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43화 (143/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43화>

143. 처단자 (2)

피가 뿜어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불시에 당한 기습. 거기에 본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적에게 당했으니 어련할까.

바신은 반쯤 잘린 목을 부여잡으며 백마 위에서 떨어졌다.

“이겼…….”

“아니! 이제 시작이야.”

나는 감각을 집중했다.

푸르카스의 힘이 발현되는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 모든 감각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내가 기다렸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르륵.”

바신이 입에서 피거품을 뿜어내며 바닥에 착지했다.

대악마의 이름에 걸맞게 재생력은 상당히 좋았다.

갈라졌던 목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고, 힘을 잃고 쓰러지던 육체에는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근원의 힘은 아니야.’

뱀 꼬리.

나는 바신의 뒤에 붙어있는 특이한 신체 부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원래 인마족이었지만, 발라크의 밑에서 키메라 제조술을 배웠다.

말파스가 말하길, 바신의 육신은 그가 익힌 제조술을 통해 스스로 개조한 것이었다.

‘저건 마계에서 유명한 마수인 ’야쿠마‘의 꼬리라 했었지.’

가공할 재생력과 맹독.

바신은 야쿠마와 합성하며 두 능력을 손에 얻었다.

재생 능력은 하이 뱀파이어에 필적하며, 맹독은 대악마들도 가볍게 여길 수준은 아니다.

그러니 더 몰아쳐 줘야지.

쉬익.

바람 소리가 나며 내 신형이 주우욱 늘어났다.

[달빛 베기], 분열된 칼날이 상대를 감싸듯 몰아쳤고 바신은 이를 악물며 마기를 뿜어냈다.

까가가강! 검은색 보호막과 칼날이 부딪치며 기운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 말파스! 이 녀석은 마족이 아니다!”

목의 재생을 마친 바신.

그의 눈은 나를 가리켰고 목소리는 말파스를 향했다.

푸르카스에게 나에 대해서 들었나 본데.

솔직히 말하자면 내 정체를 떠벌려도 그다지 상관은 없었다.

‘우리 말파스는 이미 눈이 돌아갔거든.’

콰과과과!

때마침 등 뒤에서 말파스의 마기가 크게 부풀었다.

자연에 존재하는 마기, 그걸 본인의 소유로 만든 대악마의 분노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적극적으로 나서주겠다면 기꺼이 비켜 줘야지.

- 돌아가면서 힘을 빼놓자고.

나는 옆으로 몸을 날리며 말파스에게 사념을 보냈다.

까마귀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에 압축된 마기를 쏘아 보냈다.

콰앙! 검은 섬광이 터지며 바신의 보호막은 유리처럼 간단히 부서지고 말았다.

‘위력만 놓고 보자면 여기서 최고일지도.’

말파스의 일격은 하나하나가 필살기.

자연의 마기를 모으는 과정이 오래 걸릴 뿐. 일단 쏘고 맞출 수만 있다면 나에게도 위협적이다.

마기가 일직선으로 방출되며 만들어진 길쭉한 구덩이. 그 한복판에는 넝마가 된 바신이 서 있었다.

“바신! 네놈의 간사한 혓바닥에 더 놀아날 줄 알았느냐?”

말파스는 억울한 표정을 짓는 바신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게 평소에 거짓말을 안 들키게 했어야지.

‘어차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바신이 우리를 이길 수 없어.’

바신은 약하다.

조금 전의 움직임으로 평가를 하자면, 대악마 중에서 중간도 못 간다.

그렇다면 바신이 택할 활로는 하나였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언젠가는 분명 후회할 것이다.”

“그래, 죽어서 우리의 미래를 잘 봐줘.”

“흐하하하! 인간 놈이 입은 살았구나. 말파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어서 내 손을 잡아라!”

아니, 이런 선택 말고.

바신은 만만한 까마귀에게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 된 건지, 바신은 계속 끓는 기름에 물을 퍼부었다.

“미안하지만. 이미 협상은 끝났어. 발라크의 동의도 받아 냈거든.”

“맞소이다. 그대는 마계의 역적. 지금 여기서 처단하겠소.”

이제 복기가 좀 되지?

내가 방긋 웃으며 말파스와 바신을 번갈아 보자, 부드럽게 움직이던 뱀 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입을 털어서 상황을 해결하기에는 좀 멀리 왔지.

결국, 바신은 허공에서 창을 소환하며 자세를 가다듬었고 나도 무명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냥은 힘들 거야. 아끼다가 똥 되지 말고 좀 쓰지?”

“무얼 말이냐.”

바신이 입을 찢으며 음흉하게 웃었다.

라일라크는 근원의 정체를 몰랐다. 반면에 바신의 태도는 전혀 다르다.

놈은 근원의 힘을 인지하고 있다. 아마도 힘을 넘겨받는 대가로 발라크를 배신했겠지.

‘뭐,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니 확인은 해 봐야겠지.’

만약 쓰기 싫어한다면 강제로라도 쓰게 하면 될 일.

나는 발을 구르며 마기를 확 끌어 올렸다.

그림자 검술 2번, [환영 활보]

공간을 가득 메운 환영.

바신의 눈동자가 바쁘게 본체를 찾아 헤맸다.

그러면서 창을 빙빙 돌리며 내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재는 학습 능력이 없나.’

환영은 속임수다.

진짜 공격은 환영 속에 숨어 있는 내가 아니라, 그 뒤에서 조용히 마기를 모으는 말파스였다.

까마귀가 빚어 낸 마기가 내 환영을 뚫고 나타났다.

“흐읍!”

바신은 황급히 창을 겨눴다.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는 심산, 내 역할은 그 마음가짐에 재를 뿌려 주는 것이다.

그림자 검술 4번, [그림자 난무]

촤촤촤촤!

몸으로 받아 내기에는 부담스러운 공격.

단단하게 뭉쳐진 검은색 검강 다발이 커다란 면을 채우고 바신에게 날아들었다.

창은 단 하나. 모두를 막아 낼 수 없는 상황은 만들어 줬다.

‘근원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응축된 마기와 검강이 바신을 덮치는 순간.

찌릿, [초감각]과 [통달한 자]가 동시에 경고를 보냈다.

바신의 기도가 달라졌다, 그동안 느리게만 보였던 그의 움직임이 손상된 영상처럼 뚝뚝 끊겨 보였다.

“분명 후회할 거라고 경고했거늘!”

승리자의 미소.

바신의 창이 말파스의 마기를 꿰뚫었다.

그렇다면 내 검강에 순순히 당하는 수밖에 없을 터.

하지만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창두가 어느새 검강을 찢어발기고 내 심장을 노렸다.

챙!

창두가 묵직하다.

불안정한 자세로 창을 막은 탓에 검에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았다.

말파스는 주변의 마기를 응집해 강력한 방어막을 만들 수 있으니, 근원의 힘을 사용한 바신의 목표는 자연스럽게 내가 되었다.

* * *

시간이 제법 흘렀다.

바신은 근원을 사용하며 나를 노렸고.

나와 말파스는 수세에 몰린 채로 공격을 막아 내는데 급급했다.

쉭, 쉬익. 훙!

찌르고, 베고, 휘두르고.

바신이 검이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창두를 흔들며 집요하게 빈틈을 노렸다.

독이 잔뜩 묻은 창날, ‘마독불침’에 신성력을 겸비했기에 독에 중독되어도 목숨을 내주지는 않을 터.

‘여러 번 당하면 위험하겠지만.’

창날을 피하며 은근슬쩍 말파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사념을 날려 바신과 거리를 벌리라고 일러주었다.

말파스의 공격은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런 식이라면 일대일의 싸움에 불과하리라.

그 사실을 잘 알았던 바신은 더욱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했다.

“흥! 네놈들 속이 훤히 보이는구나.”

바신의 동작이 계속 뚝뚝 끊겼다.

목에 다다른 창을 밀어내도 바신의 창은 거의 동시에 다른 급소를 노렸다.

근원의 힘을 빌려 시간의 흐름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나를 경계하는 건지, 타이밍을 가늠하기 힘들게 근원을 최대한 짧게 끊어서 사용했다.

“크윽.”

채채챙!

초월자의 힘을 빌린 공격에 저절로 신음이 세어 나왔다.

시간의 흐름을 조절하는 공격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파훼하지 못한다.

다행이라면 나의 속도가 더 빠르다는 정도.

그래서 창이 닿기 직전에 간신히 몸을 틀며 창날을 피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별거 없구나!”

바신은 힘에 취한 채로 창을 움직였다.

여태까지 유효타는 없었으나 표정에서는 자신감이 줄줄 흘렀다.

다만 한참 동안 쫓고 쫓기는 과정을 반복하자, 바신의 얼굴에서 조바심이 살짝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쥐새끼 같은 놈.”

그때였다.

바신이 나를 끝장낼 생각으로 조금 더 길게 근원의 힘을 끌어냈다.

라일라크와 싸우며 단련된 감각.

그때의 경험과 비슷한 느낌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지금이다!’

나는 아랫배에서 대기 중이던 마기를 밖으로 확 잡아당겼다.

칠흑의 기운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움직였다.

막대한 양의 마기가 온몸을 타고 질주하며 일제히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림자 검술 8번, [그림자 참수]

시간이 멈췄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말파스의 깃털이 멈춰 섰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주인을 잃고 울부짖던 백마, 성벽에서 대악마들의 결투를 지켜보는 마족들까지.

그들의 행동과 사고가 모두 정지해 버렸다.

드드드드.

시간의 벽.

생명체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세계가 나를 막아섰다.

나는 이를 악물고 육체에 전해지는 압력을 버텨 냈다.

그러자 격렬한 저항을 뚫고 다리가 움직였다. 어깨와 팔꿈치도 점차 말을 듣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치켜떴다. 모든 게 정지된 이 공간에서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움직이는 존재가 있었으니.

“무슨!”

바신은 소리를 꽥 질렀다.

벽을 허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기에 나는 서둘러 검을 휘둘렀다.

발을 앞으로 디디며 창두를 쳐 냈다.

태앵.

나를 압박하던 창이 속절없이 밀려났다.

근원의 도움이 없다면 바신이 나를 이길 방법이 있겠는가.

무명의 칼끝이 무방비가 된 상대의 명치를 부드럽게 찌르고 들어갔다.

- 어리석구나. 그런 공격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푸르카스의 목소리.

누가 이걸로 죽이겠데? 나는 혀를 차는 대신에 방긋 웃었다.

애당초 검귀는 [그림자 참수]로 검성조차 쓰러트리지 못했다.

하물며 초월자에게 통할 리가.

이건 단순히 근원이 사용될 때 바신의 몸에 검을 꽂기 위한 기술이다.

신성력, 오러, 혈마력.

3개의 기운이 명치에 꽂힌 무명을 타고 흘렀다.

흑진주를 빼닮았던 마기의 색이 점차 옅어졌다.

완전무결한 투명. 4개의 기운이 하나가 되니 흑도는 평범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건 좀 아픈가?”

내가 되물었지만, 푸르카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바신의 몸 안에서 느껴지던 희미한 빛의 기운이 꿰뚫리며 사라졌기 때문이다.

주인과의 연결이 끊어진 상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겉보기에는 기운이 깃들지 않은 검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그 반대니까.

“어, 어째서?”

바신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말파스와 다른 마족들의 말소리도 들렸다.

나는 바신의 몸에서 무명을 뽑아냈다.

촤악.

핏물이 번지며 바신이 힘을 잃고 쓰러졌다. 날개를 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말파스가 날아와 물었다.

“죽은 것이오?”

“그건 잘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푸르카스와 연결된 줄은 끊어졌다는 거지.

내가 검귀의 기억을 보았을 때, 관리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급하게 기억을 종료시켰다.

그리고 어떤 오류가 생겨서 끊었다고 둘러댔다.

무명을 감싼 투명한 기운은 관리자들이 말했던 그 ‘오류’였다.

물론, 내가 구현한 힘은 검귀가 보여 준 것과는 달랐다.

‘검귀가 어떤 방법으로 오류를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오류를 만들어 내는 방법은 하나가 아닐 거야.’

혈마력, 오러, 마기, 신성력.

판게아와 마계에서 4가지 기운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존재할 수 없는 게 존재하면, 보통 그런 현상이나 존재를 모순이라고 한다.

그런 모순에서 잉태된 오류, 근원처럼 법칙을 벗어난 힘이라고 볼 수 있다.

‘방식은 달라도 검귀가 만들어 낸 오류와 기능은 거의 같아.’

다만 이 힘에는 비교적 아쉬운 부분이 있다.

오류는 근원과 다르게 만능이 아니다.

혼자서 수련하며 별짓을 다 해 봤지만, 무엇이든 벨 수 있다는 게 전부였다.

푹.

나는 오류가 깃든 무명으로 끈 떨어진 연을 찔렀다.

바신이 고통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처럼 일반 생물체에는 다른 특수한 작용이 없다.

그냥 베고 찌를 수 있을 뿐이다.

그보다 애는 왜 갑자기 죽은 척이야?

“야, 일어나.”

나는 검을 뽑으며 바신의 뺨을 툭툭 쳤다.

상대는 살아 있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는 말이다.

놈은 뱀 꼬리를 살랑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천연덕스러운 미소는 덤이었다.

“하, 하하! 그게 말이다. 모두 내 말을 잘 들어보도록.”

“루카 공,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소. 바신의 목숨을 내 손으로 끊게 해 주시오.”

말파스는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까마귀 친구가 쌓인 게 많은 모양이네.

“마음대로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