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37화>
137. 빅 쇼크 (1)
칼자루를 준 당사자.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존재의 정체가 클리프의 뇌리에 박혔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너라고?”
“어, 나야.”
클리프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인식을 못 했지만, 그 이상한 칼자루가 어디서 휙 튀어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빠르게 정황을 파악한 그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어떻게? 아니, 어째서?”
질문은 둘이었다.
칼자루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았으며, 그게 있는 위치는 어찌 알았는지.
그리고 검성을 자신의 몸에 쑤셔 넣은 이유는 무엇인지.
나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기운을 사방에 퍼트렸다.
“읏.”
순간 클리프가 몸을 움찔거렸으나 별일은 없었다.
내가 퍼트린 마기는 우리의 주변을 둘러쌌고, 외부와 완전히 공간을 단절시켜 버렸다.
이렇게 해 두면 어느 정도 괜찮겠지.
나는 작업을 끝내고 스칼렛에게 말했다.
“스칼렛. 괜찮아?”
“어? 응. 계속해도 좋아. 루카.”
충격을 받은 건 스칼렛도 똑같았다.
다만 반응이 클리프에 비해 무디다는 정도.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진실을 알았다기보다는, 확인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스칼렛, 여기서 더 설명하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저번에 했던 거 기억하지?”
“평의회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거라면. 무슨 뜻인지 알겠어.”
말로 표현하는 건 힘들다.
무엇보다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기억을 통째로 보여 주는 편이 낫다.
스칼렛은 눈에서 빛을 뿜어내며 내 정신을 파고들었다.
“기억은 내가 인도할게. 너는 클리프에게 전달만 해 주면 돼.”
“으응.”
샤아아아.
머릿속에서 파도 소리와 비슷한 게 들렸다.
우리 셋, 아니, 폰허부까지 총 넷의 정신이 모두 연결되었다.
그러자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부산스러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 네가 칼자루의 주인이었다니. 어서 소상히 말해 보거라! 이럴 수가, 여태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우선 그 부분부터 보여 드리죠.”
나는 폰허부의 조잘거림을 저지하며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경단장의 방, 잡동사니 속에서 칼자루를 찾아내는 나. 그리고 잠자고 있는 클리프의 모습까지.
모든 장면이 빠르게 넘어갔고 나를 제외한 셋은 침음성을 흘렸다.
“루카. 내가 알고 있는 너라면, 저 칼자루가 무엇인지 알았을 리가 없어.”
짧은 기억의 재생이 끝나자.
클리프는 더없이 차분하고 싸늘하게 말하며 나를 보았다.
나는 그 의견에 수긍하며 곧바로 다음 기억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걸 본다면.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알게 될 거야.”
다시 그들의 머리로 새로운 기억이 주입되었다.
그건 50번 개척지의 일도, 어릴 적 퍼스트 시티의 기억도 아니었다.
김만득의 생애. 그걸 아주 조금씩 잘라 내서 초등학교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를 이어 붙였다.
“여긴 어디지?”
“판게아가 아니야. 이런 곳은 처음 봐.”
- 살면서 처음 보는 곳이군.
저마다 나름의 감상평을 내놓았다.
어느 어린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부터 고등학교 졸업.
이어서 대학교를 나오고 회사에 취직하여 일하는 광경들이 쉬리릭 지나갔다.
30분 정도가 흐른 뒤.
그 남자가 어느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스칼렛과 클리프라는 두 주인공이, 여러 인연과 기연을 만나며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
익숙한 배경과 이름이 등장하니 모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만.”
나의 의지가 담긴 한 마디에 과거 회상이 멈췄다.
정체가 무엇인지. 이 정도만 보여 줘도 충분할 터.
굳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어도 셋은 나름대로 내 의도를 파악했다.
“김만득.”
클리프가 어눌하게 내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게 내 진짜 이름이야.”
“그럼, 루카는? 원래 내 친구는 어디 있지?”
잔뜩 얼굴을 찌푸린 클리프가 나를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나는 심장 부근에 손을 얹었다.
그러면서 둘의 안면을 살폈다. 클리프는 의아함을 내보였고 스칼렛은 복잡한 감정을 드러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흡수되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
처음 텔런트를 손에 얻었을 때.
나와 루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화를 하던 과거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판단은 저들의 몫. 내가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진실을 밝히는 것뿐이다.
루카가 사라지는 모습을 모두 본 스칼렛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면 50번 개척지 이후부터 루카는 루카가 아니었던 거야?”
“맞아.”
“정말로?”
“정말로.”
대답을 들은 스칼렛의 몸이 살짝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의 끈을 놓지 않고서 다음을 기다렸다.
아직 그들은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다. 그걸 두 사람은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클리프에게 준 편지.
세븐 시티의 친구들.
스칼렛의 아버지.
이번에는 둘과 관련이 있는 사건들을 순서에 맞춰 보여 주었다.
둘은 이걸 보면서 어떤 감정을 경험하고 있을까.
아마도 모두 누군가의 계획대로 성장하고 행동했다는 느낌이 들겠지.
“역시 그 편지. 네가 썼던 게 맞았구나.”
클리프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전에는 내가 쓴 걸 부정하기 위해 세계수가 쓴 거라고 부정했던 때도 있었다.
이렇게 과거가 밝혀지니 클리프의 얼굴에서 조금이지만 후련함이 엿보였다.
“네가 무슨 일을 해 왔는지는 잘 알겠어. 그 이유는 뭐야?”
“살고 싶어서.”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살고 싶어서 위험을 자초하다니. 뭔가 말이 안 되잖아.”
- 제자야. 조금 더 들어보자꾸나. 시간은 많으니 더 듣고 판단해도 늦지 않단다.
폰허부는 내 말을 더 들어보자며 클리프를 타일렀다.
여기까지 와서 딱히 거리낄 것이 있나.
나는 지구에서 했던 판게아의 게임 플레이를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루카가 죽는 장면만 골라서.
루카는 다양한 분기에서 쓰이고 버려진다.
주로 주인공들의 각성 재료나 상황의 심각함을 표현하는 용도로.
그래서 나는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정말로 여기서 죽고 있는 수많은 루카가 다 실제라는 말이야?”
“현실이 되었을 수도 있지.”
나는 대답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을 던진 클리프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살기 위해서 본인을 이용한 남자. 분명 낯짝만 보아도 화가 치밀어 올라야 정상일 터.
그러나 은발의 청년은 쉽사리 분노를 표출하지 못했다.
- 분명 네 친구의 속에 들어간 자는 너를 이용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아니었다면 판게아는 더욱 비싼 값을 치렀어야 했을 것이다.
“저도 알고 있어요. 스승님.”
과정은 음흉했으나 목적이 악하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내 행동이 판게아를 구했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
때문에 클리프는 무작정 나를 비난하는 대신에 기회를 주었다.
“차라리 끝까지 입을 다물지. 어째서 이걸 우리에게 말하는 거야?”
“책임이 있으니까. 나의 선택으로 너희를 죽을 자리까지 데려왔으니까.”
“너의 말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왔을 거야. 마계로의 원정은 어차피 일어날 일이잖아.”
클리프는 나를 배려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다.
프레스턴이 말했듯이 언젠가는 일어날 일.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다고 해서 나를 비난할 수는 없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굳이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하나 더 있어.”
세계수와 관리자들.
초월자들의 싸움에는 판게아의 인간이 없으니까.
그들은 항상 정보를 숨기고 다른 이들을 본인의 뜻대로 움직였다.
“판게아가 위험해. 나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목숨이 누군가의 손에 놀아나고 있어.”
그러니 나는 진실을 밝혀야만 한다.
눈과 귀를 가리는 게 아닌, 그들의 눈과 귀가 되어 함께 살아나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걸 위해서 나는 둘의 무한한 신뢰를 내려놓았다.
- 왠지 들으면 후회할 이야기 같구나.
폰허부는 내 말의 핵심을 꿰뚫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음모와 싸움을 전전하며 얻은 그의 능력이다.
나는 그에게도 정중히 사과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제가 클리프와 스칼렛을 위험으로 떠밀었으니까요.”
- 그거야, 앞으로 무슨 말을 하느냐에 달린 게 아닌가.
“제 이야기를 더 들으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스칼렛, 클리프. 너희도 마찬가지야.”
- 나야 이미 죽어서 혼만 남았는데 무엇이 문제겠는가. 판게아가 위험에 빠졌다면 응당 나서야지.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로 두 녀석의 얼굴에서도 미묘한 투지가 솟아났다.
“후우, 나도 스승님의 말에 동감해.”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해. 루카, 판게아와 사람들이 위험하다면 난 반드시 알아야겠어.”
“모두의 뜻은 잘 알겠어. 일단 이 말을 꼭 명심해 줘.”
믿음을 강요하는 자를 가장 의심하라.
나를 포함해서 모두를 믿지 말라는 말에 두 주인공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선택은 스스로 하라는 말이야. 이미 알겠지만, 이번 전쟁의 계획자는 초월자들이거든. 그리고 그들이 인류의 적이 될 가능성이 커.”
모든 정보를 알고 있지는 않다.
토끼녀와 세계수가 폭로한 정보들. 단지 그걸 이들에게 공유할 뿐.
‘올바른 판단을 하길 바라야지.’
초월자와 나눴던 모든 대화.
나는 그 기억을 여기 있는 셋에게 보여 주었다.
* * *
니플헤임 영지.
사시사철 서리 폭풍이 불어닥치는 겨울의 세계 속에서 두 대악마가 마주했다.
세간에는 똑같은 대악마로 불렸지만, 둘의 자세는 너무나도 달랐다.
하나는 꼿꼿이 허리를 펴고 상대를 내려다보았고, 다른 하나는 기다란 뱀 꼬리를 축 내린 채로 고개를 조아렸다.
대악마 바신, 스티지아 영지를 다스리는 절대자.
그런 고귀한 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조아린 바신의 몸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몸의 떨림을 가까스로 제어하며 입을 열었다.
“동맹의 일은 긍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두 대악마들과 열심히 조율하고 있습니다.”
심기가 불편한 건가. 아니면 괜찮은 건가.
상대는 지금껏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신이 상대의 의중을 살피고자 고개를 살짝 위로 올렸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으…….”
5m는 족히 넘을 거대한 육체. 그 거구를 모두 가린 검은색 망토.
머리에는 왕관과 비슷한 가면을 썼고, 눈을 제외한 모든 신체 부위가 가려진 상태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드러난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내며 바신을 노려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더 빨리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발라크.
푸르카스와 함께 마계의 최강자로 꼽히는 대악마의 시선이 바신의 등으로 내리꽂혔다.
단순히 기분이 나쁜 정도가 아닌, 진정으로 분노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발라크가 쓴 가면 사이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너에게 명한 것이 무엇인지 기억나느냐?”
“예, 예! 남아있는 대악마를 모두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에게도 귀가 있다. 소문으로는 동맹이 결성되었다고 들었건만. 너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구나.”
“하오나. 데모니움에 있는 노예 반란군들이 문제입니다. 그들 내부의 의견 충돌로 동맹 결성이 쉽지 않습니다.”
바신의 해명에도, 발라크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발라크의 의심은 정답을 가리켰다.
바신은 일부러 니플헤임으로 향하는 정보를 막았고, 다른 영지에는 잘못된 정보를 흘렸다.
그나마 물증이 없기에 바신의 목이 붙어있는 것이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내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푸르카스도 움직일 건 자명한 사실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의 인내심이 사라지기 전에 네가 맡은 임무를 완수하라.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크르르.
싸늘한 설원 쪽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키메라, 바신은 반사적으로 발라크가 만들어 낸 피조물들을 떠올리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의 등에서 검은색 빛이 터지며 어떤 표식이 드러났다.
바신은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견디며 말했다.
“신속히 루카와 말파스를 끌어들여 발라크님의 목표를 이루도록 하겠나이다.”
시간이 촉박하다.
충성을 맹세하는 바신의 속에는 그런 문장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