귀는 부하 악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에레보스 본성에서 대기하던 마족들도 말파스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주군.”
“다 그대들 덕분이지. 스티지아에서 볼모로 보냈던 악마는 어떻게 했나?”
“우선 결박하여 성에 가둬 놨습니다.”
“음, 루카 공의 생각은 어떠하오?”
볼모로 잡아놓은 악마.
이전에 동맹을 결성할 때 바신이 말파스에게 보냈던 부하가 있었다.
발라크에게 내 뜻을 전할 수단으로는 충분하네.
나는 말파스와 그의 부하들을 쭉 둘러보고 말했다.
“바신이 자기가 아끼는 부하를 볼모로 줬을 리는 없지. 살려서 스티지아로 보내는 게 좋을 거야.”
“나도 그리 생각하오. 들었느냐?”
“예, 주군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비탄의 악마로 불리는 메리골드가 말파스의 명령을 받아들이며 허리를 굽혔다.
나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손을 펼쳤다.
바신의 마기, 그가 소유했던 모든 기운이 내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루카 공?”
그 모습을 본 말파스가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귀공은 검술 말고도 참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있구려.”
“그런 편이긴 하지.”
나는 담담하게 답하며 내부를 살폈다.
남아 있는 마기의 양은 40%, 흡수한 마기가 자리를 잡자 빠른 속도로 기운이 회복되었다.
60% 정도. 이만하면 되었다.
“한데, 의외로 일이 너무 쉽게 끝났소. 굳이 공의 말처럼 악마와 고위 마족들을 본성에 모아둘 필요도 없지 않았소이까?”
“왜? 혹시나 바신이 너무 강하면 부하들의 손을 빌려야지.”
“허허허, 그렇기는 했소만. 내 말은 루카 공이 너무 신중하지 않았냐는 말이오.”
나는 작전을 기획하며 말파스의 악마와 고위 마족을 대부분 본성으로 결집시켰다.
바신을 이기기 위해서라고 말해 두었지만.
당연히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몸을 회전시키며 무명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이래야 깔끔하게 죽일 수 있으니까.’
우우웅.
신성력을 제외한 모든 기운이 단숨에 칼날에 응축되었다.
말파스와 메리골드. 그 둘을 앞에 둔 채로 무명을 움직였다.
그림자 검술 4번, [그림자 난무]
고도로 압축된 검강.
무명에 깃들었던 3개의 기운이 말파스와 그의 부하들을 덮쳤고.
정면에 있었던 대부분의 생물체가 육편이 되어 지면에 뿌려졌다.
“크아악! 어, 어째서! 이러는 이유가 뭐요?”
수많은 상처를 입은 바신이 높이 날아오르며 소리를 질렀다.
마기로 [암적뢰]를 펼치자, 먹색 전류가 튀며 내 신형이 하늘로 솟구쳤다.
서걱, 속도에 반응하지 못한 상대의 오른쪽 날개가 잘려 나갔다.
피를 뿌리며 추락하는 까마귀, 나는 그를 보며 답을 내주었다.
“어차피 너도 나와 끝까지 갈 생각은 없었잖아.”
찌릿. [초감각]의 경고가 오른쪽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붉은 털을 휘날리는 늑대인간 한 마리가 공중을 차며 다가오고 있었다.
고독의 악마, 브라이어는 일전에 나에게 죽을 뻔했던 악마였다.
“아, 그때 다쳤던 상처는 다 나았고?”
“주군! 어서 피하십시오.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충성심은 가상하지만, 그 누구도 살려 둘 생각은 없는데.
나를 중심으로 오러와 마기가 튀어 나갔다.
[투영]. 두 기운이 합쳐지며 장막을 만들어냈고, 먹이를 삼키는 짐승의 입처럼 확 펼쳐졌다.
“한번 잡아먹히면 끝장이다! 이를 악물고 버텨라!”
“어떻게? 이미 힘이 완전히 빠졌으면서.”
말파스의 의지가 무색하게도 [투영]은 두 마족의 기운을 몰아내고 둘을 옭아맸다.
어두컴컴한 그림자의 공간.
나의 세계에 초대된 말파스와 브라이어는 서로의 상태를 살폈다.
어떻게든 마기를 끌어 올리려고 발악했으나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브라이어, 너는 두 번째지?”
그르르.
내가 입을 열자 늑대 인간이 미간을 좁히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달려들 준비를 끝낸 것처럼.
말파스는 그런 충직한 부하를 막아서며 나섰다.
“나를 죽일 생각은 확실해 보이는군. 죽기 전에 하나만 묻겠소.”
날개가 잘린 말파스의 안색은 창백했다.
[투영]에 갇힌 이후에는 재생도 전혀 안 되었으니 오죽할까.
나는 두 마족을 번갈아 본 뒤에 말했다.
“부하를 살려 달라는 소리는 안 통해.”
“그건 아니오. 내가 궁금한 건 당신의 정체요. 설마, 바신이 말했던 대로 진짜 사람이었소?”
“어.”
뚜벅, 뚜벅.
나는 간단히 답을 주고 말파스에게 다가갔다.
브라이어가 전속력으로 뛰어나오며 가로막았지만, 채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단칼에 명을 달리한 부하를 보면서 말파스는 실소를 흘렸다.
“나의 복수는 발라크가 대신해 줄 것이오.”
“아니, 동맹은 깨지지 않을 거야.”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 거요?”
스릉.
나는 말파스의 어깨에 무명을 올리고 말했다.
“발라크에게는 내가 필요하니까.”
* * *
말파스와 바신.
두 대악마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한 결과, 마기는 총 9541점이 되었다.
대충 2700점. 이제는 2명분을 가져와도 상승 폭이 3000점을 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속이 좀 더부룩한데.’
9541점.
게임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도달한 적이 없는 수치였다.
그래서 그런지, 말파스의 마기가 몸에 들어오자 어딘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설마 1만 점이 한계인가?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만큼 일반적인 상황과는 멀었다.
“……배신자.”
아래쪽에서 고통을 참으며 입을 연 자가 있었다.
비탄의 악마, 메리골드는 쓰러져 죽어 가는 동안에도 증오를 쏟아냈다.
나는 무심하게 검을 찔러 목숨을 거두었다.
“누가 배신자래.”
애당초 아군이었던 적이 있었나.
말파스의 행동력이 느렸던 탓이지, 우리는 항상 서로의 뒤통수를 노렸다.
심지어 바신을 도와서 대종족 의회를 염탐하기도 했으니.
결국, 누군가는 죽고 사라져야 끝나는 일이었다.
대지에 뿌려진 피와 살점들.
나는 에레보스 본성에 펼쳐진 참극을 둘러보았다.
말파스는 죽었다. 그의 악마들도 모조리 죽었다.
그가 소집한 고위 마족과 그 밑의 놈들까지도.
극에 달한 마기를 가지고 검을 움직이면, 제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무용지물이었다.
서겅.
나는 어느 방의 문을 통째로 잘라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스티자아에서 보낸 볼모. 말파스가 잡아 두고 있던 바신의 부하가 이곳에 있다.
내부로 발을 들이밀자 흑마법진과 쇠사슬로 묶인 악마가 보였다.
검은 갑주로 전신을 가린 데스나이트. 그는 투구 속에서 적의가 느껴지는 안광을 내뿜었다.
“이름이 뭐지?”
“단결의 악마, 카시아. 혹시 나도 죽이러 온 건가?”
“그럴 리가.”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서 무명으로 흑마법진과 쇠사슬을 잘랐다.
특수한 마법적 처리가 된 사슬이었지만, 무명에 덧씌운 오류는 모든 걸 단칼에 잘라 버렸다.
쿵, 묵직한 갑주가 바닥에 떨어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가서 발라크에게 전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말파스를 죽였다고.”
“그건 무슨 뜻이지?”
“많은 걸 알면 점점 명줄이 짧아져. 참, 이것부터 물어야지. 너의 주인은 발라크야? 아니면 바신이야?”
“……내가 진정으로 모시는 분은 발라크 님이시다.”
“그럼 됐네. 말만 전하면 돼. 다음은 네 주인의 뜻을 따르라고.”
카시아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알겠다.”
“좋은 선택이야. 이제 가 봐.”
카시아를 떠나보낸 뒤.
나는 홀로 에레보스 본성에 남았다.
악마에 이어 고위 마족까지 모조리 참살당하자, 다른 마족들은 제 살길을 찾겠다며 성을 떠났으니까.
‘남은 놈들이야 국경이나 요새를 지키는 고위 혹은 상급 마족들이겠지.’
이제 에레보스 영지는 끝났다.
남은 건 전리품을 모두 챙기고 대종족 의회의 군대를 밀어 넣는 것.
푸하, 나는 가슴에 남아 있던 모든 숨을 토해 냈다.
상쾌하다.
솔직히 말파스를 죽이기 직전까지 고민이 많았다.
분명 발라크는 분노할 테고, 자칫 잘못하면 반 푸르카스 동맹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발라크는 내 손을 뿌리치지 못한다.
이번에 니플헤임을 다녀오면서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가 찾았던 동맹의 조건은 말파스처럼 보호를 바라는 약자가 아니라.
‘함께 푸르카스를 죽일 동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