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42화>
142. 처단자 (1)
스티지아 본성의 알현실.
영지의 고위 마족과 악마가 모두 모인 가운데, 바신의 손에는 종이 몇 장이 들려 있었다.
“의논할 게 있으니. 에레보스 본성으로 오길 바란다는군.”
에레보스 영지에서 온 편지.
바신은 국경 요새의 장군을 통해 전해진 문서를 읽고서 얼굴을 구겼다.
세계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이 상황에 한가히 회의나 하자니.
“정녕 여기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더냐?”
권좌에 앉은 바신의 물음에 고위 마족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에레보스의 마족으로부터 받은 대악마 말파스 님의 친서입니다.”
“도통 이해할 수가……. 아니, 혼란한 상황이니 나를 부르는 건가?”
바신의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인페르노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 인간과 림보 영지의 전쟁과 관련된 문제인가.
‘그렇다면 의논할 거리라는 것도 명확하군.’
바신은 서신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역시나 ‘안페르노의 분쟁’이라는 내용이 편지의 대부분을 장식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용의 마무리 부분에 있는 문구가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 그대가 오지 않는다면 따로 발라크를 만나러 가겠소.
협상의 여지 따위는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
평소에 우유부단한 성격과는 달리, 이 편지에는 말파스의 확고한 결단이 드러났다.
“웃기는군.”
바신은 편지를 쥔 손을 말아쥐었다.
종이는 맥없이 구겨졌고 주변에 서 있던 부하들이 어깨를 떨었다.
발라크에게 사실을 전한다는 시점에서 바신을 움직여야만 한다.
그걸 잘 알기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주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악마와 고위 마족들 사이에서 나온 한 악마.
바신의 오른팔로 널리 알려진 프린지가 알현실의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바신은 침묵하며 그를 바라봤고, 프린지는 눈을 마주치며 간언을 올렸다.
“주군, 먼저 발라크 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십시오.”
“그럴 필요는 없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
“요새 발라크 님께서 걱정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혹여 두 분 사이에 의가 상하여 일이 돌이킬 수 없을 정…….”
“무엄하다! 너도 나를 의심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니플헤임과 관계가 소원해진다면 주군께서 입장이 난처…….”
“듣기 싫다!”
쿠구구구.
바신의 일갈과 함께 마기가 터져 나왔다.
알현실에 몰려있던 악마와 고위 마족은 무릎을 꿇으며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었다.
다만 프린지를 제외하고서.
“네놈.”
바신은 정면의 부하를 노려보았다.
프린지는 니플헤임에 속해 있었던 세월부터 줄곧 같이 있었던 동료였다.
둘의 관계가 급격히 나빠진 건 최근의 일.
과거에는 동고동락을 함께한 사이였지만, 발라크를 향한 태도가 이 둘을 갈라놓았다.
“나는 발라크의 종이 아니다.”
결국, 바신의 입에서 나와선 안 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가 불러일으킨 파장은 상당히 컸다.
바신의 부하들, 특히 악마들은 과거에 발라크의 수하들이었다.
그래서 조금 전의 말에 충격을 받은 자들이 많았다.
끼이이이.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던 무렵.
압축된 마기가 꾹 닫혀 있던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바신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지만, 지금은 듣지 않겠다. 모두 여기에서 나가도록.”
“……알겠습니다. 주군.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시옵소서.”
프린지를 필두로 모든 마족이 밖으로 나갔다.
쯧, 바신은 프린지의 등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언제까지고 발라크의 종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저들에게는 정확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지만, 푸르카스는 마신의 근원을 손에 넣었고 그 힘을 사용할 수도 있다.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우리를 위협으로 내모는 건 너다. 발라크.’
발라크는 푸르카스가 마계의 질서를 어지럽힌 역적이기에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 바신은 알고 있다.
그건 그저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발라크는 마신의 왼팔이었고, 늘 자신보다 앞서 있었던 푸르카스를 질투했다.
“본인이 질투하던 상대에게 충성을 바치기는 힘들었겠지.”
등신 같은 놈.
바신은 옛 주군을 떠올리며 조소를 흘렸다.
발라크는 어떨지 몰라도, 바신은 푸르카스를 인정하고 있었다.
아무렴, 마신은 처음부터 마신이었겠는가?
대악마의 자리도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마신의 자리도 영원하리란 법은 없다.
다음번 마신은 푸르카스다.
그의 옆에는 새로운 오른팔이 필요할 터.
인간들의 침략을 잘 막아 내고 살아남는다면 이인자가 될 수 있으리라.
그게 주인을 배신하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간 이유였다.
바신은 눈을 감고서 정신을 집중해 누군가를 불렀다.
‘새로운 마계의 주인이시여.’
작고 볼품없는 빛.
마음속에 자리 잡은 촛불보다 미약하고 가녀린 빛에 기대어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어떤 이의 목소리가 바신의 머릿속을 울렸다.
- 충복이여. 무슨 연유로 불렀느냐?
힘이 쇠약해진 마신을 죽이고 근원을 취한 자.
새로운 마계의 주인이 될 푸르카스가 바신의 부름에 답했다.
‘말파스에게서 에레보스 영지로 오라는 서신을 받았습니다. 인페르노의 분쟁에 관한 일입니다.’
- 시기가 묘하군.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혹시 루카라는 자도 회의에 참석하는가?
루카.
그는 어느 순간에 혜성처럼 나타나 마계를 뒤흔든 존재였다.
루카에 관한 정보를 물어보아도 대답을 피할 뿐.
그러던 푸르카스가 먼저 루카를 언급했다.
‘아닙니다. 둘이서만 만나자고 적혀 있었습니다.’
- 흠, 말파스도 루카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가.
‘루카의 정체라뇨?’
- 이제는 말해야겠군. 루카는 대악마가 아니다. 그놈은 판게아에서 넘어온 인간이다.
뭐라고?
바신은 순간 머리에 천둥이 치는 줄 알았다.
‘무, 무슨 뜻이신지. 루카라는 자는 마기를 사용하는 인마족입니다.’
바신은 정신을 간신히 유지하며 물었다.
- 아니다. 그놈은 인간이다.
‘정녕 그렇다면. 어째서 저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 짐이 꼭 말해야 하는 이유가 있더냐. 네가 그 정보를 알았다고 한들 무엇이 바뀌겠느냐?
‘그, 그건.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소서.’
하긴 푸르카스가 시킨 일들이 이상하다고는 여겼다.
레라지에와 함께 대종족 의회를 공격하라든지.
데모니움으로 보내는 노예에 첩자를 심으라든지. 말파스를 회유해서 대종족 의회를 솎아내라든지.
루카가 같은 마족이라면 굳이 이렇게 적대시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제야 시야를 가리던 안개가 걷힌 느낌이었다.
- 미리 말하지 않았던 건, 혹시 아는 척이라도 할까 봐. 그 점이 걱정되어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아, 그런 깊은 뜻이……. 그럼, 이번에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 일단 편지의 내용대로 에레보스 영지로 가라. 저번처럼 말파스를 회유해서 대종족 의회를 공격하면 되느니라.
‘하지만 적절한 증거가 없다면 제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말파스는 신중한 성격이다.
정확한 증거를 보여 주지 않으면 어떠한 행동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푸르카스는 곧바로 그에 대한 답을 내주었다.
- 이번 인페르노와의 분쟁은 모두 대종족 의회를 부추기기 위한 포석이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들을 지원할 테니 말파스를 설득하는 건 쉬울 것이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에레보스로 떠나겠습니다.’
- 대종족 의회를 공격하기 전에 다시 연락하거라.
머리를 울리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바신은 힘없이 권좌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짜증과 불만으로 얼룩져 있었다.
결국, 부하를 시켜서 일을 해결하는 건 발라크와 같지 않은가?
무슨 일이 그렇게 바빠서 영지 안에 박혀 있는 건지.
‘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뜻이겠지.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애당초 제대로 된 대우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대악마의 도구보다는 마신의 도구가 더 좋은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 * *
에레보스 본성의 높은 첨탑.
나는 그곳에 숨은 채로 먹잇감을 기다렸다.
목표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없었다.
‘나타날 수밖에 없지.’
발라크에게 말하겠다는데 자기가 뭘 어째?
설령 배를 째라고 드러누워도, 푸르카스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도 없다.
말파스를 잘만 이용하면 대종족 의회를 공격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루카 공. 여기 있었소?”
마침 말파스가 날개를 퍼덕이며 첨탑으로 날아왔다.
까마귀의 얼굴은 상기된 상태였고, 두 눈은 바신을 향한 복수로 활활 타올랐다.
나도 씩 웃으며 그 감정에 동조해 주었다.
“온다고 했나 보지?”
“서신을 보낸 게 아니라, 말을 타고 국경을 지나쳤다는 보고가 왔소이다.”
“저번에 봤던 바신의 백마 말이지?”
“그렇소.”
말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타고 다니는 백마는 바신의 키메라고, 마계에서는 가장 빠른 것으로 유명하오.”
“호오, 그건 발라크의 밑에 있을 때 만들었나 보네. 그렇다는 건 도망치기도 좋다는 뜻이겠지?”
“맞소이다. 아마 백마의 속도라면 금방 이곳에 도착할 것이니 미리 준비해 두시오.”
작전은 미리 짜두었다.
말파스가 본성 정문에서 바신을 맞이하면, 때를 지켜보다가 내가 뛰어드는 식이었다.
“알겠어, 들키지 않게 잘 숨어 있을게.”
“바신이 부하들과 함께 왔다면 준비할 시간이 넉넉했을 텐데. 조금 아쉽구려.”
“대신에 혼자니까 다른 걸 고민할 필요도 없잖아.”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말파스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까마귀가 첨탑에서 내려간 뒤.
나는 에레보스 본성 정문에서 기다리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준비를 많이 하면 네 힘을 뺄 수가 없지 않겠어?’
나는 정체를 들킬 위협을 감수하며 결전지를 에레보스로 정했다.
가장 큰 이유는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바신이 이리저리 날뛸 확률이 높다.
그런데 장소가 데모니움이라면?
‘여기서 싸우면 주변이 박살 나도 상관이 없지. 그리고.’
복수에 눈이 먼 말파스.
나는 시커먼 까마귀의 등을 보면서 인기척을 지웠다.
먼저 마기를 티가 나지 않게 사방에 깔았고, 그 안에서 검붉은 오러로 장막을 펼쳤다.
이렇게만 해두면 바로 들키지는 않겠지.
그때였다.
번쩍!
눈부신 섬광을 뿜어내며 하늘을 가르는 물체.
순백의 말에 올라탄 남자가 에레보스 성의 정문으로 내려왔다.
나는 조용히 기감을 넓히며 무명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굉장히 빨리 와줬구려.”
“이번에 일어난 전쟁을 유심히 설피던 중이라……. 그런데 논의라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건가?”
“편지에 적었던 대로 인페르노와 관련된 것이오. 우리도 이참에 저 분쟁에 뛰어들어야 하지 않겠소?”
“발라크의 동의가 떨어지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건 위험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바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엄청난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듯,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숨을 골랐다.
이것 봐라? 뒤에 내용을 듣지 않아도 바신이 꺼낼 주제는 명확해 보였다.
“대종족 의회…….”
스릉.
무명의 손잡이가 움직이며 나를 감싸던 기운들이 사라졌다.
파지직. 첨탑에서 뛰어내리는 내 육신에 검은색 전류가 튀었다.
[암적뢰]를 사용하자 감추었던 존재감이 확 드러났다.
“응?”
바신의 시선이 나를 가리켰다.
그의 동공이 급격하게 팽창했고, 얼굴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비명을 지르듯 입을 쩍 벌렸다.
마치 나쁜 짓을 하려다가 부모에게 걸린 어린아이처럼.
“죽어라, 바신!”
한이 담긴 말파스의 일갈.
까마귀는 목표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공간에 기운을 집중했다.
뒤이어 검을 쥔 내 신형이 번개처럼 목표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