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40화 (140/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40화>

140. 빅 쇼크 (4)

살을 에는 추위가 몸을 감돌았다.

괜히 얼음의 땅으로 불리는 게 아니란 걸 보여 주고 싶은 건지.

니플헤임 영지의 바람은 살갗을 통째로 드러낼 기세로 나를 옭아맸다.

‘어디 보자, 길이.’

조금 전까지 잘만 보였던 길이 사라졌다.

대략 12시간에 한 번씩. 니플헤임 영지에서는 주기적으로 서리 폭풍이 불며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이 시간이 되면 동물들은 물론이고 마족들도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오뎅 국물이 생각나는 날씨란 말이야.”

문득, 포장마차에서 사 먹던 꼬치 어묵이 떠올랐다.

이미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한 탓에 뼈가 사무치도록 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기가 주변을 감도니 겨울 음식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희도 그렇지?”

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정면을 향해서 말을 걸었다.

대답은 없다. 정체를 들킨 탓에 당황하는 감정이 느껴질 뿐.

콰과과!

피부를 찌르는 살기와 함께, 갑자기 발밑에서 커다란 물체가 솟구쳤다.

겹겹이 쌓인 눈을 뚫고 나온 구형의 물체.

그것은 맹렬히 회전하며 높이 떠올랐다가 다시 지면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림자 검술 2번, [환영 활보]

콰앙!

공 모양의 물체가 떨어진 곳에는 이미 내가 없었다.

몇 개의 환영을 덮친 녀석은 다시금 몸을 회전시켰다.

설원에 사는 아르마딜로도 있나? 나는 녀석이 움직이기 전에 칼등으로 놈의 신체를 후려쳤다.

“꾸억!”

살가죽이 출렁거리며 커다란 공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아주 단단한 갑주로 몸을 보호했음에도 고통이 상당해 보였다.

다만 단순히 완력만을 사용했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다 나와. 굳이 시간 끌 생각은 하지도 말고.”

쿵.

나의 선언과 함께 위로 쳐올린 생물이 설원에 추락했다.

거북이 등껍질을 입은 쥐.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크기는 6m도 넘었고 어지간한 오러탄으로도 뚫지 못할 만큼 등가죽이 두꺼웠다.

‘고위 마족 정도는 되겠는데.’

이런 녀석과 엇비슷한 개체가 5마리, 상급에 맞먹는 개체가 20마리.

이만한 전력이면 어지간한 요새도 단숨에 점령할 터.

나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크르르.

하얀색 늑대.

크기는 지구의 설원 늑대와 같다.

대신에 이빨과 발톱에 맺힌 진득한 맹족이 인상적이었다.

총 다섯 마리로 구성된 늑대 무리가 나를 포위하며 동시에 공격을 강행했다.

‘속도도 빠르고.’

구성원은 상급, 대장격은 고위 마족에 버금간다.

괜히 발라크가 푸르카스의 대항마로 꼽히는 건 아니네.

나는 마기를 방출하며 포위진의 틈을 뚫고 포탄처럼 튀어 나갔다.

투웅!

굳이 검을 휘두를 필요를 못 느꼈다.

이 마수들을 다루는 자의 위치를 찾았고, 당장에라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흡! 앞에서 황급히 몸을 피하는 소리가 들렸다.

“늦었어.”

파앙!

재차 허공을 발로 차고 손을 뻗었다.

새하얀 배경이 뒤로 밀려나며 손아귀에 무엇인가가 잡혔다.

머리카락. 나는 그것을 꽉 쥐고서 지면에 착지했다.

“끄아악!”

싫으면 대머리로 살던가.

나는 마수조련사의 머리채를 잡고서 위로 들어 올렸다.

악마,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의 수준은 꽤 높았다.

“마수들을 물려.”

“니플헤임에서 림보의 언어를 쓰다니. 무례하다!”

손아귀에 잡힌 악마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아니, [림보 어]를 사용하는 게 머리카락을 잡은 것보다 모욕적인가.

토끼녀에게 배운 [인마 어]는 이제 A등급.

나는 원어민 뺨치는 수준의 [인마 어]를 구사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니플헤임에 왔으면 여기의 법도에 따라야지.”

“흥! 침입자. 여기는 대악마 발라크 님의 영역이다. 목숨이 아깝다면 이만 돌아가라.”

잡았던 머리카락을 놓으며 풀어주자, 악마는 불쾌한 감정을 내비쳤다.

저 표정과 말은 이곳에서 정말 지긋지긋하게 경험했단 말이지.

“그 말 벌써 다섯 번째야.”

지금까지 죽인 마족이나 마물, 마수는 없었지만.

나는 니플헤임에 들어오면서 수많은 저항을 겪었다.

그중에는 악마도 3명이 있었다.

‘어쩐지 내가 림보 어를 사용해서 죽이려 들었구나.’

푸르카스가 그렇게 싫은 탓인지는 몰라도.

본인들도 [림보 어]를 배웠으면서 굳이 사용하지 말라는 건 뭐란 말인가.

나는 그런 잡생각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 넣어버리고 밝게 웃었다.

“너희 입장은 잘 알겠는데. 급하니까, 발라크가 어디 있는지나 말해줘.”

“주군께서는 아무나 만나지 않으신다.”

“내가 데모니움 영지에서 온 대종족 의회의 대표인데도?”

“미리 면담을 신청해라.”

“아오! 그 말도 다섯 번은 더 들었어! 면담을 신청해도 만나 주는 건 본인 마음이라며.”

“그렇다.”

이것 봐, 조금 친절한 것만 빼면 앞에서 물어봤던 놈들과 대답이 똑같네.

여기 놈들은 자신이 졌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충성심이 대단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발라크를 배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표식.’

악마들의 신체에는 전부 그런 흑마법이 걸려 있었다.

이쯤 되면 바신이 어떻게 발라크의 명을 어기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

나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이름이 뭐지?”

“번영의 악마. 오키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발라크 님이 계신 위치라면 절대 말할 수…….”

“그건 지겹게 들었으니 됐고.”

발라크는 영지에 누가 들어오는 걸 싫어한다.

허락도 없이 누군가가 들어오면 죽이거나 쫓아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들었다.

만약에 영지 내에서 그를 만났다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던가.

말파스는 그런 말을 하면서 나를 말렸다.

“악마를 설원에 오래 방치되면 어떻게 되지?”

“뭘 그런 걸 묻는 거지. 단순히 추위만…….”

퍽.

무명의 칼등이 오키라의 목덜미를 쳤다.

상대의 몸이 허물어지며 그대로 설원에 쓰러졌다.

안 죽는다니 다행이네.

쿠워어어!

오키라가 거느리던 마수들의 포효.

나는 몸을 돌려서 달려오는 마수들에게 흉악한 마기를 보여 주었다.

“그만.”

끼이잉.

내 한 마디에 마수들이 꼬리를 말고 물러섰다.

악마들과는 달리, 그 밑의 놈들은 표식이 없기에 대놓고 기운을 뿌리면 바로 물러섰다.

문제라면 얘네들은 발라크의 위치를 모른다는 거지.

‘에휴. 여기는 다른 영지처럼 거대한 성도 없고. 이게 무슨 짓이야.’

니플헤임은 얼음의 땅이다.

건축물이라고 해 봤자 전부 이글루 같은 것들이고, 대부분은 얼음 동굴을 파고 들어가서 생활한다.

푸르카스에 대항할 세력이라면서 생활 수준은 원시인 수준에 불과하다니.

저벅, 저벅.

나는 부단히 다리를 움직이며 길을 걸었다.

기감을 펼쳐서 상대를 찾으려고 해도 그게 쉽지는 않았다.

발라크는 마기로만 따지면 나와 비슷한 실력이니까.

‘일부러 만남을 회피하고 있는 이유가 뭐지.’

숨길수록 궁금증만 커지는 법.

처음에는 그냥 니플헤임으로 쳐들어가서 바신 살해 허가권을 받아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있을수록 의문이 깊어졌다.

무슨 방구석 히키코모리도 아니고, 왜 이렇게 접촉을 피하는 건지.

그 순간.

내 마기와 맞먹는.

아니, 그보다 더 지독한 파괴의 기운이 몸을 파고들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용!’

하늘 위에서 고고하게 이쪽으로 향하는 생물체.

날개를 펼친 물체의 크기는 작은 요새에 버금갈 정도로 거대했다.

일전에 보았던 라그나보다도 더 큰 몸집, 게다가 더 충격적인 건 세부적인 생김새였다.

누더기?

나는 천천히 활공하는 물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몇 분.

정체불명의 드래곤이 내 정수리 위를 돌아다닌 시간이었다.

상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드래곤의 정체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누더기 드래곤.

초보자가 만든 봉제 인형처럼, 저 물체는 드래곤의 시체를 잘라서 얼기설기 붙여서 만들었다.

드래곤은 차원 대전쟁 시절에 모두 멸족해 버렸으니.

‘저건 발라크의 키메라겠지.’

부착된 머리가 3개.

몸 안에 내장된 드래곤 하트는 4개였다.

라그나와 필적하는 심장을 주축으로 나머지 심장이 보조 동력원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저게 등장했다는 건 발라크도 나를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일 터.

찌릿.

갑자기 드래곤으로부터 살기가 날아와 꽂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압축 주머니가 격하게 흔들리며 입구가 마음대로 흔들렸다.

이게 왜 이러지. 나는 마기를 펼쳐 외부에서 내 행동을 지켜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압축 주머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물건을 꺼냈다.

파멸의 송곳니.

나는 기막을 거두고 대검을 누더기 드래곤에게 보이도록 높이 들었다.

우우웅, 분명히 저 드래곤과 공명하고 있다.

예전에 읽어본 설정에 의하면, 대검의 재료는 대전쟁 이전에 존재했다던 ‘파멸용’의 송곳니다.

‘전투 도중에 떨어진 이빨을 주워서 만들었다고 했어. 그렇다면 저건 파멸용의 육신인가?’

송곳니만 해도 전설급 무기에서 상위를 다투는데.

그 주인의 육체로 만든 키메라는 과연 얼마나 강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설원에 파멸의 송곳니를 꽂는 순간.

드드드드.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기파가 느껴졌다.

단순히 누더기 드래곤이 입을 벌려 낸 소리에 차원벽이 진동한 것이다.

슈우우. 이어서 주변의 기운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드래곤 브레스.

나는 숨 막혔던 과거를 회상하며 무명을 뽑아 들었다.

상대는 라그나보다 강하다. 하지만 저번처럼 도망만 다녀야 할까?

몇 년 전과는 다르게 나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이곳까지 왔다.

그림자 검술 7번, [개기일식]

시꺼먼 기운이 빠른 속도로 무명의 칼날을 휘감았다.

텔런트 스킬이 S등급으로 올라서며 기술을 펼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파멸적인 기운에는 파괴의 힘을 담은 기운으로.

오직 마기만으로 빚어낸 [개기일식]이 은은한 빛을 자아내며 무명에 깃들었다.

‘이런 환영 인사를 좋아하나 본데.’

투웅!

기운을 다리에 집중해 발을 구르자 신형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3개의 용 대가리. 누더기 드래곤은 나를 정조준하고 입을 벌렸다.

불꽃이 보였다. 세상을 태워 버릴 강대한 힘이 세 개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푸화아아악!

방사된 화염을 향해 무명을 들이밀었다.

세 갈래의 불길이 와류를 만들자, 그걸 빨아들이는 무명의 칼자루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크윽, 나는 입에서 작은 신음을 내며 모조리 먹어치웠다.

‘이대로 두면 위험하겠는데.’

[개기일식]은 잘 버텨 내지만, 무명이 버텨 내지 못한다.

하는 수 없이 무명에 깃든 화염을 혈마력으로 조금씩 갉아먹었다.

드래곤은 마나를 지배한다는 종족. 저들이 뿜어낸 화염은 드래곤 하트의 영향을 받은 진득한 마나였다.

“뭐, 뭐야 이건!”

나는 육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오러 수치가 빠르게 차오른다. 초당 거의 4점씩 가파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덧 드래곤이 내뿜던 화염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개기일식]에 압축된 기운을 토해 낼 차례.

하지만 나는 최대한 기운을 붙들고 꾹 참아냈다.

‘달아, 너무 달아!’

10초만 버텨도 40점. 20초면 80점이 오른다.

오러는 한동안 수련하지 못한 탓에 거의 정체되어 있었다.

‘자린고비의 은총’도 경지가 올라가며 무용지물이 되었고, 지금은 그저 여분의 오러 저장고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생체 영약을 발견하다니.

덜그럭, 덜그럭.

나는 지면으로 내려와 손에 든 무명을 살폈다.

아직은 조금 더 버틸 수 있다. 그렇다면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기운을 받아들여야지.

내가 묵묵히 자기 발전에 힘쓰고 있는 동안, 발라크를 태운 누더기 드래곤도 설원 한복판에 자리를 잡았다.

쿠우웅.

드래곤이 몸을 안착하자 주변의 눈이 녹아내렸다.

드래곤 하트가 뿜어내는 강한 열기에 니플헤임의 지랄 맞은 날씨조차 한 수 접어 줄 정도였다.

항상 저런 상태로 열을 내고 다니는 건가.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이기도.

- 침입자여. 그 무기는 무엇인가.

드래곤의 허리 위.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발라크가 대뜸 말을 걸었다.

심지어 그 주제는 내가 아니라 옆에 있던 파멸의 송곳니.

이래서는 안 된다. 관심은 나에게 줘야지?

지잉.

마침 무명에 한계가 왔다.

여태까지 버티며 얻은 오러는 129점.

나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말았다. 허리를 회전시키며 빙그르르 회전하자 무명에서 새빨간 기운이 맺혔다.

직후, 무명에 깃들어 있던 오러가 폭발하듯 튀어 나갔다.

‘원래 주고받는 게 있어야 사이가 친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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