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30화>
130. 리벤지 (5)
타오르는 모닥불.
어두운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여러 불꽃이 공간을 환하게 밝혔다.
헬란 본성 근처에서의 전투는 끝났다.
승리자는 인간, 분명 대악마 해치운 큰 승리였음에도 사람들의 얼굴은 밝지만은 않았다.
“혼자 모닥불에 앉아서 뭐 하나? 여기 자네도 좀 들게.”
로빈 공작이 수프가 담긴 접시와 빵을 내밀었다.
주변에는 부하들을 챙기는 미하일이나, 부하들과 함께 식사하는 프레스턴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 지쳐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그만큼 힘든 싸움이었다.
“힘들어서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무리는 아니지. 그래도 오늘 안에 누워서 잠잘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그러게요. 당분간 다들 고생이 많겠네요.”
이번 전투로 적의 본대는 날아갔다.
그러나 플라우로스가 이끌고 들어온 군대의 일부는 아직 헬란 내부에 있다.
적을 몰아낸 다음에는 인페르노 영지를 정복해야 할 터.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네.’
나야 곧 데모니움 영지로 돌아가겠지만, 이 사람들은 내일이면 전선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로빈의 말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내가 수프를 떠먹고 있자, 부하들을 독려하던 미하일이 갑주를 입은 채로 걸어왔다.
“오늘은 정말 수고가 많았다. 싸우는 모습을 보니 훨씬 성장한 모양이던데.”
“적진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지는 수밖에는 없으니까요.”
“음, 정론이로군. 로빈 공작도 수고 많으셨소.”
“별말씀을.”
미하일은 나와 로빈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서 자리를 떠났다.
어떻게 강해졌느냐는 굳이 물어보지도 않았다.
알려 줘도 따라 하지는 못할 테니까.
후르륵.
따뜻한 수프를 떠서 식도로 넘기자 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모닥불에 둘러앉은 로빈도 말없이 숟가락을 움직일 뿐.
별다른 대화를 주고받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살아 있음을 감사하며 이 순간을 음미했다.
‘나야 마계로 넘어와서 대악마랑 여러 번 싸웠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악마의 진정한 공포를 처음으로 맛보았다.
물론, 연방을 공격했던 부에르도 있었으나 그때는 용가리 친구와 싸움을 치른 이후였다.
무엇보다 여기 모인 자들은 내로라하는 실력자들.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조차 떼거리로 죽어 나갔으니 그 충격은 더욱 크겠지.
“여어어, 여기 있었나?”
유독 말꼬리가 길게 늘어진 프레스턴이 가까이 오며 입을 열었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등에는 자잘한 상처가 많았고 손톱도 몇 개나 깨져 있었다.
“다치셨네요.”
“운이 좋았지. 잠시 같이 걷겠나?”
“그러시죠. 공작님, 제 빵이랑 수프 좀 지켜 주세요.”
“로빈, 저 녀석이 네가 훔쳐 먹을까 봐 경계하고 있는데?”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저 증세는 좀처럼 나을 기미가 안 보이네.
나는 로빈과 썬데이를 딱 하게 보면서 일어섰다.
프레스턴이 앉아 있던 곳에는 탐정들이 모닥불을 쬐는 중이었다.
몇몇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몇 명이 안 보이는데.’
꽤 먼 거리를 걸어서 움직였다.
프레스턴이 인도한 장소는 인적이 뜸한 곳이었다.
넓은 평원에 활주로처럼 보이는 도로가 깔렸고, 격납고처럼 보이는 창고가 눈에 띄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입니까.”
“우리가 새로 개발한 전쟁 병기가 있는 곳이지.”
프레스턴이 걸어오자 군인은 경례를 붙이며 창고의 문을 열어 주었다.
이곳은 전투의 참상을 비껴갔다.
아마도 일부러 전장이 되지 않게 한 거겠지.
어쨌든 불이 환하게 켜진 공간 안으로 들어오자 거대한 물체가 나를 맞이했다.
“이건 비행기군요.”
“그래, 옛날에 미국이 만들었다던 평화 제조기지.”
두 날개를 합한 가로 길이는 거의 50m.
비행기의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는 거의 40m에 육박했다.
몸통의 아랫면에는 문 같은 것이 있어서, 폭탄을 떨어트리기 좋게 제작되었다.
비행기 중에서도 폭격기. 그것도 다량의 화력을 투사하는 용도로 쓰일 법한 크기였다.
“이름은 슈퍼포트리스네.”
“말 그대로 날아다니는 요새군요.”
“그렇지. 이걸로 그 신성한 폭탄도 떨어트릴 수 있으니. 대단하지 않은가?”
프레스턴은 자랑하듯 설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이곳을 나를 데려온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걸.
“여기 슈퍼포트리스에서 떨어트릴 폭탄도 만들었네. 이제 대량 생산에 들어갔지.”
“크기가 대단하네요.”
프레스턴은 사람보다도 더 기다란 폭탄을 들어 올렸다.
무게가 거의 200kg이라고 적혀 있으니, 성능 하나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열심히 설명하던 프레스턴은 어느 순간에 말을 멈추었다.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더니,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게 꼭 조나단의 복수를 해 줬으면 좋겠네.”
조나단.
그는 프레스턴의 부관으로 이번 원정에도 참여한 탐정이었다.
옛날에 세븐 시티를 떠났을 때, 나를 호위하겠다며 따라붙었던 기억이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파문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온 감정이 목소리로 바뀌어 튀어 나갔다.
“죄송합니다.”
“자네에게 사과를 들으려는 의도는 아니네. 그럴 이유도 없지. 우리는 모두 마족을 멸하고자 이곳으로 왔으니까.”
“하지만 마계 원정에 대해 말을 꺼낸 건 저입니다.”
“그렇기는 하네만. 그게 책임이 될 수는 없다네.”
프레스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의 목소리와 눈에서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드러났다.
프레스턴은 감정을 가다듬고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아니, 사실 마음 한쪽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중년의 남자는 내 시선을 피하고 엉뚱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자네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네. 자네가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이유 말이네.”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포장된 이유 말고 진실을 말해 주게. 그거 아나? 이번 사망자가 1만은 가볍게 넘을 거라고 하더군.”
내가 있던 전선은 나의 노력으로 희생자의 수를 대폭 줄였다.
하지만 플라우로스의 공격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결계진을 설치한 곳으로 깊숙이 끌어들여야 했기에 일부러 지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나 사상자가 많은지, 정확히 숫자를 가늠하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많이들 죽었고 또 더 많이 죽겠지. 나는 이유도 모르고 죽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저를 이곳으로 불러내신 겁니까?”
“우선 자네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었네.”
자네가 난처할지도 모르니까.
프레스턴의 마지막 말이 심장에 날아와 꽂혔다.
나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판게아의 군대를 마계에 쑤셔 넣었다.
지금 나는 그 행동에 책임을 요구받는 것이었다.
“나는 자네를 탓하지 않겠네. 아니, 탓하고 싶지 않네. 마계와의 싸움은 어차피 확정이었으니까. 그러니 말해 주게.”
대답은 피할 수 없나.
결국, 나는 결심을 내려야 했다.
“진실을 알고 나면 후회하실 겁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실지도…….”
“빠르든 늦든. 후회는 언젠가 하게 되지 않겠나?”
“솔직히 말하자면, 단장님이 감당하실 무게가 아닙니다.”
나라고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내가 굳이 사실을 숨긴 이유는 두 가지다.
신들이 인간을 대상으로 장난질을 치고 있다는데 누가 믿겠는가.
만약 내가 사실을 말해 준다고 해도, 세계수나 관리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대동맹의 한 세력 대표가 들을 수 없는 정보라면. 점점 더 듣고 싶어지는군.”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단 설명을 들으면 죽을 각오도 하셔야 할 겁니다.”
“이미 가족들을 많이 잃었네. 이 전쟁에서 나만 멀쩡히 살아갈 생각은 더더욱 없고.”
“확고하시군요.”
나는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이 이야기를 남에게 전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입을 피해는 미미하다.
반면에 프레스턴은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길지도.
‘하지만 나에겐 책임이 있으니까.’
최소한 본인이 원하고 있다.
적이 되든 아군이 되든. 그건 내가 진실을 모두 알려 주면 들을 수 있을 터.
“저는 판게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입니다.”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진솔하게.
나는 여태까지 모은 모든 정보를 말하기 시작했다.
* * *
데모니움 영지의 본성.
나는 전쟁터에서 돌아와 사람들이 기다리는 본거지로 돌아왔다.
이제는 여기가 고향 같단 말이야.
이번 전쟁에서는 유독 많은 일이 있었다.
‘단장님과의 일도 그렇고.’
원래 프레스턴은 진실을 듣고 부하들과 공유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그 생각을 바꿨다고 알려 주었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던 진실이 모두 거짓으로 드러나는 느낌일 테니까.
- 사람은 믿음이 부정당했을 때, 속절없이 무너지는 법이야.
프레스턴의 말이 속에서 맴돌았다.
그 말이 옳다. 그 아저씨처럼 강인한 사람은 세상에 몇 되지 않는다.
게다가 프레스턴은 오히려 같이 생존을 도모하자며 위로까지 해 주었다.
“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솔직하게 답했고 공은 프레스턴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사실을 밝히니 마음만은 후련하다.
돌이켜보면 숨기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 동료에게 의심을 받을 바에야 모두 털어놓는 게 좋을지도 모를 일이다.
“루카 님! 루카 님!”
혼자서 사색의 시간을 가지려 했건만.
저 멀리, 데모니움 본성에서 뛰어오는 짜증 나는 토끼 귀가 보였다.
나는 인상을 팍 쓰면서 개새끼를 노려보았다.
“시간이 남아돌아?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앗! 너무해요. 그리고 일은 전부 다 끝냈답니다.”
후후후, 토끼녀는 음흉하게 웃었다.
신이고 자시고, 내가 그간 토끼녀에게 맡긴 일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일부러 제대로 된 생활이 불가능하도록 조져놓은 건데.
“그걸 어떻게?”
“뭔가, 도저히 해낼 수 없을 일인 걸 알면서도 시켰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분명 기분 탓이겠죠?”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냐. 생각보다 속도가 빨라서 하는 말이지.”
“간단해요! 세계수랑 일을 나눴거든요!”
팡!
가슴에 구멍이 뚫린 토끼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압축 주머니에 있던 마공학 리볼버가 어느새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누구에게 뭘 시켜? 화가 너무 난 나머지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느엑.”
“죽은 척하지 말고.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세계수에게 일을 맡긴 거야?”
“아이고 아파라, 그래서 잡일만 골라 시켰죠.”
“자랑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년은 여기서 완전 좆밥이거든요!”
“웃으면서 욕하지 말고.”
도대체 둘의 앙금이 얼마나 큰 거야.
평상시에는 순수한 척만 골라서 하는 토끼녀가 대뜸 쌍욕을 박았다.
보아하니 세계수도 당분간은 데모니움 영지에 있을 텐데.
‘집안 정리부터 해둬야지. 이대로 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나는 입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토끼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윽한 시선을 눈치챈 두 귀가 쫑긋거렸다.
어떻게든 이 둘의 관계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
더 나쁘게 만들든, 아니면 서로 협력하게 만들든.
“일 하나만 더 추가하자.”
“에에? 저는 있죠. 힘든 건 아주 싫어하거든요.”
“그러면 내 영지에서 꺼져. 행정관은 세계수에게 시키면 되니까.”
“아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그래서 시킬 일이 뭔데요?”
“세계수랑 같이 저번에 이야기했던 방으로 와.”
토끼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싫어하면 뭐 어쩔 건데?
내가 턱으로 데모니움 본성을 가리키자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뛰어갔다.
‘그래, 이왕 지옥에 떨어졌으면 용암 속에서 온천욕이라도 즐겨야지.’
2차 회담의 전략을 구상하며.
나는 저번에 셋이 모였던 조용한 방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