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32화>
132. 콜드 워 (2)
바신과 말파스.
두 대악마는 영지의 국경에서 은밀히 만났다.
자신의 목숨과 자리를 위협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때 다친 상처는 좀 어떤가?”
긴 뱀의 꼬리를 가진 남자.
바신이 까마귀를 닮은 말파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에레보스의 주인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잘 회복되었소. 모두 그대의 덕분이오. 바신.”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그때는 서로의 처지가 달랐던 것이니까.”
“아무렴, 그래서 이렇게 오지 않았소?”
말파스는 분노를 곱씹으며 바신을 노려보았다.
그의 처지는 상대편보다 더 위태로웠다.
동쪽에는 노예 반란군이, 서쪽에는 마계의 권좌를 노리는 발라크와 바신이.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남쪽의 인페르노를 양분한 인간들과 푸르카스의 세력도 그의 영지와 아주 가까웠다.
사면초가.
이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 아닌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줄을 잘 서야 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말파스는 바신을 선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뒤에 있는 발라크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뭐, 우리의 사이가 좋았던 적은 없었으니. 슬슬 혈맹이 되는 조건을 말해도 되겠나?”
“그렇게 하시오.”
“나와 발라크는 우선 적과 아군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마 대종족 의회를 이르는 말이오?”
“원래 외부를 치기 전에 내부의 적을 솎아내야 하니까.”
“무슨 뜻인지는 알겠소.”
말파스는 이전의 일을 떠올렸다.
루카, 그 얍삽한 대악마는 원래 자신을 노렸다.
지금은 죽은 레라지에와 눈앞에 있는 바신을 꼬드겨서 영지를 3개로 나누려고 했다.
‘당시에는 그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그냥 넘어갔었지만.’
결국, 대종족 의회는 노예들이 일으킨 세력.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절대로 신용할 수 없는 족속이었다.
“내가 무얼 해 주길 바라오?”
말파스가 상대편에게 물었다.
그의 목표는 어떻게든 발라크의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것.
그것을 위해 과거의 수모를 인내하며 이 자리에 나왔다.
“일단 이걸 받아라.”
바신이 손짓을 하자 그의 수하가 서류 뭉치를 가져왔다.
문서의 내용을 확인하니, 비마족 노예와 관련된 정보가 무수히 많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가는 내용은 접선 방법.
말파스는 새까만 눈동자를 빛냈다.
“이런 정보를 나에게 알려 줘도 되겠소?”
“거기에 적힌 노예 말고도 우리가 심은 자는 많다.”
“일부라는 말이구려.”
“이해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겠나?”
“이들이 수집한 정보는 잘 정리해서 보내도록 하겠소.”
스티지아 영지는 데모니움과 맞닿아 있지 않다.
그가 심어놓은 첩자들이 정보를 보내려면, 반드시 다른 영지를 거쳐야 할 터.
인페르노를 이용할 수는 없으니 에레보스 영지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대종족 의회의 속을 알 수 있다면 우리의 동맹은 더 견고해질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나저나, 발라크는 언제 만나게 해 줄 거요?”
“혼란이 좀 사그라든 다음에……. 꼭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바신은 말파스의 물음을 얼렁뚱땅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동맹의 주축, 가장 의지가 되는 발라크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말파스는 그 부분에서 조바심이 났다.
“설마. 아직 발라크에게 이 일을 말하지 않은 건 아니오?”
이미 뒤통수가 얼얼한 말파스.
그는 제법 합당한 추론을 통해 결론을 내놓았다.
그러자 바신은 얼굴을 구기며 윽박질렀다.
“허튼소릴! 나와 발라크는 언제나 함께 움직인다.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면 이 일은 없었던 거로 하지!”
“진정하시오. 그대가 나에게 행한 일을 생각한다면. 이만한 의심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소?”
쿠구구구.
바신과 말파스의 기운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둘의 기 싸움에 주변에 있던 마족들이 힘겨워하다가 쓰러지기도 했다.
서로를 노려보던 것도 잠시, 바신이 슬쩍 기운을 걷었다.
“저번 일은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는 마계의 변절자와 인간들을 상대로 싸울 동지다. 자리는 곧 마련하지.”
“늦지 않아야 할 것이오. 이번에는 그리 길게 참을 수 없을 테니.”
함정에 걸려 당했다고는 하지만, 말파스는 바신에게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걸 잘 알고 있던 까마귀 수인이 엄포를 내놨다.
“그럼, 그대만 믿고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소. 그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말파스는 무언가를 깨닫고 멈춰 섰다.
바신이 대악마가 되기 이전, 그는 발라크를 존경하고 늘 새끼 오리처럼 따라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무언가 문제가 있나?”
바신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물었다.
말파스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부리를 닫았다.
“아니오. 나중에 보겠소이다.”
굳이 대놓고 물어볼 이야기는 아니지.
발라크를 향한 바신의 태도야 시간이 지나면 차차 드러날 터.
말파스는 더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둘의 만남이 끝나갈 무렵.
“바신 님!”
가죽옷을 입은 남자 인마족이 안으로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이름은 프린지, 발라크에게 속해 있는 시절부터 함께했던 그의 부하 악마였다.
프린지의 등장에 두 대악마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프린지, 무슨 일이냐.”
“대종족 의회에서 동맹 회합을 열자는 요청이 왔습니다.”
“회합이라면 동맹을 모두 소집하자는 뜻이더냐?”
“예, 그렇습니다.”
마침 헬란 영지에서 벌어진 전쟁의 내용을 알고 싶던 차였다.
분명 대악마 둘과 푸르카스의 군대까지 합세했건만.
어쩐지 전쟁은 정반대로 결판이 났으니까.
“굳이 이 요청을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려.”
말파스는 고민할 것도 없이 루카의 소집에 동의를 표했다.
오히려 망설이는 자는 바신이었다.
발라크, 바신, 말파스, 루카.
이 대악마 넷이 모이는 자리가 조금 거북해 보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일단 대종족 의회의 속셈을 파악한 다음에 만나도 괜찮지 않겠나.”
“음, 그것도 그렇구려.”
속내를 알지 못하는 이상.
노예 반란군들과 만나는 건 위험하다.
두 대악마는 뜻을 합치고 대종족 의회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 뒤로 한 달이 지났다.
* * *
비가 내리는 밤, 데모니움 영지의 외딴 숲속.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는 조용한 숲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천으로 모습을 가리고 숲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여기다.”
모습을 가린 여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습기로 가득 찬 허공을 울렸다.
숲속에 마련된 작은 집.
검은색 목재를 써서 지어진 오두막은 숲의 습기 때문인지 이곳저곳이 썩어 있었다.
그녀를 따라온 남자는 말 없이 오두막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삐걱, 삐걱.
관리가 잘 안 되어 뒤틀린 바닥이 섬뜩한 소리를 냈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아래에 있다.”
“용케 이런 곳을 찾아내셨군요.”
“조용한 장소를 물색하다 보니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남자와 여인은 그들을 뒤따르는 자들과 함께 비밀 문을 열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쇠창살, 족쇄, 오래된 혈흔.
주변을 둘러본 남자는 한숨을 푹 쉬며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벋었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흉측한데.’
나는 그동안 펠리스가 거둔 성과를 확인하려고 이곳에 왔다.
결사단이 맡은 임무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우선시되는 건 변절자 사냥.
펠리스와 그림자들은 그런 방면으로는 아주 우수했다.
최근에 급증한 첩자들의 활동에 훌륭하게 대처하여, 정보가 빠져나가지 않게 잘 대처해 주었다.
“일단 잡아들인 사람은 50여 명 정도다.”
“짧은 기간에 잡아들인 숫자가 꽤 많군요.”
“의심되는 자도 10배는 족히 넘으니, 윗선에서 특별한 지령이 내려왔다고 봐야겠지.”
펠리스의 말투는 무미건조하고 딱딱했다.
쇠창살에 갇힌 자들, 그들은 모두 스티지아 출신의 비마족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절대로 대종족 의회를 배반할 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감옥에 잔뜩 묻어있는 혈흔을 쓱 둘러보자, 잠자코 있던 아신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것들은 과거에 마족들이 남긴 흔적이에요. 저희는 물리적인 고통을 주지 않고 심문했거든요.”
“환각을 쓴 겁니까?”
“예, 의심되는 자들을 잡아 와서 환각을 걸었죠. 여기 가둔 사람들은 첩자임을 실토한 자들뿐이에요.”
용의자가 아닌 범인.
숫자가 생각보다도 많다. 나는 죄수들을 천천히 살폈다.
그러다가 감옥에 갇힌 뿔족 하나를 선택했다.
“거기, 너.”
“……예?”
내가 지목한 자를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도 모두 몸을 떨었다.
배신자의 처벌. 혹독한 마계의 상식대로라면 그들의 끝은 아주 참혹할 테니.
나는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다른 비마족들을 배신한 거지? 마족들의 밑에서 살았던 때가 그리웠던 건가?”
질문이 끝나자 뿔족은 머리를 흔들며 고했다.
“절대! 절대로 아닙니다! 그 누가 노예의 삶을 동경하겠습니까. 제 가족들이 스티지아에 잡혀 있어서 어쩔 수가…….”
뿔족의 목소리가 점점 소멸하듯 작아졌다.
이곳에 잡혀 온 자들은 모두 스티지아에 가족이 있는 비마족들.
애초에 이곳에 오기 전부터 협박을 받고 첩자로 포섭된 것이었다.
그동안은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지만, 최근에 갑자기 활동을 시작한 이유가 있을 터.
‘한 달 전에 내 요청을 무시한 이유가 이거였나.’
전부 스티지아 출신의 첩자들이라.
그렇다면 이 불쌍한 자들을 배신자로 만든 자가 누구인지는 안 봐도 훤하다.
나는 시선을 뒤로 던지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잡혀 있는 변절자의 이유는 거의 같아. 이들의 처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요정족의 이바나, 아자크족의 아누스. 뿔족의 깨비까지.
이곳에 잡힌 종족의 대표들이 후드를 벗고 앞으로 나왔다.
표정은 확실히 좋지 않았다. 모두 하나같이 착잡한 표정으로 나의 결정을 기다렸다.
“저는 주군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깨비가 결심을 굳히며 말했다.
이바나는 고민을 길게 이어 갔고, 아누스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솔직히 결정하기는 쉽지 않겠지.
“마음은 다들 이해해. 쉽게 결정할 사안은 아니니까.”
나는 슬쩍 펠리스에게 눈길을 주었다.
결사단의 방식은 아주 간단하다.
배반자는 깔끔하게 죽이고 그와 관련한 모든 일을 덮는다.
이곳에 오기 전에 펠리스가 추천한 방식도 그와 똑같았다.
내 지시가 떨어진다면 여기 있는 죄수들은 모두 죽을 터.
‘어떻게 한다.’
차라리 유능한 첩자였다면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이들은 그저 협박에 당해 놀아난 민간인에 지나지 않았다.
나 또한 고심했고, 결과적으로 합당하다고 생각한 결론을 내놓았다.
“이들을 우리의 손으로 죽이지는 않을 거야.”
“아.”
“음.”
내 말에 탄식과 안도감이 교차하며 지나갔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결정이라도 완벽히 환영받기는 힘들다.
그러니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것처럼, 확고한 신념을 내보일 필요가 있었다.
“책임을 묻는다면, 이런 일을 벌인 양아치들에게 물어야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청중의 얼굴을 살피고서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 적어도 우리가 손해 보는 일은 없을 테니까. 여기에 협박으로 붙잡힌 불쌍한 동족까지도.”
저들은 우리의 정보에 관심이 많다.
그러니 배가 터져 죽을 때까지 정보를 던져주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