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36화 (136/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36화>

136. 콜드 워 (6)

마계.

이 세계를 지배하는 마족들은 기본적으로 포악한 놈들이다.

발전은 개인이나 단체의 무력을 말하는 단위일 뿐.

어떻게 하면 더 생산적으로 살 수 있을지는 전혀 생각지 않는 족속들의 땅이다.

공동체의 힘.

그건 단순히 무력으로 판가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악마나 악마급의 숫자나 역량도 중요하지만, 싸움을 위한 기초 체력도 정말 중요하다.

데모니움의 동부. 그곳은 마계의 다른 영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다들 오셔서 점심 드세요!”

스칼렛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엘프들을 향해 소리쳤다.

주변에는 반듯하게 잘린 돌과 한참 건물을 짓고 있는 공사장이 많았다.

이른바 데모니움 동부 산업화 계획.

대종족 의회의 기초 체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내 정책의 시작점이었다.

‘역시 엘프들의 정령은 쓸모가 많아.’

나는 스칼렛의 옆에 서서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데모니움 동부에 도시가 만들어지고 있다.

여러 공장을 구축할 수 있는 산업 단지가 엘프들의 손에 의해 모습을 갖추는 중이었다.

“감사합니다.”

현장을 지휘하고 있던 유리엘이 순무 하나를 집어 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편할 때는 유리엘의 몸을 지배했다가, 막노동할 때는 유리엘에게 맡겨 버리네?

이것만 보아도, 세계수가 토끼녀 못지않은 쓰레기임은 분명하다.

“제사장님이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뭘요, 이제 이곳 공사도 절반은 완성되었네요. 참 기분이 좋습니다.”

“모두 제사장님과 엘프 분들이 헌신해 주신 덕분이죠. 분명 다들 좋아할 겁니다.”

“같은 동맹이니 서로 도와주며 지내야지요. 그럼, 저는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 맛있게 드세요.”

유리엘은 나와 대화하며 음식을 배급받고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뒤로 공사장 인부가 되어 버린 엘프들의 줄이 이어졌다.

이런 명품 인부들이 만드는 꿈의 도시.

역시 몸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배식 차량에서 빠져나오며 스칼렛에게 말했다.

“스칼렛, 나는 잠깐 건물 위에서 풍경 좀 보고 올게.”

“응! 천천히 다녀와.”

스칼렛은 염력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음식을 주면서 대답했다.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나는 이미 건축이 끝난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왔다.

도시의 틀이 잡히니 제법 그럴싸한 모양이 나온다.

‘이게 고작 3주 만이라는 게 놀랍네.’

저 아래에서 엘프가 소환한 노움이 땅을 파고 바위를 옮겼다.

그 옆에서는 실프가 돌을 반듯하게 잘라서 석제를 만들거나. 운디네가 수로를 파서 수로를 뚫기도 했다.

작업 속도는 경이적인 수준.

지구에서는 하루마다 건물의 층고가 올라갔지만, 여기는 한나절이면 건물 하나가 뚝딱 완성되었다.

‘앞으로 서부에 포장도로도 깔고, 다른 도시도 만들려면.’

이거 세계수는 당분간은 여기서 꼼짝없이 일만 해야겠는데.

우리에게 도움도 되고, 초월자도 잡아 두면서 심지어 속도까지 빠르다.

진지하게 엘프들도 건축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저기요. 루카 씨.”

도시의 윤곽을 보고 있던 내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제사장 유리엘, 나는 고개를 틀어 존댓말을 뱉으려다가 얼굴을 확 찌푸렸다.

어딘가 어색한 얼굴에 무뚝뚝한 말투. 상대는 유리엘의 몸을 차지한 세계수였다.

“뭔데. 빨리 밥 먹고 일해야지.”

“아뇨, 그게 아니라. 저희는 다른 일도 잘할 수…….”

“어이, 세 씨! 아가리 닫고 밥이나 먹어.”

“엘프들의 반발이 꽤 심해요. 어떻게 숲의 수호자가 자연을 훼손할 수 있냐는 의견이 많아요.”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일을 잘하는데.

나는 살짝 고민을 해 봤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을 가려서 시킬 수가 있나. 그 정도는 네 선에서 잘 조율해 봐. 신의 뜻이라고 하면 괜찮지 않겠어?”

“이미 교리를 세워 놨는데 어떻게 그래요.”

“오오, 신도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 하는 건가. 이거 토끼보다도 못하잖아.”

“그 썅……. 후우, 알겠어요. 일단 더 버텨 볼게요.”

“따지자면 자연 훼손도 아니지. 전부 천연자원으로 건축하고 있는 거잖아?”

“예, 예.”

세계수는 터덜거리며 다시 공사장으로 돌아갔다.

딱 봐도 일하기 싫은 게 느껴지는데 어디서 개수작이야.

나는 건축 상황을 더 지켜보고 다시 스칼렛이 있는 곳으로 왔다.

“왔어? 저기 봐봐, 클리프가 엄청나게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어.”

“그 시리엘이라는 엘프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확실히 둘의 분위기가 이상하긴 하더라.”

게임에서 클리프는 히로인이 많다.

스칼렛을 제외하고도, 시리엘이나 베리처럼 서브 히로인이 많은 편이다.

이제는 게임의 전개와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보다 괜찮을지 모르겠네.’

언젠가는 세계수와 직접 대치하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 이 둘에게는 말을 해 두는 편이 좋을까.

나는 여전히 웃으며 배식하고 있는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진즉에 말해야 했을지도.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스칼렛은 공사장 인부와 말을 주고받다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할 말이 있냐며 물어보는 천진난만한 얼굴.

나는 그녀의 눈에 집중하면서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셋이서 한번 뭉쳐 볼까 해서.”

* * *

데모니움 본성 근처의 조용한 숲속.

스칼렛과 클리프. 그 둘은 투지를 발산하며 나를 주시했다.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겠냐.”

클리프가 나를 보며 호기롭게 말했다.

단순히 내가 지닌 기운의 총량만 따져도 이제 폰허부보다 위에 있다.

저 둘이 한꺼번에 덤벼도 전혀 위태롭지 않으리라.

“물론이지.”

“그럼 간다!”

쿠과과과!

클리프에서 뿜어져 나온 오러가 지면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위협적인 돌격에 맞서서, 나는 무명을 꺼내 들고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암적색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오러가 무명에 감겼고 곧바로 클리프의 기운과 맞부딪쳤다.

꽈앙!

폭탄이 터진 듯한 폭발음과 함께 나와 클리프가 동시에 밀려 나왔다.

있다가 없으니까 뭔가 서글프네.

일부러 오러만 사용했지만, 이 정도로도 녀석을 일방적으로 밀어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저 멀리에 있는 스칼렛의 능력 덕분이다.

‘가만히 있으면 빨린다.’

갑자기 몸이 나른해졌다.

왠지 모르게 오러를 발산하는 게 힘들고, 클리프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진 느낌이 들었다.

물론, 감각이 이상한 게 아니라 실제로 힘든 것이다.

증폭과 분해.

스칼렛은 클리프의 오러를 강화하고 내 기운을 약화시켰다.

같은 기운을 뽑아내도 위력은 절반 정도.

하지만 이런 건 스칼렛의 감지 능력을 벗어나면 모두 수포가 된다.

스르륵.

내 신형이 지면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처럼 미끄러졌다.

상대의 감각을 현혹하는 보법.

[검귀식: 그림자 검술]의 묘리를 살리자, 나를 방해하던 미증유의 힘이 사라졌다.

이어서 스칼렛의 눈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든 잡아 보겠다는 거냐.’

스칼렛과 클리프에게서 진심이 우러나온다.

상대를 이기고 말겠다는 의지.

그것이 두 남녀에게서 흘러나와 내 마음을 적셨다.

저렇게 진심을 나온다면 마냥 무시할 수도 없지.

스으으. 파괴의 힘을 담은 검은색 기운이 오러 위에 덮였다.

“이제야 제대로 나오네!”

클리프는 오히려 두 눈에 힘을 주며 달려들었다.

갑옷처럼 그를 감싼 오러.

검성의 강인함을 물려받은 듯한 클리프의 오러는 견고하게 주인을 지켜냈다.

무식하게 돌격하면 못 막을 줄 아나?

그림자 검술 3번, [달빛 베기]

마기와 오러가 합쳐진 흑도가 분열하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거리의 제약조차도 넘어선, 칼날을 둘러싼 공간이 휘고 늘어나며 클리프의 몸을 겨누었다.

진심이 담긴 검격에 클리프의 오러 갑옷이 종잇장처럼 찢겼다.

“너무 쉽잖아.”

“칫, 스칼렛!”

지잉.

국밥이의 호통과 함께 정신이 멍해졌다.

애초에 정신을 무너트리는 건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무형의 기운이 머리를 파고들어 계속 신경쓰이게 만들었다.

‘애초에 주력은 클리프가 아니었어.’

클리프는 일부러 틈을 보여 내 공격에 당해주었다.

내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에는 반드시 멈출 수밖에 없으니까.

번쩍! 그와 동시에 ‘광휘의 심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찬란한 섬광이 나를 덮어씌우자, 시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이 사라져 버렸다.

‘언제 이런 작전을.’

이번 싸움은 즉흥적이었다.

간만에 3명이 뭉치자며 이 숲으로 끌어들였고, 실력을 확인할 요량으로 대련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연계가 가능하다니.

그만큼 여러 고난을 겪으며 스칼렛과 클리프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엄청나네!”

나는 육성으로 외치며 곧바로 검을 고쳐 쥐었다.

길게 감탄을 내지를 여유는 없다.

혈마력을 이용해 빠르게 회복시킨 감각이 두 놈의 위치를 잡아냈으니까.

하늘 위.

내가 고개를 들어 올리니 클리프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를 둘러싼 두꺼운 오러와 화염.

아직 대낮이었음에도 클리프의 [유성격]이 유독 밝게 빛나는 건 기운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저 위치까지 단숨에 올라간 것도 스칼렛의 공간 이동을 활용했을 터.

‘바신이나 말파스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지도.’

나는 진심으로 놀라며 그에 걸맞은 기술을 꺼냈다.

[개기일식]. 무명에 어스름한 빛이 퍼져 나왔다.

스칼렛은 여전히 내 기운을 분해했고, 정신을 공격하며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이 기술을 파훼하지는 못했다.

“못 막겠으면 피해!”

설레발은.

애당초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환하게 웃으며 찔러넣은 검은 지면에 다다른 클리프의 대검과 교차하며 밝은 빛을 냈다.

쿠와아아!

클리프를 둘러싼 오러가, 중력의 힘이, 스칼렛의 기술까지도.

모든 것들이 무명의 칼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력을 다한 저들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어림도 없지?”

나는 그리 말하며 하늘을 향해 흑도를 휘둘렀다.

무명이 머금었던 기운이 일제히 초승달 모양으로 쏘아졌다.

쿠우우웅, 태양보다도 더 밝은 빛과 함께 클리프의 기운이 하늘을 물들였다.

“진짜 독하다 독해.”

“루카, 혼자서만 너무 강해진 거 아니야?”

클리프와 스칼렛은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걸어왔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 완전히 질려 버린 것이다.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해가 되지?”

“알다마다. 아예 마계도 전부 평정해 버리겠어.”

클리프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반면에 스칼렛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국밥이와 다르게 은근히 눈치가 좋다니까.

나는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뜨며 숨을 한 차례 크게 들이 내쉬었다.

“스칼렛, 왜 눈치를 보고 그래?”

“어? 아니, 루카가 뭔가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러게. 웬일로 여기까지 불러내고 그러냐.”

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진실을 이야기할 시간이 다가왔다는 뜻.

나는 클리프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클리프, 50번 개척지에서 스승을 만났을 때를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지.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서 얼마나 놀랐는데.”

“그러면 손에 들려있던 녹슨 칼자루도 기억나겠네.”

클리프는 잠시 눈알을 굴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대충 눈치챌 법도 하건만. 애는 진짜 눈치도 없네.

기감을 넓혀 주변을 살폈다.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진 감각에 잡히는 기운은 하나도 없었다.

강아지남이나 토끼녀, 세계수의 시선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야.’

언젠가는 말할 사실이라면, 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말해 두는 게 좋을 터.

나는 엄지를 세워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칼자루를 네 손에 쥐여 준 사람이 나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