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35화 (135/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35화>

135. 콜드 워 (5)

다음 날.

동이 터 오르고 나와 바신은 에레보스 본성에서 나왔다.

말파스는 겉으로 아쉽다는 기분을 표현하며 우리를 말렸다.

“더 기거해도 괜찮소만.”

“푸르카스를 상대하려면 더 힘을 길러야지.”

“그 말이 옳다. 나도 데모니움에 보낼 비마족을 준비해야 하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다.”

우리는 어제보다 한결 친숙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뒤에서는 여전히 나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아무튼, 당장에 데모니움으로 쳐들어오지만 않으면 되었다.

“그럼, 나중에는 발라크 공과도 함께 볼 수 있길 바라오.”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말파스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그와는 반대로 바신은 대답을 흘리며, 자신의 수행원들과 서쪽의 스티지아 영지로 떠났다.

간단히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도 동쪽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말파스도 대충 눈치는 챈 것 같은데.’

말파스가 내어준 마차.

그 안에서 나는 에레보스의 본성을 보았다.

모든 대악마의 목표는 똑같다.

생존, 그리고 확장.

말파스의 처지를 생각하면 세력의 확장은 가능성이 낮다.

이 혼란스러운 형국에서 생존만 해도 감지덕지겠지.

그렇기에 저 까마귀가 바신과 화해하고 동맹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이다.

나는 앞에서 마차를 끄는 마족에게 말을 걸었다.

“요새 에레보스 영지는 상황이 어떻지?”

“저에게 물어보셨습니까?”

“그래, 가는 길에 심심하잖아.”

“……좋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말파스님을 믿고 있지만, 에레보스 영지는 폭풍의 핵이 아닙니까.”

“폭풍의 핵이라. 그렇긴 하겠지.”

마족은 나를 경계하면서도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우선 영지의 귀한 손님이기도 했거니와, 흔히 알아볼 수 있는 정보였으니까.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나는 마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그리고 영지의 북부에 있는 숲에서 맛있는 버섯이 많이 납니다. 에레보스 최고의 별미는 그곳에서 나는 육질 버섯이죠.”

대화의 주제는 만국의 공통사인 먹을거리로 넘어갔다.

사실, 이 대화에 큰 의미는 없다.

말 그대로 시간을 죽이기 위한 수단. 바신이 멀리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용도일 뿐이었다.

“잠시만. 뭐가 안 보이는데?”

나는 마부의 말을 끊고 내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물건이 사라졌다는 말이 튀어나오자, 마부는 사색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뭘 잃어버리셨습니까?”

“아무래도 그런 거 같아. 이상하다, 어젯밤에는 분명 있었는데.”

“그럼, 마차를 돌리겠습니다.”

마부는 곧바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동안 바신은 더욱 멀리 사라졌고, 나는 별 탈 없이 에레보스 본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파스는 경계심을 품고 다시금 마중을 나왔다.

“물건을 잃어버렸다니. 무슨 일이오?”

저녁에 쉬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집으로 오면 짜증 날 만하지.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장착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말파스를 위한 나의 깜짝 선물, 모두 그걸 위한 포석이었다.

“발라크가 어째서 회합에 안 나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태엽이 완전히 돌아간 인형처럼, 순간 말파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역시 얘도 이상하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구나.

나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이곳에 오기 전에 토끼녀에게 전달받은 정보를 떠올렸다.

“발라크는 이번 회합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아.”

“그, 그게 무슨……. 그렇다면 바신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오?”

“정확한 이유야 모르지만. 거짓말을 하는 건 확실해.”

여기까지 대화가 이어지자.

말파스는 우선 나를 본성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반 푸르카스 동맹은 발라크가 주축.

만약 그가 이 동맹에 찬성하지 않았다면, 말파스에게 굉장히 치명적으로 작용할지도 몰랐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말파스는 나를 조용한 장소로 안내한 다음에서야 입을 열었다.

믿음이란 지극히 주관적이다.

객관적인 물증이 있어도 진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고, 심증만으로 거짓을 믿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물론, 지금의 나에게는 물증이 없다.

“증명할 방법은 없어.”

“아니, 바신이 우리를 배신했다고 하지 않았소?”

“배신했다고는 말하지는 않았지. 발라크가 정확한 사실을 모른다고 했지.”

그게 그거 아닌가.

말파스는 슬슬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붙잡고 나를 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까마귀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괜히 말장난이나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닐 거라는 결론에 도달한 듯 보였다.

“지금 니플헤임 영지는 어떠한 움직임도 취하지 않고 있어. 전쟁을 준비한다는 느낌이 아니었거든.”

“아니, 분명 두 영지의 경계에 배치된 군대의 숫자가 늘지 않았소?”

“그렇지.”

“게다가 지난날에는 푸르카스를 압박했다는 소문도 돌았잖소.”

“나도 그래서 의심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반 푸르카스 동맹이 결성된 이후.

발라크는 마치 동맹을 등에 업은 것처럼 행동해 왔다.

나도 두 영지 사이의 소문을 믿고 있었으며, 심지어 푸르카스도 우리가 동맹을 결성했다고 생각했다.

“근데, 발라크와 푸르카스의 신경전이 최근의 일은 아니잖아?”

강아지남은 내 지시대로 발라크가 다스리는 니플헤임 영지로 잠입했다.

본성으로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곳의 대략적인 분위기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니플헤임 영지는 평온했다.

‘도저히 전쟁을 준비하는 상태로는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에레보스, 데모니움, 스티지아.

이 세 영지는 열심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혼자서만 놀고 있을 수가 있나.

이런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하지만 물증이 없다면 이 대화는 무의미하오.”

“한 말도 증명하기 어려운데, 하지 않은 말을 증명하기는 더더욱 힘들지.”

“추측에 불과하다는 말이구려.”

“그래서 하는 말이야. 알아보고 싶다면 방법은 많잖아.”

에레보스 영지는 스티지아와 니플헤임에 닿아 있다.

첩자를 파견하든, 내부에 정보원을 만들든.

말파스가 원하기만 한다면 정보를 얻어 낼 방법은 꽤 많다.

다만 말파스는 동맹의 끄트머리에 있기에 바신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했던 것이다.

물론, 발라크의 심기를 굳이 거스르기도 싫었을 테고.

“만약 바신이 배신한 거라면.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대악마보다도 더욱 악마스럽게.

나는 기름진 혀를 살살 놀리며 말파스에게 열망을 주입해 주었다.

바신이 발라크에게 동맹의 일을 비밀로 할 이유는 그다지 없다.

동맹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물론, 그런 생각으로 우리 사이에서 줄을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모험으로 인해 얻는 이득이다.

언젠가는 저런 행각이 드러날 터인데, 그때 가서 세 대악마의 분노를 어찌 감당할까.

하지만 대악마들의 분노를 감당할 만큼의 보상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내가 바신에게 이 말을 전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시오.”

말파스는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의심의 싹을 간신히 억눌렀다.

뭐, 저런 태도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나마 믿고 있던 동료가 배신을 꾀하던 정황이 드러났으니 오죽하겠는가.

“아마 내가 공공의 적이 되겠지. 나로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는 거야.”

“음.”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는 없지. 내가 신용을 주지 못했다는 거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 명심해 둬.”

바신은 이제 발라크의 부하가 아니다.

그가 악마였던 시절은 과거가 되었고, 앞으로도 반드시 둘이 함께하리란 보장은 하지 못한다.

내 말을 들은 말파스의 얼굴에 수심이 번졌다.

* * *

열심히 말파스를 부추기고 일주일이 지났다.

데모니움 영지의 북동부. 나는 비행 훈련장에 여러 종족 대표들과 함께 나와 있었다.

오늘은 가람족의 비행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는 날.

짧은 기간이었지만, 최대한 열심히 갈고닦은 그들의 비행 기술이 선보여질 예정이었다.

“와, 맛있는 당근도 있네요!”

대표들이 앉아있는 커다란 천막.

토끼녀는 천막의 한쪽에 마련된 음식들을 보며 군침을 흘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토끼의 귀를 잡아당기며 의자에 앉혔다.

“아앗!”

“총관 나리께서는 일을 하셔야죠?”

“말이 총관이지, 사실상 노예랑 같잖아요. 저에게도 휴식 시간을 주시라고요!”

“잘 알고 있네. 너 노예잖아.”

주제도 모르는 토끼의 입을 강제로 닫은 다음.

나는 천막으로 걸어오는 루카스와 가람족을 향해 손뼉을 쳐주었다.

짝짝짝. 자리에 모인 대표들도 모두 새로운 종족의 합류를 축하해 주었다.

“비행대를 창설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지금부터…….”

루카스는 펠리컨처럼 생긴 주둥이를 움직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가람족 비행대는 총 3개의 부대로 구성된다.

강습부대, 지원부대, 정찰부대.

이번 출범식에서는 각 부대의 성격에 맞는 시연 행사가 준비되었다.

루카스는 설명을 마친 직후, 비행대를 데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들 정말 씩씩하네요. 저 벌판에 있는 설치물들은 뭐죠?”

“부대마다 특성을 보여 주는 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아, 그렇군요.”

근처에서는 에버딘과 깨비가 나란히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수아비 수십 개, 맨땅에 그려진 거대한 X자 표시.

그것들은 모두 이번 비행대 출범식의 희생양이다.

지구에서 에어쇼를 보았던 나야 대충 어디에 쓰일지 알았지만.

뿌우우.

그 순간, 나팔 소리가 들리며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동시에 왼쪽 하늘에서 체구가 비교적 작은 가람족이 다수 등장했다.

그들은 나무 넝쿨과 목재로 제작된 경량 무장을 입고 있었다.

“가람족의 장비를 만들어 주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어.”

“허허허, 소인과 아자크족은 그저 소임을 다 하였을 뿐입니다.”

내 칭찬에 거대한 나무가 고개를 숙이며 겸손하게 답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단순히 날기만 한다고 비행대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 병과에 따라서 무장도 바뀌고, 그에 따른 장비도 천차만별.

‘저건 정찰부대네.’

작은 체구의 가람족 정찰병이 자유자재로 하늘을 누볐다.

거기에 꽁무니 부분에서 형형색색의 연기가 나오며 하늘에 표식을 그리기도 했다.

저건 아군 부대에 명령을 내리기 수월할 터.

여러 재주를 부린 정찰부대가 지나가자, 그 뒤로는 거대한 체구의 가람족이 등장했다.

“와아. 뿔족이 등 위에 타고 있네요?”

에버딘이 기병용 장창을 들고 가람족 위에 탄 뿔족 병사를 가리켰다.

그들은 몸 전체를 감싼 갑옷을 입고서, 미리 설치된 허수아비들을 향해 하강했다.

장창과 발톱.

강습병의 공격으로 허수아비들은 순식간에 나무 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정찰병에 비해서 화려한 맛은 없지만, 육중한 파괴력에 종족 대표들의 박수 소리가 더욱 컸다.

뒤이어 이 출범식의 하이라이트. 지원부대의 등장에 모두가 신경을 왼쪽 하늘로 집중했다.

“멋지다!”

요정족의 대표 이바나가 유독 활기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럴 게, 지원부대에는 요정족의 연금술이 많은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배에 부착된 커다란 배낭.

부리를 이용해 열 수 있도록 제작된 배낭이 휙 하고 열리자 안에서 여러 약병이 떨어졌다.

팍, 파파팍!

앞서가는 지원부대의 약병이 땅에 떨어지자 연기가 자욱하게 꼈다.

지상부대의 돌격이나 전진을 도울 연막탄.

고위 마족 이상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상급 마족까지는 충분히 먹힐 만한 물건이리라.

다음으로 나타난 지원부대의 배낭은 땅에 쓰인 X자 근처에서 열렸다.

퍼퍼퍼펑!

폭발 물약.

순서대로 떨어진 연금술 폭탄에 목표 지점이 불바다가 되었다.

나는 화룡점정을 찍은 지원부대에도 아낌없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슬쩍 눈길을 토끼녀에게 돌리며 말했다.

“요새 에레보스는 어때?”

아작.

토끼녀는 열심히 당근을 뜯다가 나를 보며 답했다.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안에서는 엄청 분주하대요. 니플헤임과 스티지아로 은밀하게 스파이를 보내기도 하고요.”

“역시 똥줄이 타기는 하는가 보네.”

설마 바신이 뒤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덕분에 반 푸르카스 동맹에도 깊은 내상이 생겼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곪아 터질 터.

‘그때까지는 그저 관망하는 거지.’

나는 용맹한 루카스와 가람족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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