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41화>
141. 빅 쇼크 (5)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수증기.
무명에서 나온 불길이 니플헤임을 지배하고 있는 한기를 저 멀리까지 밀어내 버렸다.
덕분에 눈이 증발하며 한증막에 들어온 것처럼 후끈한 기운이 주변을 맴돌았다.
‘역시 이 정도는 가뿐한가.’
조금 전.
누더기 드래곤이 앞발을 들어 휘두르자, 초승달 형태의 기운이 간단히 부서져 버렸다.
그만큼 발라크의 키메라가 엄청난 수준을 갖췄다는 뜻이다.
뭐, 내가 최대한 기운을 빨아들인 탓도 크지만.
- 이게 무슨 짓이지?
발라크의 사념에 노여움이 깃들었다.
아니, 먼저 날뛴 게 누군데 화를 내고 그러실까.
나는 아직 수증기 안에 갇혀 있는 상대에게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미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한 발 뺐어! 서로 주고받았으니 그러려니 하자고.”
- 천박하긴.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런 대답이 나와. 엉큼하긴.”
- ……좋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내가 먼저 시작했으니 굳이 문제 삼지는 않겠다.
“잠시만, 가까이 있으면서 왜 자꾸 사념을 퍼트리는 거야? 괜히 짜증 나게.”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불편한 심경을 내비쳤다.
사념을 발산해서 이야기하는 건 대악마급만 되어도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저런 걸 하지 못하는 애들에게만 공포심이 생길 터.
나에게는 은근한 짜증과 불쾌감만 줄 뿐이었다.
“흠. 알겠다. 여기에 찾아온 용건은 뭔가.”
발라크는 드래곤의 등에서 내려와 가까이 다가왔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썼고, 망토로 몸을 전부 가려서 키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몸을 꼿꼿이 핀 채로 공중에 둥둥 떠서 다가오는 꼴이 정말 촌스러웠다.
‘무슨 90년대 만화에 나오는 사천왕 첫째도 아니고.’
아주 그냥 내가 마왕이다. 이거지?
“우선, 여기까지 오면서 부하들을 많이 팼는데. 그건 먼저 사과할게.”
“내가 먼저 공격한 것도 있으니, 그대의 말대로 넘어가기로 하지.”
“좋아, 좋아.”
상호 간의 불화는 종결.
다음은 내가 니플헤임으로 오게 된 경위이다.
“바신이 배신한 것처럼 보여서 말해 주러 온 거야. 혹시 모르고 있었다면 고맙다는 인사는 됐어.”
“알고 있었다.”
“호오, 알면서도 왜 그대로 뒀지?”
“그대나 말파스가 내 영지로 오게 만들 방법이 그뿐이니까. 그래서 일부러 바신을 압박했지.”
낄낄낄낄.
발라크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자기 방에 갇혀서 사는 애라 그런지, 웃음 포인트가 상당히 미묘하네.
물론, 나도 덩달아 마주 웃어 주었다.
그러자 발라크는 허리를 굽히며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연히, 이번에 인페르노에서 벌어졌다는 그 전쟁도 나의 작품이다.”
웃음기가 사라진 발라크.
그의 가면 속에서 시커먼 어둠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낮게 내리깐 말투에는 묘한 광기가 느껴졌다.
친해지기는 힘든 친구겠네. 나는 그를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전쟁이 일어난 지 며칠도 안 됐을 텐데. 어떻게 알았지?”
“말했잖나? 지금 이 전쟁은 나의 안배라고.”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어.”
나는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파멸의 송곳니를 잡았다.
발라크 이번에 벌어진 인페르노 영지의 전쟁이 본인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긴장할 필요 없다. 인간.”
발라크가 그리 말했다.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상대의 가면 속을 보았다.
없다. 저 안에는 생명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본체가 직접 나선 게 아니라는 건가.
‘싸우러 오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야. 설령 본체가 왔어도 살아서 빠져나갈 수는 있겠지만.’
상대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굳이 마기만 고집할 이유는 사라졌다. 다른 기운들을 조합하면 생존은 문제가 안 되었다.
나는 무덤덤하게 파멸의 송곳니를 압축 주머니에 넣었다.
“이거 참, 진솔한 대화가 되겠는데. 내가 인간인 걸 알면서도 오라고 한 걸 보니까.”
“내심 말파스가 아니라 그대가 오기를 바랐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어째서지?”
“푸르카스를 쓰러트리려면 그대의 힘이 필요하니까.”
“혼자라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그렇다.”
발라크는 굽혔던 허리를 펴며 다시 꼿꼿한 자세로 돌아갔다.
상대의 본체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지만, 가짜에 설치된 흑마법이 꽤 견고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풀어볼 만도 한데.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나는 바신 살해 허가권을 받으러 왔다.
무엇보다 발라크는 나를 불러내기 위해서 바신을 압박해 림보 영지를 움직였다.
계획의 치밀함을 따지면, 내가 날뛰었을 때를 대비한 계책이 있을 수 있다.
“내가 필요한 이유는 잘 알겠어. 아는 게 많으니까, 내가 여기로 온 이유도 잘 알겠네?”
“바신은 죽여도 좋다.”
의외로 허가권 발급이 쉬운데.
물론, 배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와의 동맹을 견고히 하고 그 대가로 바신을 내어주는 모양새니까.
나는 문득 악마들의 몸에 새겨진 표식이 기억났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근데 바신에게는 아무런 장치도 걸려 있지 않나 보지?”
“무엇을 말하는 건가.”
“보니까, 다른 악마들에게는 충성을 강요하는 표식이 있던데. 바신은 어떻게 배신했냐는 거지.”
“사실, 그 표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의심하게 되었다. 알게 모르게 푸르카스의 힘이 표식의 작동을 방해하더군.”
발라크는 장난기가 사라진 말투로 대답을 해 주었다.
대놓고 부하를 빼앗겨서 그런지, 상당히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렇게 기분이 나쁘면 당장 영지 밖으로 나가서 바신을 잡아 오던가.
“잘 알겠어. 근데 영지 밖으로 안 나오는 이유는 뭐지?”
“……푸르카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놈은 강하다. 근원을 취하며 더 강해졌지.”
이상한 놈이네.
영지 밖을 돌아다니는 거야 당연히 위험하다.
하지만 이건 자신을 너무 과잉보호하는 게 아닌가.
저 대악마는 보기보다 걱정이 많아 보였다.
“이해는 안 되지만. 네가 나를 굳이! 네 영지로 불러들인 이유는 잘 알겠어.”
“나도 이해를 바라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푸르카스를 죽이는 거 아닌가?”
“그래, 맞아.”
“흐흐흐, 잘 알고 있어서 다행이군. 중요한 건 푸르카스를 죽이는 거다. 바로 그렇다.”
응?
나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길쭉한 발라크의 몸을 쓱 훑었다.
조금 전에 발라크가 광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반복했을 때.
전혀 생뚱맞은 방향에서 발라크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는 가짜 발라크가 아니었는데.’
내 시선이 살짝 누더기 드래곤에게 향했다.
착지할 때의 자세를 유지 중인 키메라, 나는 그놈을 살짝 보았다가 다시 발라크를 보았다.
그때까지 상대는 했던 말을 반복하며 나에게 푸르카스의 무서움을 설파했다.
“푸르카스는 절대 쉽게 보아서는 안 된다. 아주 무서운 놈이다! 예전에도 놈에게 곤욕을 치렀고, 지금도 호시탐탐 나와 이 영지를 노리고 있다!”
‘이거 보통 집착이 아니잖아. 이래서 인간들이랑 손을 잡으려고 하는 건가.’
혹시 푸르카스에게 맞고 살았니?
저절로 그런 의문이 고개를 치들 수밖에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축적된 공포심이 아니라면, 마계에서 두 번째로 강하다는 발라크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말이 될까.
“아! 푸르카스가 얼마나 강한지는 나도 경험해 봤다고.”
“……알겠다. 내가 좀 심했다.”
“이제 조금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내가 바신을 죽여 주면 너는 뭘 줄래?”
“이상하군. 바신을 죽이면 마계의 전력이 줄어들지. 그러면 인간의 이득이 아닌가?”
발라크의 길쭉한 몸이 오른쪽으로 휙 기울었다.
나사가 빠진 모습을 보이더니, 이럴 때는 또 머리가 잘만 돌아간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너도 이득을 보잖아? 배신자를 영지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죽이는 거니까.”
“바신은 내가 부르면 온다. 죽일 방법은 나에게도 있다.”
“참나, 그렇게 쉬우면 본인이 하든가.”
바신을 죽이면 확실히 나에게 이득이다.
마기를 흡수할 수도 있고, 비마족이나 인간들에게 더욱 큰 신뢰를 얻을 테니까.
하지만 더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면.
‘한번 거기를 찔러 볼까.’
조금 전에 보았던 발라크의 태도를 떠올렸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호선을 그렸고, 곧이어 주둥이에 난 구멍을 통해 말이 쏟아져 나왔다.
당연히 목표는 발라크의 급소였다.
“가만있어 보자. 이유를 알 것도 같은데. 혹시! 푸르카스의 근원이 무서워서?”
“그게 무슨 말이냐.”
“그렇잖아. 바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간접적으로 푸르카스와도 붙어야 할 텐데.”
악마조차 불사신으로 만들던 힘.
상황을 보아하니 발라크도 그 힘에 당해 본 적이 있는 듯했다.
나는 발라크의 가면 속을 꿰뚫어 보며 입을 놀렸다.
아마 바신도 무언가 도움을 받고 있을 터.
발라크가 직접 바신을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곳에 있으리라.
“푸르카스가 무섭지?”
내 말이 화살처럼 날아가 발라크의 마음을 꿰뚫었다.
상대의 망토가 살짝 떨리며 짙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동요하고 있다. 푸르카스의 총애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바신을 영지 안에서 죽이고 싶지는 않겠지.
“네가 말한 것처럼. 굳이 아쉬울 게 없다면 네가 바신을 처리해. 다 끝나면 연락하고.”
“좋다. 보상을 주겠다. 무엇을 원하는가?”
발라크가 시원하게 입을 열었다.
진심을 들킨 판국에 굳이 사실을 부정하며 시간을 끌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언제나 같다.
“비마족과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영약 재료.”
“인간이나 비마족을 위한 영약 재료라면 차고 넘친다. 하지만 비마족은 줄 수가 없다.”
발라크는 단호하게 내 요청을 거절했다.
뭐지, 내가 여태까지 대악마들에게 요구하고 다닌 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나는 우리의 주변을 살피고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설마, 네 영지에는 비마족 노예가 없는 거야?”
“그렇다.”
“그러면 스티지아 영지에 남아 있는 비마족을 전부 주면 되잖아. 어차피 내가 바신을 죽이면 영지는 네 것이 될 테니까.”
스티지아는 데모니움에서 너무 멀어서 당장은 내가 가지기 힘들다.
바신의 부하에는 발라크의 부하였던 자들도 있으니, 스티지아 영지의 주인은 자연스럽게 발라크가 되리라.
상대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전부 주도록 하지. 그대에게 도움이 될 물건도 챙겨주겠다.”
“일단 주는 걸 거절하진 않는 성격이라. 주면 고맙게 잘 쓸게.”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아! 그대의 정체는 당분간 비밀로 해 두겠다.”
“그래, 너도 인간과 손을 잡았다고 하면 입지가 흔들릴 테니까.”
굳이 인간과 손을 잡으려는 이유.
그건 재차 물을 필요도 없었다. 발라크가 가진 푸르카스에 대한 원한.
긴 세월 동안 쌓여 온 그 감정이 나에게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충 발라크의 약점도 뭔지 알겠고.’
* * *
데모니움을 떠나고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통신구를 이용해 로빈에게 전황에 관해 물어보니, 아직 전선이 옮겨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확실히 푸르카스도 여기서 전력을 다할 생각은 없었겠지.
사실상 가짜 전쟁.
림보 영지는 일방적으로 인간들에게 당했다.
사망자는 하급 마물이나 언데드들.
언제든지 보충이 가능한 인원들이기에 인간 진영에서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저 제대로 된 적수가 언제 나타날지. 그 부분에만 이목을 집중했다.
“나 왔다!”
나는 거대한 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도착한 곳은 데모니움 본성도, 바신이 사는 스티지아 본성도 아니다.
바로 우리의 든든한 까마귀가 있는 에레보스 본성.
내가 문을 열면서 들어오자, 마침 점심을 먹던 말파스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루카 공! 살아 있으셨구려!”
“당연하지. 내가 죽기를 바란 거야?”
“허허허,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고생이 많았을 텐데 먼저 식사라도 하시구려.”
내가 테이블에 앉기 무섭게 빠른 속도로 테이블이 세팅되었다.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를 살핀 뒤, 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며 입을 열었다.
“쩝쩝, 대화는 잘됐어.”
“오오! 발라크는 뭐라고 하였소?”
“바신을 죽이래. 발라크도 대충 배신을 눈치채고 있더라고.”
“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말파스의 물음에 나는 모든 동작을 멈췄다.
끌어낼 방법이야 많이 널려있다. 그중에서 우리에게 무리가 오지 않을 방법을 골라냈다.
여기서 우리는 대종족 의회, 대동맹, 그리고 나다.
“같이 협력해서 인간들을 치자고 전해. 이참에 인간 녀석들의 기부터 죽여 놓자고 말하는 거지.”
“명분은 좋지만, 바신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어떡할 것이오?”
“올 수밖에 없지.”
당연히 올 수밖에 없다.
발작 버튼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하나씩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