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38화>
138. 빅 쇼크 (2)
모든 폭로가 끝난 직후.
클리프는 폰허부와 이야기를 해 보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녀석의 표정도 처음과는 다르게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진심은 통한 것 같은데.’
오로지 진심으로 저 둘을 대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결론적으로 둘에게는 이로운 일이었지만, 역시 실에 묶인 인형처럼 움직이는 삶은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떤 행동을 보일지. 그게 무서워서 말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루카.”
생각을 정리하던 나에게 말을 거는 한 사람.
나는 시선을 움직여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를 보았다.
스칼렛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진실을 전부 들었음에도 아직 할 이야기가 남은 건가.
“아니, 김만득이라고 불러야 할까?”
“편한 대로 불러줘도 좋아.”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몰라서……. 실은 나 알고 있었어.”
“뭐를?”
“네가 루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스칼렛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던지라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정확히는. 네가 뭔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어. 근데 아예 다른 사람일 줄은 몰랐어.”
“그랬구나. 나도 이 몸에 들어오고 많이 당황하긴 했어.”
“응, 아마 힘들었을 거야.”
스칼렛은 애써서 미소를 보였다.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구나.
떠올려 보면 나는 스칼렛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단순히 게임의 정보가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가끔 의외라고 놀라기는 했으니까.’
마음을 숨기고 늘 천진난만하게 사람들을 대한다.
그 설정의 그늘에 가려진 스칼렛이라는 인물이 지닌 고뇌를 등한시했다.
조금 더 인간적으로 다가갔다면 어땠을까.
이런 고민이 저절로 내 곁을 둥실둥실 떠다녔다.
“어떻게 부르든 이상하긴 매한가지니까.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불러. 그게 가장 나을 거야.”
“으응. 역시 그렇게 하는 게 좋겠지? 나 고민해 봤는데. 잘은 몰라도 내 마음이 어떤지는 알겠어.”
입술의 수분기가 확 사라졌다.
스칼렛과 클리프는 어느 순간에나 항상 나의 편이었다. 그건 그들이 나를 친구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진실을 알고 난 뒤에도 나를 선택할까.
가장 걱정하던 순간이 지금 바짝 다가온 셈이리라.
“나의 꿈은 하나였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그걸 이뤄 준 사람은 너야.”
스칼렛의 말끝에서 신뢰가 묻어나왔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정말로 기뻤다.
여기서 냉큼 저 믿음을 손에 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판게아에서 초월자는 절대적이다.
거의 모든 지역에 신을 모시는 종교 집단이 있고, 그들은 맹목적으로 초월자를 숭배한다.
이런 상황에서 쉽게 초월자의 믿음을 저버릴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나는 그 불가능을 뒤집기 위해 나에 대한 믿음을 희생하며 이 둘에게 초월자의 민낯을 까발렸다.
그런데 저렇게 믿음을 쉽게 줘 버리다니.
“스칼렛. 나는 너희를 속였어. 언제나 나를 위해서 이용했다고.”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한 일이기도 하잖아? 나는 널 원망하지 않아. 오히려 고마워.”
“그런 식이라면 다른 초월자들…….”
“아니! 그 초월자란 사람들은 내 소원을 이뤄 주지 않았어. 어차피 모두를 의심해야 한다면. 그나마 믿음이 가는 사람은 하나라고!”
스칼렛은 평소와는 다르게 고성까지 질러댔다.
이렇게 고집이 센 애인지는 몰랐는데 말이야.
게다가 더 놀라운 건 스칼렛의 말에 담긴 의미였다.
초월자는 믿지 않아도 나는 믿겠다는 말이 아닌가?
‘고맙기는 하네.’
스칼렛은 성을 내며 나를 몰아붙였다.
“루카, 너는 정말로 나를 이용 대상으로만 생각한 거 같아? 아니야! 너는 내 처지를 공감해 주고 나를 응원해 줬잖아.”
그야, 판게아에 빠져든 이유이기도 하니까.
기본적으로 스칼렛과 클리프는 나에게 친숙했다.
애당초 두 주인공의 감정과 처지에 공감하지 않았다면 판게아로 끌려오지도 못했겠지.
“그래서 나를 믿겠다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그걸 증명해 볼게. 너의 목표는 마신의 근원을 손에 얻는 거잖아. 그다음 목표는 뭔데?”
“……몰라.”
딱히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근원을 손에 얻으면 초월자들에게서 안전해질 터.
일단 모든 위협에서 안전해진 다음, 최종적인 목표는 내가 살던 지구로 돌아가는 거다.
그게 잘될지는 미지수지만.
“봐봐, 너는 너를 잘 몰라.”
스칼렛은 코에서 콧김을 훅 불었다.
저건 자신감이 하늘을 뚫어버렸을 때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다.
“세계를 지배한다거나 하는 거대한 야욕이 있는 게 아니잖아.”
“평범한 사람은 그런 생각은 안 하지. 어렸을 때나 망상으로나마 할 수는 있어도.”
“그러니까! 내가 왜 직접 만나보지도 못한 초월자를 믿어야 해? 나는 내 눈을 믿어. 내가 선택한 사람은 너야!”
“스칼렛……. 너 얼굴이 빨개졌어. 그리고.”
조금 오글거려.
굳이 뒷말을 밖으로 꺼내는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런 나를 대신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스칼렛에게 쏘아졌다.
“둘이서 무슨 연극이라도 하는 거냐. 엄청나게 오글거려.”
은발의 사내가 비정하게 던진 비수였다.
좋아, 그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어.
나는 그의 일침에 침묵으로 동조하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클리프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우리 앞에 섰다.
“나는 앞으로 너를 루카라고 부를 거야. 내 친구는……. 지금은 고민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해.”
“클리프, 그 말은 너도 김만……. 루…….”
“그냥 루카라고 말해! 너는 이 사람을 믿겠다면서 호칭 하나도 정리를 못 하냐.”
“그치만. 좀 어색한걸.”
둘은 티격태격 싸우다가 동시에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당황스럽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생고생을 해야 하는 건지.
‘개새끼, 너는 당분간 업무량 2배 이벤트다.’
일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시켜야지.
“어쨌든, 모두 나를 믿어 주겠다고 해 줘서 고마워.”
나는 둘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클리프는 그런 나를 보며 살인적인 미소를 보냈다.
“아닌데. 너 여태까지 날 이용했잖아. 그것도 아주 악랄하게. 난 그걸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음, 애는 갑자기 지능이 상승했네.
옆에서는 스칼렛이 루카가 2명이 된 것 같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제는 평범한 국밥이가 아니다. 다른 의미로 각성한 국밥이가 되었다.
클리프는 갑자기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도 일단 너를 믿어볼게. 너는 피해자야. 물론, 나에게는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루카의 죽음이 헛되게 하지 말아 줘.”
나는 클리프의 손을 잡아 확 잡아끌었다.
옆에서 조용히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스칼렛이 친구의 죽음이 불러온 눈물을 간신히 참고 있다가 터진 것이었다.
그녀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우리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좋아, 이기자!”
작은 손이 우리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우리의 도원결의가 끝나려던 무렵.
스칼렛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문장을 던졌다.
“그래서 누가 적이야?”
“어?”
국밥이도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나는 허무함을 느끼며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아니, 세계수랑 관리자가 있잖아. 누가 적이야?”
“그건……. 모르는 거지! 아직 루카가 모은 정보가 부족하잖아. 전부일 수도 있고. 어느 하나일 수도 있고.”
“아아, 그렇구나.”
저건 분명 폰허부가 대신 말해 준 게 분명하다.
뭐, 따지고 보면 스칼렛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전부 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둘의 관계를 생각하면 어떻게 될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모두 정보가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
세계수와 관리자에 대한 정보는 둘이 대화를 나누며 흘린 것들이 전부다.
그마저도 둘이 야합을 통해 일정 수준 이상의 정보는 풀지 않았다.
마신의 근원을 차지할 순간이 다가온다면 모를까.
“참!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
순간 클리프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토끼녀와 유리엘의 정체도 알았으니,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는 건 당연하다.
아니, 두 녀석은 오히려 인지하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몰라. 프레스턴 단장님에게도 말했는데. 죽었다는 소식은 없으니까.”
“그 말이 왜 이렇게 무섭게 들리냐. 생각해 보니까, 시리엘은 어떡하지?”
세계수와 관련이 없던 스칼렛과 다르게.
우리의 국밥이는 머리를 싸매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게 친구를 잘 사귀었어야지.
* * *
며칠 뒤.
데모니움 영지는 오늘도 평온한 아침을 맞이했다.
유리엘은 여전히 영지 동부를 갈아엎고 있었고, 토끼녀는 어쩐지 몰라도 많은 업무를 소화하느라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다.
‘얘네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가 없네.’
너무 조용해서 탈이다.
마치 곧 엄청난 폭풍이라도 불어올 것처럼 말이다.
물론, 머지않아 어떤 식으로든 분쟁이 시작되기는 할 테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건 없지.”
끼릭.
나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완전히 기댔다.
하루 전에 토끼녀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말파스는 정보 수집을 중단하고 본성에 틀어박혔다는 모양이다.
바신이 본인을 또다시 농락했고, 발라크에게도 거짓을 고하고 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머리가 복잡할 터.
“갑자기 미친놈처럼 날뛰면서 저 문을 열고 들어오지만 않으면 다행…….”
달칵.
내가 손으로 문을 가리키자 그 반대편에 있던 창문이 열렸다.
집무실이 높은 첨탑에 있었기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책상에 놓여있던 서류가 날리며 방안을 헤집었다.
100장은 족히 넘는 종이. 심지어 순서에 맞게 정돈된 서류 뭉치가 바닥으로 난잡하게 떨어졌다.
“앗.”
거대한 크기의 펠리컨.
별이 그려진 모자를 쓴 루카스가 본인이 만든 참극을 보며 부리를 열었다.
다가오고 있는 건 알았지만, 설마 창문을 열고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는 반드시 문을 열고 들어오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제가 전부 주워서 정리하겠습니다.”
“손도 없으면서 어떻게?”
“부리로 쪼아서…….”
루카스의 아래 부리가 그물처럼 넓게 벌어졌다.
저걸로 어떻게든 서류를 주워보겠다는 말인데.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냥 방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나중에 토끼녀를 불러서 치우게 하면 되니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거대한 새가 창문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어째 그동안 몸집이 더욱 커진 느낌, 나는 단순히 저들에게 연공법을 알려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연공법을 배운 가람족이 모두 30~50% 정도 부피가 커져 버렸다.
“혹시 키가 어떻게 돼?”
“이제 3m는 훌쩍 넘습니다. 원래 저희 선조분들은 크기가 크셨습니다만, 노예가 되면서 저희의 덩치가 작아진 겁니다.”
루카스의 눈에서 마족을 향한 증오가 뿜어져 나왔다.
내 집무실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놈이 갑자기 성을 내네?
나는 눈을 작게 뜨며 루카스를 째려보았다.
“그러니까, 꼭 문을 통해서 들어와.”
“며, 명심하겠습니다.”
“알겠어. 이제 보고해 봐.”
“넵!”
루카스의 최우선 임무는 국경 정찰.
특히 요즘에는 인페르노 영지를 중심으로 인간들과 푸르카스의 국경을 감시하고 있었다.
바신이 인페르노를 통해 푸르카스와 연락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정찰부대가 수집한 정보를 부리를 움직여 풀어냈다.
“음.”
나는 여러 정보를 취합하며 머리를 굴렸다.
정찰 임무는 이제 막 시작한 터라 실무선에서 정보가 가공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결론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이거 미친놈이네?”
나는 루카스를 바라보며 쌍욕을 내뱉었다.
펠리컨이 순간 움찔거렸지만, 본인을 향한 말이 아니란 걸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습니까?”
“어? 아, 미안. 이만 나가봐! 서류는 치우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둬! 절대 건들지 마!”
나는 축객령을 내리며 루카스에게 신신당부했다.
푸르카스, 그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라크가 눈을 치켜뜨고 있는데, 이게 무슨 생각이지?’
루카스가 인사를 하고 나간 뒤.
나는 압축 주머니에서 통신구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