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29화 (129/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29화>

129. 리벤지 (4)

고작 악마 따위가 대악마의 공격을 버티겠나.

푸르카스가 만약 근원을 탈취했다면, 라일라크가 계속 살아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자 참수]는 푸르카스를 불러내는 티켓과도 같았다.

‘내가 몰랐다면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겠지.’

이로써 근원 도둑의 정체는 밝혀졌다.

다음은 그 이유다.

“그래서 친히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음.”

내가 질문을 던지니 푸르카스는 깊은 침음성을 냈다.

만약 나를 없애버릴 작정이었다면, 계획을 실행할 기회는 얼마든지 많았다.

죽일 능력이 없거나, 다른 용도로 나를 사용할 생각이거나.

아마 이 둘 중 하나이리라.

“내 정체가 알려져도 상관은 없으니까.”

오히려 푸르카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인가.

나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푸르카스는 살짝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혹시 몰라서 말해 두지. 마계에서 나를 쓰러트릴 자는 없다. 발라크나 다른 벌레들이 뭉친다고 해도.”

“원래 개가 크게 짖으면 보통 겁을 먹은 거더라고.”

“훗, 배짱 하나는 인정하마.”

근원을 훔쳤으니 그 자신감이 어련하실까.

다만 의문이 든다면, 그 대단한 실력으로 어째서 마계를 평정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쓰러트릴 자가 없다. 나는 푸르카스가 은연중에 뱉어낸 말에서 힌트를 잡아냈다.

물론, 아직 여러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뜻은 잘 알겠는데.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나는 손을 펴서 주변을 가리켰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굳이 모습을 드러낸 건 나와 싸우기 위해서냐는 뜻이었다.

내 물음에 푸르카스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여기서 할 일은 끝났다. 다만 네가 하나를 얻어갔으니, 나도 하나를 빼앗아 가겠다.”

“뭐?”

“발라크의 동맹을 유지하게 둘 수는 없지.”

내 정체를 까발리겠다는 뜻이겠지.

현재의 정세를 따지자면, 푸르카스를 다른 대악마들이 포위한 형국이다.

만약 여기서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대악마들은 나를 경계하겠지.’

푸르카스는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일 터.

대악마들의 신경이 나를 향할 테니, 분명 나에게 좋은 일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역시, 좀 쫄리긴 한가 보구나?”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냐.”

“아무도 쓰러트리지 못한다더니, 갑자기 적들을 분열시키겠다는 거잖아. 전지전능한 초월자가 쓸 방법은 아니지.”

“좋을 대로 생각해라.”

“무엇보다 다른 대악마들에게는 어떻게 알리려고?”

안 그래도 푸르카스는 근원 도둑으로 강하게 의심받고 있다.

여기서 내가 사실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양치기 소년이 늑대가 왔다고 말하는 꼴이다.

“견고한 성벽을 무너트리는 건 작은 실금이지.”

푸르카스는 기분이 상했는지 샐쭉거리며 대답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대충 이해가 갔다.

직접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나를 모함할 방법은 많으니까.

나를 노려보던 상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

“시간이 다 되었군.”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피가 달라붙어 떡이 된 머리카락이 볼살을 간지럽혔다.

진득한 혈향과 불에 구워진 고기 냄새가 후각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라일라크는 이곳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질 때 잠시나마 공간에 구멍이 뚫리는 걸 보았으니.

공간을 뛰어넘어 림보 영지로 떠나버린 것처럼 보였다.

‘근원이라는 거. 엄청나게 유용하네.’

세계수가 사용했을 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원래부터 초월자였고 신이라면 그만한 힘은 가지고 있을 테니.

그러나 푸르카스가 사용하는 걸 보니 더욱 탐이 났다.

분명 몸값과 생존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겠지.

콰아앙!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상공에서 화염과 얼음이 만나 폭발하며 내 상념을 멀리 밀쳐냈다.

찰스 랭커셔와 플라우로스의 싸움.

그 둘의 결투는 여전히 치열했고, 상공을 열기와 냉기로 물들이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얘 완전 쓰레기네.”

부하만 데리고 튀었잖아?

심지어 인간들에게 밀려난 라일라크의 군대는 아직 여기에 있었다.

겨우 라일라크 하나만 살려내서 빠져나간 건가.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적이 남아 있으면 전부 죽이면 되니까.

* * *

[그림자 난무].

나는 무명에 3가지 기운을 집중하고 참격을 날렸다.

무명에서 빠져나온 검강이 하늘에 뜬 표범을 덮쳤다.

하나하나의 공격력은 낮다. 그러나 그것이 수백, 수천이 되자 플라우로스도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크윽! 라일라크는…….”

플라우로스는 화들짝 놀라며 화염을 흩뿌렸다.

절대 죽지 않던, 본인조차 의문을 가지게 했던 악마가 사라졌다.

그 괴물 같던 하이 뱀파이어의 수장을 죽이다니.

표범 머리는 패색이 짙은 얼굴로 창을 소환했다.

“배신자 놈!”

투아앙!

공간을 통째로 찢어버릴 듯한 파열음.

플라우로스가 던진 투창이 내 검강을 전부 꿰뚫으며 날아왔다.

나는 스텝을 밟으며 창을 흘려낸 뒤, [암적뢰]를 펼치며 거리를 좁혔다.

“가까이 붙으면 투창 같은 건 사용하지 못하겠지.”

등 뒤에서 되돌아오던 투창의 기운이 사라졌다.

동시에 플라우로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순식간에 불꽃이 일어나며 전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푸화아아악!

근접전에서도 유용하다는 거지?

[환영 활보]를 쓰며 달아나자, 상대는 허공에 화염을 흩뿌리며 나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그의 온 신경이 나를 향했다.

나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본래 그의 상대였던 남자의 존재도 잊고서.

까드드득.

그가 내뿜던 화염이 모두 얼음에 갇혔다.

얼음 따위는 간단히 녹여 버렸을 화염이 그대로 얼어붙어 소멸해 버렸다.

단순한 냉기가 아닌, 봉인에 가까운 마법.

플라우로스는 황급히 고개를 틀어 탑주를 찾았다.

이 친구는 멀티테스킹이 영 별로인가 보네.

그림자 검술 3번, [달빛 베기]

오러에 마기와 신성력을 끼얹은 흑도.

손에 들린 무명의 칼날이 엄청난 숫자로 불어났다.

분신들 틈에서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플라우로스는 다급히 몸 주위에 투창을 주르륵 생성해냈다.

“거슬린다!”

8개의 송곳니가 내 급소를 노리고 쏘아졌다.

손으로 던지지 않으면 위력은 떨어지는지, 불꽃의 열기는 다소 약해진 느낌이었다.

퍼퍼퍽! 투창이 내 몸을 완전히 관통하며 뒤로 빠져나갔다.

순간적으로 신형을 흔들어 급소는 피했으나 몸이 누더기가 되는 건 피하기 힘들었다.

‘뒤지지만 않으면 괜찮아.’

살은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다.

적의 뼈를 취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분열된 검이 하나의 점으로 압축되며 플라우로스를 집어삼켰다.

촤앙!

칼날이 하나로 합쳐지며 적을 난도질했다.

참격이 상대의 핵에 닿은 느낌이 들었다.

기세가 눌린 쪽은 플라우로스. 나는 혈마력으로 상처를 치료하며 발을 뻗었다.

탑주는 상황을 잘 이해하고 주변 공간을 그의 냉기로 가득 채웠다.

이제 광범위한 화염은 일으킬 수 없을 터.

“……좋다, 덤벼라!”

플라우로스는 상처 입은 몸으로 제자리에 섰다.

도망가도 잡힐 것 같아서 맞서 싸우는 주제에.

나는 무명을 앞세우며 거리를 좁혔고, 표범은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쯤에서 개소리를 한 숟가락.

“정정당당하게 붙자!”

“2대1이 어디가 당당하냐는 말이냐!”

억울하게 소리친 플라우로스의 길쭉한 다리에서 화염이 일어났다.

몸통을 노리는 미들킥, 나는 그것을 피하며 검을 움직였다.

쉬릭, 아슬아슬하게 스친 칼날에 놈의 허벅지가 벌어지며 피가 쏟아졌다.

“크읏.”

뒤이어 날아온 팔꿈치.

상대는 검을 움직일 공간을 주지 않기 위해 전진을 택했다.

이번에는 어찌나 급했는지, 화염으로 팔을 두르지도 못했다.

‘이러면 조건이 맞지.’

내 몸이 검붉은 안개가 되며 흩어졌다.

무명에 깃들어 있는 [그림자 장막]의 효과를 사용한 것이었다.

안개가 되어버린 나를 뚫고서 플라우로스가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촤악!

나는 곧바로 원래대로 돌아와 등을 보인 상대를 베어버렸다.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골반까지.

플라우로스는 커다란 상처가 입고서 피를 토해 냈다.

대악마들의 공격이 대부분 이 기술을 무용지물로 만들어서 문제일 뿐.

‘조건만 맞는다면 [그림자 장막]이 사기긴 하지.’

플라우로스의 육신은 힘을 잃고 땅으로 추락했다.

이어서 지면으로 곤두박질친 그의 주위로 마법진이 빼곡하게 나타났다.

퍼퍼퍼펑! 격렬한 폭발 소리와 섬광에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나는 지면으로 내려와 자욱하게 연기가 낀 장소를 살폈다.

“대악마는 살아 있다.”

탑주는 하늘에서 마법으로 깊게 파인 지형을 관찰했다.

점차 옅어지는 폭연 속에서 플라우로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실루엣을 통해 확인한 그의 상태는 끔찍했다.

오른팔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다리 하나도 관절이 빠져 덜렁거렸다.

“핵을 다쳐서 치료를 못 하나 봐?”

내 비웃음이 촉매제가 되었나.

플라우로스의 주변에서 마기의 농도가 급속도로 짙어졌다.

광폭화,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으로 플라우로스는 싸움을 선택했다.

탑주가 주변의 공간을 장악하며 불길을 잡으려 했으나 그것마저도 뚫어냈다.

“배신자 놈! 길동무로 삼아 주마!”

파악!

플라우로스가 서 있던 곳에서 흙이 튀었다.

엄청난 속도로 연기를 빠져나온 그의 손에는 창이 들려 있었다.

상대는 창과 온몸에 불을 붙이고 돌진했으니, 딱 보아도 같이 폭사하겠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네놈이 여태까지 막아 내지 못한 힘이다! 한번 견뎌 보아라!”

마지막이라 생각한 플라우로스의 말수가 많아졌다.

저 화염이 무서워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는 했다.

그렇다고 못 막는다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그림자 검술 7번, [개기일식]

거의 바닥난 오러홀에서 혈마력과 오러, 그리고 마기가 뽑아냈다.

무명의 칼날에 덧씌워진 어스름한 빛.

나는 상대의 기세를 살피고서 [오버 클럭]을 사용해 강제로 기운을 끌어올렸다.

꽈앙! 드드드드.

두 힘이 격돌하며 결계진이 출렁였다.

대악마의 힘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결계진은 아슬아슬하게 충격파를 버텨냈다.

이거 진짜 의도는 자살 공격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을지도?

“크으으.”

플라우로스가 신음을 내며 몸을 떨었다.

잘 살펴보니 그의 다리는 냉기가 달라붙어 통째로 얼어붙는 중이었다.

푸화아아! 생명을 불태운 불길은 더욱 거세졌으나 상대의 목숨도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미안하지만, 네 부하도 탈출은 못 해.”

결계진을 깨부수기에는 화력이 부족했다.

나를 길동무 삼겠다고 말했지만, 실제 의도는 부하들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힘이 충돌하면 결계진이 무너질지도 몰랐으니까.

“……실패군.”

모든 기운이 무명에 빨려 들어가자.

플라우로스는 짧은 말을 남기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에 상태창이 싸움의 끝을 알려주었다.

[스킬: [??]의 등급이 ‘S’가 되었습니다. 모든 에너지+15]

잔여 횟수가 오르지도 않았고 숙련도가 끝까지 차오르지도 않았다.

S등급이 끝이 아닌 건가.

나는 알림에서 눈을 떼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체에 시선을 고정했다.

얼어붙은 표범의 사체. 탑주가 다가와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얼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정말 간신히 이겼군. 혹시 그 괴이한 악마는 어떻게 이겼나?”

“어떻게든 잘 처리했습니다.”

“그렇군, 지쳤을 테니 쉬도록 하게.”

탑주는 다른 사람들을 지원하러 떠났고.

나는 자리에 남아 플라우로스에게서 마기를 뽑아냈다.

6832점.

대악마의 마기도 흡수하면 할수록 그 효율이 떨어진다.

그래도 수치로만 따지면, 발라크와 비슷한 수준으로 마기가 짙어졌을 터.

근원 도둑의 정체를 알아낸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상당한 이익을 거둔 셈이다.

‘그나저나, 이번 전쟁은 끝났지만.’

새로운 전쟁의 씨앗이 이미 토양에서 위로 머리를 내미는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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