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34화>
134. 콜드 워 (4)
궁금증을 풀지 못했던 말파스의 편지.
그 안에는 여러 해명을 요구하는 문장들로 가득했다.
나는 며칠이 지난 시점에 내용을 추가해서 답장을 보냈다.
저번에 제안했던 동맹 회합. 이번에는 대악마들이 흔쾌히 내 요구를 받아들였다.
데모니움 본성의 정문.
나는 종족 대표들의 배웅을 받고 있었다.
에버딘과 깨비, 그리고 이번에 새로 합류한 가람족의 대표인 ‘루카스’까지.
본성 근처에서 기거하고 있던 대표들은 하나 같이 나를 걱정해 주었다.
“정말로 혼자 가셔도 괜찮겠습니까?”
특히 근심이 덕지덕지 붙은 깨비가 나를 더 붙잡았다.
따지자면 적진으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기는 하다.
다른 대악마가 푼 첩자들이 우리 영지에 있다는 건, 그만큼 내가 의심을 받고 있다는 증거니까.
물론, 적진이기 때문에 혼자 가는 거다.
“솔직히 말하면 혼자가 더 편해.”
“……정 그러시다면야.”
“각자가 할 일이 있는 거니까. 너는 에버딘이랑 영지 남부를 소탕해야지.”
에버딘과 깨비.
나는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데모니움 영지의 남부는 최근에 군소 마족군의 습격을 많이 받았다.
그들의 대장은 주로 상급 마족들로, 플라우로스가 죽고 도적이 된 놈들이었다.
“그래도 조심해 주세요. 의장님은 저희의 희망이시니까요.”
“물론이지.”
나는 에버딘의 말에 긍정을 표하며 그녀의 옆에 선 루카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신장이 2m는 족히 넘는 거구의 새. 날개를 펼치면 폭이 3m도 넘었다.
가람족, 인페르노 영지에서 데려온 그들의 생김새는 지구의 펠리컨과 아주 흡사했다.
“루카스, 저번에 맡겨 놓았던 일은 어떻게 되고 있지?”
“비행대 조직은 아주 순조롭습니다. 다들 열의에 차서 열심히 훈련 중입니다.”
가람족은 말이 비마족이지 사실상 말하는 동물과 같다.
팔이 있을 자리에 날개가 있으니, 노동자가 되기도 힘들고 무기를 쥐는 것도 불가능할 터.
대신에 그들은 다른 종족이 못하는 걸 할 수 있다.
바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미친 잠재력.
단순히 국경을 날아다니면 정찰기.
폭탄을 짊어지면 폭격기고, 병력을 실으면 수송기가 된다.
심지어 인페르노에서 애완동물이나 사냥터의 표적물로 살아서 그런지. 마족을 향한 증오심도 엄청났다.
“그리고 제공해 주신 주거지는 동족들이 정말 만족하고 있습니다.”
루카스는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갈 듯한 기분을 표현했다.
가람족은 호수나 강을 선호하길래, 그들의 거주지로 줘 버렸다.
집도 지어 줄 필요가 없다니 우리야 더 좋지.
“모두가 만족했으면 된 거지. 다들 정말로 따라올 필요는 없어. 혼자서도 충분해.”
에레보스 영지.
그곳에서 열릴 동맹 회합은 총성 없는 전쟁에 가깝다.
일이 잘못되면 그곳에서 탈출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무엇보다 각자에게 할당된 일거리가 많았다.
‘어디 보자. 유리엘은 잠시 헬란 영지로 떠났고.’
인페르노와의 전쟁도 끝났겠다.
유리엘은 본격적으로 엘프들을 데려오기 위해 대동맹으로 돌아갔다.
클리프와 스칼렛은 동부 국경에서 인간들과 비마족의 다리가 되어 주고 있고, 펠리스는 여전히 첩자들을 감시하며 돌아다녔다.
모두가 맡은 소임을 다하며 열심히 동분서주하고 있다.
딱 하나만 빼면.
나는 하얀색 똥 덩어리를 떠올렸다.
요새 들어서 유리엘을 감시한다고 태만함이 극에 달한 그 가증스러운 생물체 말이다.
“토끼가 항상 문제네. 최소한 떠나기 전에는 보고하라고 말했는데.”
대략 일주일 전.
나는 말파스의 편지를 받고서 토끼에게 정탐 임무를 맡겼다.
최대한 빨리 보고하라고 말했건만, 에레보스로 떠나는 시간까지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왔습니닷!”
때마침 헐레벌떡 달려오는 하얀색 물체.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종족의 대표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눈 토끼녀는 태연하게 내 앞에 섰다.
“지각한 주제에 왜 이렇게 해맑아.”
“에이, 지각이라뇨? 떠나기 전에 오셨으니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죠.”
“능글맞기는. 그래서 강아지남이 뭐라고 했는데?”
“좀 가까이 와주세요.”
토끼녀는 손으로 주둥이를 가리며 내 귀로 입을 갖다 대었다.
평소라면 절대 어림도 없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가져 왔을 정보가 제법 크니까.
소곤소곤, 내가 허리를 굽히자 토끼녀가 조용히 정보를 흘려 주었다.
“그렇단 말이지?”
“네, 말씀하셨던 부분은 사실이었어요.”
“에레보스에서 도움이 되겠어. 수고 많았어.”
“히히, 새삼스럽게 무슨 그런 말씀을.”
“라고, 강아지남에게 전해 줘.”
“칫.”
토끼녀는 괜히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찼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거리며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회합 장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늘을 날아서 국경까지 빠르게 이동했고, 그 뒤부터는 에레보스의 마족이 나를 안내했다.
에레보스 본성. 그곳에 당도하자 두 대악마가 나를 반겼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구려.”
“혼자서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말파스와 바신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허허, 이놈들 봐라. 뒤통수에 칼을 꽂고도 아주 태연하네?
당연히 칼부터 뺄 생각은 없었기에 나도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그간 연락이 뜸하긴 했지. 헬란에서 워낙 많은 일을 겪어서 말이야.”
“음, 그 이야기는 바로 듣고 싶군.”
“원하신다면 당장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셔도 좋소.”
말은 권유에 가깝지만, 사실상 해명부터 하라는 의미.
나의 미소는 순식간에 반쪽짜리로 바뀌었다.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으로 그들이 안내하는 장소로 들어갔다.
‘함정은 없고.’
기감을 펼쳐보아도 딱히 걸리는 게 없다.
레라지에 때와는 다르게 나는 많이 성장했다.
모든 능력을 총동원한다면 둘을 동시에 쓰러트릴 수도 있을 정도.
바신과 말파스, 그 둘이 함정을 설치했다고 해도 간파할 실력이 되었다.
끼이이이. 쿵!
우리 셋이 넓은 방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방 내부는 썰렁했다. 테이블 하나와 의자 3개를 제외하면 어떤 장식품도 없었다.
나는 보란 듯이 입구가 보이는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동맹 회합이라면 발라크도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어째 머릿수가 좀 비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기고 입을 열자.
두 대악마. 특히 내가 저격한 바신이 마기를 풀풀 풍기며 의자에 앉았다.
이거 무슨 회의가 아니라 완전 청문회인데?
“나도 귀공의 말처럼 발라크 공도 왔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듣고 싶은 말이 있소이다.”
“헬란 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역시 그것부터 시작하는구먼.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서 둘의 시선을 무덤덤하게 받아 냈다.
“이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우선 충격을 줘야지.
“푸르카스가 나와 플라우로스를 공격했어.”
바신과 말파스는 조금씩 흠칫거리며 내 입에 신경을 집중했다.
나는 과거를 회상하듯 눈동자를 천장으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나는 북부 전선, 플라우로스와 푸르카스의 군대는 남부 전선을 공격했지. 본성 코앞까지는 아주 수월했어. 그런데 인간 놈들이 장난을 쳐놓은 거야.”
마족을 가두는 결계진.
나는 그것의 설명을 쏙 빼고서 인간 측의 습격을 설명했다.
인간들이 본성에 주력을 숨겨두고 적을 끌어들였다.
여기까지 설명을 마치니 까마귀 머리가 말을 끊고 훅 들어왔다.
“귀공의 말인즉슨. 푸르카스가 보낸 악마가 인간들을 지원해서 두 대악마를 이기고, 그중에서 하나를 죽였다는 말이오?”
악마가 대악마를 이기다니.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예상했던 질의를 해 주시다니 정말 고마운데.
“잊었어? 푸르카스의 악마는 그냥 악마가 아니야.”
“혹시 어떤 악마가 파견되었는지 말해 줄 수 있소?”
“라일라크. 그놈도 평범한 악마의 수준은 아니더라고.”
나는 이전에 푸르카스가 비밀리에 대악마를 육성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 실험이 끝나지 않았다면 새로운 결과물들이 계속 추가될 터.
유도한 대로 정황을 이해한 말파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렇다면. 푸르카스가 인간들의 편에 섰다는 말인가?”
이번에는 바신의 차례.
굳이 모든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어 줄 필요는 없다.
상상력은 때때로 완벽한 사실보다도 더한 효과가 있으니까.
“그건 몰라. 라일라크가 나를 보더니 배신자라면서 바로 덤벼들었거든. 나는 싸움이 불리해져서 그냥 도망갔고.”
“아니, 대악마라는 자가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다니!”
“야, 뱀 꼬리. 너도 얼마 전에 나한테 순순히 그 기다란 걸 내리지 않았었냐?”
완전 내로남불이잖아.
바신이 고함을 지르며 일어났지만, 정밀한 팩트 폭격에 얻어맞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게, 길고 짧은 건 미리 대보고 덤벼야지.
“그리고 푸르카스가 나를 공격한 이유야 뭐 뻔하지. 앞으로 또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르고.”
“뭔가 예상가는 거라도 있소?”
“뭐, 내가 사실 인간들 편이라는. 그런 소문을 만들어 내지 않겠어? 어떻게든 우리의 동맹을 헐겁게 하려고 용을 쓰겠지.”
나는 태연하게 정체를 까발리며 두 대악마를 눈에 담았다.
모두 내가 흘린 소문을 들었는지, 아주 살짝 시선을 피하며 침묵을 지켰다.
이렇게 먼저 약을 쳐두면 당분간은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이러면 설명이 충분한가?”
플라우로스가 데리고 간 원정군은 헬란에서 모두 죽었다.
객관적인 진실을 들을 수단이 없으니, 두 대악마는 별다른 반론을 꺼내지 못했다.
의혹을 걷어낸 뒤, 나는 곧바로 보상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바신, 내가 들어보니까, 인페르노 영지에 나를 추천했다며?”
“그렇다. 푸르카스가 돕는다는데 우리가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맞는 말이야. 그런데 왜 너는 아무것도 안 한 거지? 게다가 고생하고 돌아온 동맹원을 의심하는 건 무슨 경우고.”
“아니, 의심한 게 아니라…….”
“이거 섭섭한데. 나는 우리가 힘을 합칠 동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분명 동맹을 위해서 희생했는데.
우리의 자랑스러운 동맹원들은 뒷짐을 지고 오히려 배신자로 몰아갔다.
나의 주장은 이렇다.
피를 흘려 싸운 동지에게 지원을!
아쉬운 소리를 해대며 꽤 오랫동안 혼자서 떠들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바신과 말파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 순간에도 서로 책임을 미루겠다 이거지?
역시 내가 택한 동맹원이다.
‘그러면 점수를 살짝 따 볼까.’
내 손가락이 누군가를 지목했다.
나를 이번 전쟁에 끌어들인 원흉, 동맹원을 사지로 몰아낸 당사자에게로.
“후우, 바신. 이번에 우리 영지가 피해가 좀 심하거든? 너희가 가진 비마족을 좀 내줬으면 좋겠는데.”
“아, 알겠다. 내가 그대의 최대한 보상하겠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가족들이랑 찢어지게 하지는 말자. 저번에 보냈던 비마족들이 말이 많아 죽겠어.”
“……그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랬다.”
“무슨 사정인지는 궁금하지 않고, 어찌 됐든 네가 이전에 보낸 비마족의 가족들부터 보내.”
바신은 내 요구를 순순히 응해줄 수밖에 없었다.
정당한 명분은 나에게 있고,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말파스는 괜히 불똥이 튈까 봐 존재감을 감추며 가만히 기다렸다.
‘뭐, 첩자야 다시 보내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겠지만.’
스티지아 출신의 비마족은 모조리 영지 동부로 보낼 거다.
아예 접촉할 수단 자체를 없애버리면 자기들이 뭘 어떻게 할까.
보상에 대한 조율이 끝난 뒤.
우리는 몇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차 푸르카스를 어떻게 상대할지. 동맹끼리 뭔가 유니폼이라도 만들지.
대부분 의미 없고 따분한 토의일 뿐이었다.
“여기까지면. 일단은 충분할 것 같소.”
말파스가 회합의 종료를 알렸다.
이제 남은 일정은 저녁 식사를 하고 다음 날에 영지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당연히, 나의 계획은 오히려 시작이었다.
“자, 다들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며, 나는 말파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