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39화>
139. 빅 쇼크 (3)
인페르노 영지.
불그스름한 색을 띠는 토지와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
과거에 플라우로스가 지배했던 이 불의 땅은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판게아 대동맹, 다른 하나는 림보 영지였다.
“오늘은 산맥에 척후병도 보이질 않네.”
총을 든 보초가 정면의 산봉우리로 망원경을 드리우며 중얼거렸다.
림보의 세력과 맞닿은 최전선. 한때는 플라우로스 영지의 중심이었던 이 지역은 기다란 전선이 형성되었다.
마족들이 거주했던 성은 요새가 되었고, 성벽 위에는 인간들의 무기가 놓였다.
“정말로. 쥐새끼 하나도 돌아다니지를 않네.”
중기관총 포대에 서 있던 다른 병사도 똑같은 말을 했다.
두 진영은 사이좋게 인페르노를 먹어치운 이후부터, 큰 충돌 없이 서로의 영역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이상하다.
평소에 요새에 다가오던 척후병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적이 완전히 사라진 듯,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의도한 것처럼 보였다.
보초병은 성벽 위에서 나부끼는 깃발을 올려다보았다.
펄럭, 펄럭.
정면에서 불어오는 돌개바람.
그것에 의해서 무역 연합의 깃발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보초병의 어깨를 싸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심상치 않다.
보초병은 무역 연합에서 나름대로 인정받는 베테랑이었다.
연공법을 익혀 신체 능력도 평범한 인간과 궤를 달리하는 수준.
전장에서 구른 시간을 생각하면 고작 보초를 설 짬밥이 아니었다.
철컥.
그가 먼저 소총의 약실을 확인했다.
주변의 동료들도 이상함을 감지하고 각자 전투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위협은 가장 조용한 순간에 찾아오는 법.
성벽에 올라와 있는 정에 병사들은 모두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탄약통부터 옮겨!”
갑자기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적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나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미세하지만 서서히 땅의 울림이 느껴졌으며, 주변을 돌아다니던 작은 동물들도 모습을 감췄으니.
“성벽에는 최소 인원만 남고 모두 내려와서 거들어라!”
“시발, 하필이면 우리가 전방에 있을 때 쳐들어오고 지랄이야.”
“잔소리 말고 줄지어서!”
병사들은 꿍얼거리면서도 신속하게 성벽으로 향하는 줄을 만들었다.
탄약고부터 길게 이어진 줄로 포탄과 기관총용 탄약이 가장 먼저 옮겨졌다.
뒤이어 요새에 설치된 종이 울렸다.
뎅뎅뎅뎅!
종이 울림과 동시에 요새의 사령관이 소집령을 내렸다.
록펠스 PMC의 사장이자, 현재는 임시로 무역 연합의 군인이 된 자.
페도르가 회의실에 모인 일선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우리는 이 요새를 지킨다.”
“질문이 있습니다!”
“뭔가?”
페도르의 지시에 지휘관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항명이라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겠지만,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갈 겁쟁이는 없었다.
일어난 지휘관은 군기가 잡힌 목소리로 말했다.
“전면전입니까?”
공격은 이 요새만 당한 건지.
적의 의도는 어떻고, 지원은 언제쯤 올 수 있을지.
여러 질문이 함축되어 페도르의 앞에 놓였다.
“모른다. 하지만 악마급 이상의 전력은 발견되지 않았다. 우선 우리는 다른 요새들처럼 맡은 자리를 지킨다!”
페도르의 일갈과 함께 요새는 신속히 적을 맞을 준비를 끝냈다.
요새의 정면에 드리운 산맥. 마족들과 인간은 플라우로스 영지를 관통하는 산맥을 두고 경계를 만들었다.
대략 몇 분이 흐르자, 산맥 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광경이 포착되었다.
“10시! 산등성이 위!”
“12시! 봉우리!”
“2시와 3시 쪽에도 적들 다수 출현!”
커다란 망원경을 통해 적을 파악한 관측병들이 앞다투어 외쳤다.
일선의 지휘관들은 빠르게 적의 좌표를 적었고, 요새에 설치된 통신기를 통해 좌표를 날렸다.
펑! 퍼퍼펑!
곧이어 후방의 작전 기지에서 포성이 울렸다.
미리 지정된 좌표로 조준해 놓았던 야포가 일제히 불을 뿜은 것이었다.
쿵, 쿠구궁. 멈추지 않는 대포와 점점 다가오는 마족.
병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긴장감을 풀며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전에는 발포하지 않는다!”
전투가 다가온다.
병사들은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몇몇은 여전히 농담을 주고받으며 떠드는 이들도 있었다.
“근데 저놈들은 왜 기습을 안 하냐?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냐.”
“얼씨구. 대놓고 공격하는 게 불만이면 아예 목도 내놓든가.”
“이놈이 만만해서 그런가 보지.”
병사들은 긴장감을 풀며 말장난을 쳤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포격 지원을 뚫고 산맥을 내려온 마족군.
림보 영지의 병력이 결국 요새 앞까지 당도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은 언데드, 하급에 속하는 스켈레톤이 주류였고 중급으로 분류되는 구울이 조금 섞였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
페도르는 높은 곳에서 요새 아래를 살폈다.
대부분 금세 손실을 채워 넣을 수 있는 언데드로 구성되어 있다.
전장에 보이는 지휘관도 소수의 상급이 전부.
적의 장군급이라고 볼 수 있는 고위 마족은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과연 이걸 전쟁이라고 할 수나 있나.
“모르겠군.”
페도르는 이 기이한 전황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 * *
“공격이 모든 요새에 집중되어 혼란스럽지만, 딱히 위험한 곳은 없네.”
로빈 공작의 목소리가 침착하다.
통신구 너머에서 들리는 다른 소음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쫄보 영감이 겁을 집어먹지 않았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
“일단은 알겠습니다. 만약 상황이 급해지면 연락해 주세요.”
“알겠네. 아! 누님이 부르시는군. 이만 끊겠네. 아, 악! 죄송합니다. 여왕 폐하. 악!”
뚝.
뭐야, 이 양반은 아직도 맞고 사나.
폐하란 호칭은 도저히 입에 감기지 않는 건지. 로빈은 항상 저런 식으로 매를 벌고는 했다.
집안 사정이야 내 알 바는 아니고.
“그보다 전쟁인데 안정적이라고?”
이건 확실히 이상한데.
나는 통신구를 압축 주머니에 집어넣고 턱을 쓰다듬었다.
기본적으로 뇌에 우동이 찬 게 아니라면, 초전에 적의 기세를 확 눌러놔야 한다고 생각할 터.
그런데 푸르카스는 일부러 만만한 전력을 갖다 박았다.
이게 뭘 뜻하는 걸까.
여러 경우의 수가 있다.
정말로 우동 사리가 있는 경우도 충분히 염두해 볼 수 있다.
물론, 굉장히 낮은 확률이겠지만.
“그럼, 나를 노리는 건가.”
동맹을 분열시키겠다는 푸르카스의 계략은 그리 잘 통하지 않았다.
나는 동맹에 아직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히려 푸르카스의 첩자로 의심되는 바신을 찍어 낼 작전을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대강 이해가 간다.
‘내가 인간들의 편에 서라고 압박하는 건가.’
플라우로스와 인간.
나는 이 전쟁에서 인페르노의 주인을 죽이고 푸르카스의 악마까지 몰아냈다.
만약 다시 대악마와 판게아 대동맹이 전쟁을 벌인다면?
잠자코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뭐가 되었든 행동을 취해라.
푸르카스는 함정을 깔았다.
심지어 나는 뻔히 그 사실을 알아도 어떤 방식으로든 발을 들이밀어야 한다.
인간들을 돕지 않는다면, 대동맹 내부에서 반발이 아주 클 테니까.
“너는 왜 왔냐. 똥 덩어리.”
“퇴비로 먹고사는 식물 주제에 개념이 너무 없네요.”
집무실 밖에서 두 인기척이 느껴졌다.
둘은 옥신각신 말을 주고받으며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쾅! 그리고 황급히 문을 닫았다.
“너희 보고 정리하라고 부른 거 아니니까, 안심하고 들어와.”
서류로 난장판이 된 집무실.
토끼녀는 그걸 보고 본능적으로 도망을 택해 버렸다.
이래서 눈치 빠른 소동물은 싫다니까.
“히히, 장난이었어요. 장난.”
“근데 여기는 왜 이렇게 됐대요?”
“설명할 시간은 없고. 세계수, 너는 당장 데모니움으로 돌아가. 엘프들 전부 끌고서.”
“예? 공사하던 도시는요.”
“일단 멈추고.”
세계수는 불만을 품으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데모니움에 남아있는 엘프들에게서 정보를 얻었을 터.
유리엘은 곧바로 방을 빼져 나갔고, 이제 여기에는 나와 토끼녀만 남았다.
“후후, 쫓겨날 팔자면서 왜 라이벌 의식을 가지려고 하는지. 그렇죠?”
“그러게 말이야. 아, 너는 왜 불렀냐면.”
내 손가락이 서서히 집무실 바닥을 가리켰다.
“이거 정리해 놔. 원래 있던 대로 탁자 위에 순서대로 잘 정리해서.”
“…….”
“그렇게 알고, 나는 에레보스 영지에 좀 다녀올게.”
“거기는 왜요?”
“푸르카스는 내가 움직이기를 바라니까. 그놈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여 줘야지.”
나는 방을 나서며 슬쩍 뒤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언제 불렀는지 강아지남이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정리하는 풍경이 보였다.
불쌍한 녀석. 나는 고개를 저으며 데모니움 본성을 벗어났다.
* * *
높이 솟아오른 산봉우리.
그 위에 지어진 성에서 말파스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바신은 배신했다. 최소한 선을 넘으며 희롱하며 가지고 놀았다.
“개 같은 새끼들!”
콰아아앙!
주위에 있던 사물이 깨지고 날아갔다.
순식간에 그가 서 있던 공간이 난장판이 되었지만, 말파스는 그것만으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내가 그렇게도 만만해 보였더냐!”
바신.
말파스는 부리를 떨면서 철천지원수의 이름을 뇌까렸다.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까마귀는 마구잡이로 기운을 발산하며 돌아다녔다.
본성에서 기거하던 그의 부하들은 도망 다니며 대악마의 분노를 피해야만 했다.
그것도 며칠 동안.
물론, 말파스의 분노는 합당했다.
몰래 첩자를 파견한 니플헤임 영지는 아주 조용했다.
반 푸르카스 동맹은커녕, 푸르카스와 싸울 의지가 없음을 내비치는 것처럼 보일 만큼.
게다가 바신도 자신의 영지에 눌러앉아 이래저래 놀기 바빴다.
“크아아아!”
다시금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가 날개를 휘두르자 공간에 존재하던 마기가 모여들었다.
또 한바탕 난리가 나려던 순간.
“추하게 왜 그러고 있냐?”
홀로 있던 공간에 나타난 존재.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에 말파스는 울컥 짜증이 밀려 올라왔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루카 공.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이게 무슨 무례요?”
“주인이 성을 부수기 전에 멈춰 줬으면 무례의 대가는 치렀다고 해 두지 않을래?”
“흠흠. 기척도 숨기고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하시오.”
상대의 기세가 예전보다 더 날카롭다.
과거에 그의 공격을 막았을 때는 상대도 제법 고전하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작정하고 기척을 숨기니 코앞에 올 때까지 전혀 몰랐다.
말파스는 급한 대로 자세와 깃털을 정리하고 답변을 기다렸다.
“화나는 건 이해해. 그래도 생산적으로 행동해야지.”
“그게 이곳으로 온 이유요?”
“안부도 전할 겸. 그리고 가는 길도 빌릴 겸. 무엇보다 생각을 듣고 싶어서.”
뭔 이유가 그렇게도 많은지.
말파스는 검은 눈동자를 좁히며 말했다.
“단순히 의중을 떠보려는 건 아닐 테고.”
“그렇지. 바신을 치자고 말할 생각이었어.”
“흐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오. 무엇보다 바신의 뒤에는…….”
“발라크가 있다고?”
말파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라크, 그자는 푸르카스와 함께 가장 강한 대악마로 꼽힌다.
더 무서운 건 그들이 살아온 세월.
다른 생명이나 종족보다 오래 살 뿐. 대악마도 생명체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
그러나 두 대악마는 생명체의 기본 상식조차 넘어선 지 오래였다.
“말하고 싶은 건. 개새끼를 죽이고 싶어도 주인이 있어서 안 된다는 거네.”
상대는 히죽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설마? 말파스는 필사적으로 날개를 파닥거리며 부리를 열었다.
“귀공이 잘 모르는 것처럼 보여서 하는 말이오. 니플헤임으로 갈 생각은 하지 마시오!”
“어째서? 허락을 안 맡으면 죽이기라도 해서?”
“맞소이다! 발라크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오. 나도 그래서 직접 대면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오!”
바신을 견제할 동맹이 죽어서는 안 된다.
말파스는 위험한 생각을 하는 루카를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러나 눈앞의 인마족은 오히려 눈을 빛냈다.
“발라크가 나를 죽일 수 없다면. 그냥 가도 되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